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 73 - 28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백송은 추사 일문의 상징이 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산의 백송은 수령이 약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죽어서 처리를 해놓았다.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백송이 희귀종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예산 백송은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인 1809년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가 내려 준 백송이 있다. 그래서 백송은 추사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예산의 백송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과 거리가 멀지 않다.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어, 지나는 길에 들려볼 만하다.

 

수술자국이 마음이 아파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래 묵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자국이 보이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예산 백송을 찾아가니 생육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곁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들에 비해 빈약하다. 수술 흔적도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록 생육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뿐만 아니라, 추사 선생이 필통에 씨를 넣어 갖다가 심었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예산 백송. 앞으로 보존이 잘 되어, 더 많은 씨를 퍼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원 천년 고찰 절집인 선원사에는 예쁜 녀석들이 지난 해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약 한 달 전에 귀여운 녀석들을 낳았다고 하네요. 이 녀석들 암 수 한 마리씩인데 아직 젖도 떼지 못했습니다. 엄마 곁을 따라다니다가 사람들이 오면 쫄쫄거리고 따라 나옵니다.


하얀 색이 솜털 같기만 한 포메라이안 두 녀석인데 엄마를 떨어져서도 곧잘 놉니다.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요. 두 녀석과 함께 있으면 걱정 근심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역시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끼들은 다 귀여운 것 같습니다. 이 녀석들 좀 보시죠.


  

이 녀석이 숫놈입니다. 그래도 으젓하죠.


두 녀석은 꼭 붙어 다니네요. 아직 어려서인지









99칸의 대갓집. 그러나 후손들이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고 신흥재벌에게 사랑채와 행랑채를 팔았다고 한다. 원래는 99칸의 커다란 대갓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은 집으로만 보아도 그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가 있다. 도대체 이 집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2호 '김좌근 고택'을 찾아갔다.


이 김좌근 고택은 벌써 올들어 두번이나 찾아가보았다. 갈 때마다 복원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7월 23일 그 무더운 더위를 피해 찾아간 백사면 내촌리. 아직 주변은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반듯하게 복원이 끝나가는 집은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가 있다.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해 지은집


김좌근 고택은 이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인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얕은 산자락을 배산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전통 한옥으로 지은 99칸의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집의 치목이나 석재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이 집의 과거 위세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담장과 행랑채는 사라지고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이 집은 영의정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한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솟을대문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남아있었다는 김좌근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싸안고 있는 규모있는 대갓집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런 집이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이 남아있다.

 






관리가 힘들어 팔아버린 집


집이 워낙  크고 관리가 힘들어지자, 후손들이 신흥재벌하게 이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랑채 등을 옮겨가는 도중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나마 이건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많은 고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원래 김좌근 고택은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조가 되었다. 안채는 ㄷ자 형으로 중문과 연결된 사랑채가 있었으며, 바깥문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채가 ㄱ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가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안채의 담으로 가로막혀 두 동의 건물이 서로 독립된 형태로 서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두 개의 건물 사이에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었으며, 뒤편으로는 널마루로 짠 회랑을 달아내어 서로 왕래를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회라잉 없어졌으나, 과거에는 이 회랑을 이용해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닥터 진'의 김병기가 지은 집, 옛 풍취는 그대로 남아


복원 공사를 마친 집을 돌아본다. 사랑채의 한편을 잘 다듬은 장초석으로 주초를 삼고, 그 위에 누마루를 올려 누정을 삼았다. 집은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으로 마련하고, 치목과 치석이 모두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를 마련한 듯하다.

 





꽃담을 아름답게 조성한 안채는 지금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가 있다. 아직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잡초가 수북히 쌓여있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에 붙여 방을 드렸다. T 자 형으로 조성한 안채는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중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 앞쪽이지만, 그 뒤편의 형태도 똑 같이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안채는 서쪽으로 부터 다락과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이다. 부엌은 세칸 규모로 문을 들어서면 토를 달아 내었다. 그 오른쪽에도 다락을 드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이 집의 위세를 알만하다. 일부가 사라져버려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다면 그 어느 집보다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좌근 고택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세상을 배운다. 요즈음 드라마 '닥터 진'에서 보이는 김씨들의 세도가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졌음을. 하기에 영원한 세도는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닥터진에서 대원군과 권력다툼을 하는 좌의정 김병기의 구성은 역사와는 많이 다르게 표현이 되었지만 말이다. 

설봉산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이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불이라고 하지만은 그 모습은 오히려 나한상에 가깝다. 이 자연암석에 조성한 마애불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화좌대와 광배

 

사람들은 꼭 국보나 보물이라야 문화재인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국보나 보물이 더욱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유형문화재나 향토유적 등도 같은 문화재이다. 그것을 어디서 지정을 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지자체에서 지정한 향토유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천시 향토유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영월암 창건 장시에 조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는 이 광배와 연화좌대가 주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주불은 없어지고 광배와 연화좌대만 도괴되어 있던 것을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 놓고, 그 위에 1980년에 새롭게 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마모가 심한 광배

 

광배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배형으로 조성한 광배는 많이 마모가 되어 문양 등을 쉽게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현재 좌불상이 있어 뒤편에 있는 복판을 촬영하기는 무리였지만,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을 연잎을 둘렀다.

 

중앙의 연잎 주위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화염문과 당초문을 조성하였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의 좌우에는 화불이 3구 조성되어 있으며, 불상을 주착했던 흔적이 나 있다. 광배의 전체높이는 156cm, 폭은 118cm이며 두께는 45cm 정도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연화좌대

 

연화좌대도 대좌에 조각한 것들이 많이 마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 마디로 장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화좌대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8각으로 조상한 안상, 그 위편에는 앙련좌와 복련좌를 쌓아 올렸다. 4부분으로 조성한 좌대는 각각 1석을 사용해 조성하였다.

 

전체높이가 107cm인 연화좌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앙련좌 위에 올린 팔각형의 석주에는 나한상을 조각한 듯하다. 그러난 심하게 마모가 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 광배와 연화좌대 주변에는 몇 개의 석물이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이 영월암의 역사로 보아,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23일, 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른 영월암이다. 그저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런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문화재라고 해서 늘 좋은 날씨에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더위에 올라 만난 수중한 문화재 한 점.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7월 15일. 이틀간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멈춘 듯하더니, 이번에는 날씨 몸을 무겁게 할 정도로 덥다. 구례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인 사성암은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도선굴에는 원효와 의상, 도선과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대가 있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셔틀버스로 운행하는 사성암 가는 길


현재 사성암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인 몇 채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전각 안에는,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음각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초반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애상이 보호하는 이 적각 앞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구비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네 분의 고승이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로 오르다가 보면, 800년이 지났다는 고목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괴목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소원바위. 그 앞에는 명패를 적은 나무들을 가득 걸어놓았다.

 

 


지금은 밑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사람들을 사성암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왕복요금은 3,400원이며, 언제라도 사람들이 차면 출발을 한다. 예전에 이곳을 걸어 올랐을 때 3시간이 넘었던 기억을 하면, 이제는 답사도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굴을 지나면 절경이 펼쳐져


산왕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도선굴로 들어선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한 것이 습기가 가득하다. 예전 고승들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참선을 한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곳에서 더욱 더 인간의 힘든 것을 이겨내며 스스로 달굼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굴을 나오면 절벽에 붙들어 매듯 만들어 놓은 나무로 짠 길이 나온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붉은 섬진강만 보일 뿐, 흐린 날이라 그 앞 절경이 감춰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돌아내려오는 길에 보니 젊은 사람들이 괴목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저 나무처럼 그리 오랜 세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늘 다녀보지만 좋은 절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가는 것이지만.


사성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 장 촬영을 하려고 하니 문화재라서 사진을 찍으면 인된다고 한다. 요즈음 답사하기가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사진촬영금지 때문이다. 그래도 허락을 받고나서 대개는 촬영을 하지만, 어떤 곳은 아예 딱 잘라 거부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씁쓰레하다. 사진촬영을 막는다고 문화재보호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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