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4대강 사업에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4대강 사업은 꼭 해야 할 국책사업이라고 홍보를 했고,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일부 인사들을 불러들여 4대강 사업이 엄청난 이득을 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물론 4대강 사업에 구간 공사를 맡은 대기업들이나, 일부 주변 땅 장사들은 이득을 보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홍수와 가뭄에 대비한다는 이 4대강 사업은, 그들 말대로 그렇게 홍수와 가뭄에 대비를 할 수 없는 무늬만 현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4대강 공사 전 굴암리 강길을 걸으면서(2010, 2, 9)

 

찜통더위에 타들어가는 농심

 

10일이 넘게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장마 때 내린 비로 물줄기가 형성이 되었던 계곡도 다시 말라 들어가고 있다. 낮에는 더위로 인해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농사꾼들은, 저녁 7시 경이 되면 모두 논과 밭으로 달려간다. 논과 밭에 ‘물대기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8월 5일(일) 오후 8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논과 밭에는 어르신들이 연신 말라가고 있는 개울에서 모터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고 있다. 논과 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이다. 이 마을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기에 지하수를 이용하는데, 일부 주민들은 식수가 마를까봐 그것도 걱정이라고 한다.

 

해돋이 길을 걸으면서 본 남한강은 정말 아름다웠다(2010, 3, 28)

 

장마가 끝나고 난 뒤 개울을 꽉 채우고 흐르던 물줄기는, 이제 겨우 한 구석을 따라 흐르고 있다. 조금이라도 물이 고여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호스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저녁 늦게 물을 대기 위한 ‘물대기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가뭄대비는 무슨, 새빨간 거짓말이야”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어둑해지는 시간에 개울가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길가에는 여기저기 차들이 서 있다. 모두 논과 밭에 물을 대기위해 나온 사람들이다. 타들어가는 논바닥을 바라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쉬고 있다. 봄철 내내 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간 농심은, 이제 다시 이 찜통더위에 타고 있다.

 

“물이 부족한가 봐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 하러 이 시간에 나와 이 짓을 하겠소. 지금이 논에 물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이렇게 논도 밭도 다 말라가고 있구먼.”

“비가 안와서 걱정이네요”

“비가 며칠 내로 오지 않으면 그나마 이 개천 물도 다 말라버릴 테고, 정작 그 다음이 문제지. 돈 들여 4대강인지 먼지 해놓고, 물 걱정 하지 말라고 하더니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지”

 

이포나루,터, 옛날 노산군(단종)도 이곳을 이용해 영월로 향했다

 

어르신은 자신들이 무엇을 알겠냐고 한다. 그저 4대강 개발을 하면 가뭄걱정 홍수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 4대강 중 보를 세 개씩이나 만든 남한강이 멀지 않은 곳에 흐르고 있고, 그 물을 이용해 물 걱정 안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가뭄걱정으로 이렇게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는 것.

 

넘쳐나는 강물은 그림의 떡

 

지난 5~6월 봄 가뭄 때도 남한강에는 물이 넘실대는데, 인근의 나무들은 말라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가뭄대비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22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조성한 4대강 사업. 그 중 남한강 3개보를 건설한 곳 여주. 요즈음 여주 사람들 중에는 4대강 사업이 허구라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눈앞에 가득 차 흐르는 4대강을 보면서, 속만 더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다.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개천에 있던 어르신은, 허리를 두드리며 자조 섞인 한 마디를 한다.

 

신륵사 앞 바위에 모여있는 중대백로(2010, 2, 2)

 

“전부 천벌을 받아야지. 그래야 다시는 이런 짓거리들을 하지 않을 것이여. 강을 깊게 파놓아 오히려 물이 그리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강물이 지천에 있는 여주읍 천송리에 지어놓은 여성회관 앞에 가봐, 올 봄 가뭄에 나무들이 다 말라 새빨갛게 타 죽었어. 그게 남한강이 가뭄에 대비한 것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이여 다”

안회당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한인데도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사적 제231호는 홍주성과 홍주아문, 그리고 안회당 등이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그 중 안회당은 홍무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일반 동헌과는 전혀 다른 안회당

 

안회당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동헌과는 그 형태가 전혀 다르다. 동헌과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느 부유한 집의 사랑채 정도로 꾸며져 있다.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다. 안회당 뒤편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있었다. 근민당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하다.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안회당이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이었을 것이다. 홍주성은 처음 축조한 년대는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안회당은 모두 22칸으로 조성된 목조 팔작집이다.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후에, 고종 7년인 1780년 목사 한응필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처음 안회당을 지었을 때, 안회당이라 쓴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뛰어난 목조건축의 미가 돋보여

 

안회당을 돌아보면 이런 아름다운 집에서 집무를 하는 목사는 절로 사람들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름답게 꾸며진 동헌이다. ㄱ자 형으로 된 안회당은 정면 7.5칸에 측면 2.5칸 정도로 되어있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 방이 달려있다. 누마루 방은 모두 두 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다.


 

 
 


 

측면 반 칸의 앞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뒤편으로는 높다랗게 연도를 뺀 굴뚝을 올렸다. 누마루 방 뒤로는 개방마루를 놓아 뒤편 여하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동헌이라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날렵하게 위로 솟은 처마는 한옥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적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사람들

 

홍주성과 안회당 등을 돌아보다가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 있다.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곳은 사적 안이 아닌가. 더구나 안회당과 건물 앞에 있는 홍주아문 등은 모두 사적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바로 곁에 주차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곳은 많은 차들이 문화재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주차장이 부족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홍주성은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들을 매입하여 주변 정리를 하고, 홍주성곽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홍주아문과 안회당 주변에 있는 건물부터 먼저 철거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많은 예산이 들어 불가능하다면, 그전에 주차문제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적지 안에 버젓이 들어가 주차를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요즈음 인터넷에서는 ‘원자현’이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원자현은 1983년 생으로 만 28세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원자현의 프로필을 보면 MBC리포터이자 MC이기도 한 여성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을 나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원자현이란 여성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연일 기사화 되는지 궁금하다.


‘원자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원자현. 원자현 가슴사이즈, 원자현 비키니, 원자현 학력, 원자현 가슴수술, 원자현 몸매, 원자현 의상논란, 원자현 허리, 원자현 22인치, 원자현 망언 등, 수도 없이 많은 연관검색어가 보인다. 그만큼 원자현이란 여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일 게다.(문제 붕대의상 사진은 방송화면 인용)

 

 

관심은 관심으로 그쳐야


‘방송인’ 혹은 ‘연예인’ 들이라고 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요즈음은 인터넷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블로거들은 물론, 각종 인터넷 매체의 언론까지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때로는 필요이상의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이다.

 

원자현의 트위터 캡쳐

 

원자현이란 여성이 요즈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의상논란이다. 런던올림픽 소식을 전하면서, 조금은 보기에 부자연스런 의상을 착용했다는 것이다. 원자현의 트위터를 검색해보니 그런 의상논란은 하루 이틀이 아닌 듯하다.


방송인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위해 다양한 의상을 입는 것은 결코 흉이 될 수가 없다. 그 의상의 형태가 보기에 민망하다거나, 노출이 심하다거나 하는 것을 들어 뭇매를 가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단 생각이다. 이번에 원자현의 의상 중에 ‘붕대의상’이란 옷이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 보기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관심이 이슈화가 되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가 있다고 하면 그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저 관심을 끄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 보아주면 될 것이다. 마치 내 생각이, 보는 사람들 전체의 생각인 양 끌고 간다는 것은 조금은 그렇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얼굴, 그럴수록 조심해야


아침부터 원자현의 허리가 약간 보이는 옷에 또 말들이 많다. 원자현이 트위터와 미니홈피를 살펴보았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말들에 대해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하다.


「피곤하지만, 보람차고 아프지만 괜찮다. 잡음 따위에 굴해서야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그런 잡음들에 상종할 가치도, 겨를도 없다ㅡ


모든 정보와 멘트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들어가ㅡ 렌즈만을 응시하며 다하나씩 차곡차곡 입으로 꺼내 정리해내야 한다ㅡ 지금은 여기에 집중력 쏟는 것 만으로 넘 벅차고 피곤한데. 뒤로하는 태클이나 끄적임 따위에 일일이 신경 쓰는건 너무 쓸데없는 소모. 매일 혀에 혓바늘이 돋고 혀가 붇는다. 팔다리가 저릿하고 눈이 절로 감겨도 그러나 괜찮고 그러나 행복하다. 그러니 더 힘내자 9일만」

 

원자현의 미니 홈피에 올려진 글

 

8월 4일에 원자현의 미니홈피에 적힌 글이다. 글쎄다, 만일 입장을 바꾸어 내 사랑하는 가족이 혹은 자녀가 이런 세상의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면 어떨까? 물론 검색을 하는 도중 원자현이란 사람이 가끔은 논란꺼리가 될 만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인터넷이란 매체로 인해 과거까지 속속들이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전혀 무관한 지난 일까지 끄집어내어 공격을 한다면, 도대체 누가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원자현이란 사람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니다. 그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검증을 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원자현은 방송에 나와 소식을 전하고 프로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리가 보이는 의상을 갖고 말을 만들 것인지. 그냥 관심으로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은 원자현의 트위터 및 미니홈피에 올려진 것을 인용하였음)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