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현재 남아있는 가옥의 안채는 조선 정조 7년인 178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사랑채는 그보다 늦은 고종 14년인 1877년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정광보가 마을에 들어온 시기인 1400년대 후반으로 본다.

 

8월 8일 돌아본 동래정씨 종택. 현재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작은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으로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 순으로 되어 있어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사랑채와 작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온기가 느껴지는 집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집이 생기가 도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대개 사람이 실고 있는 집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집이 좋아도 무엇인가 부족한 듯하다. 군포 동래정씨 종택은 집안을 여기저기 손을 보았지만 외형적으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다.

 

예전에는 사랑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바깥담장은 장 정리가 되어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연못에 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 실한 연꽃만 보아도 이 종택은 간수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용도를 변경해, 중앙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사무실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으로 대문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후에 5칸을 더 지어 안채의 폐쇄성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문은 보아지 않고 바로 사랑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과 작은사랑을 둔 종택

 

안채 앞으로 지은 사랑은 큰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분을 하였다.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큰 사랑은 왼쪽부터 방 1칸과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행사청의 순으로 집을 구성했다. 서쪽 맨 끝에는 방의 벽면을 막고 그 앞으로 누정을 한 칸 앞으로 돌출시켜 올렸다. 누정은 삼면이 터지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장초석 위에 네모난 기둥을 올리고 난간을 둘렀다.

 

 

 

큰 사랑채의 기단을 장대석으로 마감을 한 것에 비해, 작은 사랑은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2층으로 기단을 쌓았다. 작은 사랑은 모두 세 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안채에서 바로 사랑으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찍고 열려있는 문으로 안채를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안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새끼라도 해할까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집을 돌아 중문으로 돌아가니 문이 닫혀있다. 귀농본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한잔 찍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ㄱ 자형의 안채에서 느끼는 종택의 위엄

 

안채는 ㄴ 자 형의 중문을 마주하고 ㄱ자로 꺾어지은 팔작지붕이다. 안채를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는 두 칸의 부엌을 조성한 듯한데, 현재는 그곳을 방으로 꾸민 듯하다. 댓돌 앞에 신이 놓여있다. 꺾인 부분에 대청을 놓고 이어 안방을 드렸다. 안방의 끝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도 유리벽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인이 없이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안채를 보면서 종택의 위엄이 서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을 지은 정광보는 파시조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의 큰아들로, 맞은편 산 중턱에 조성된 정난종의 묘를 조성하고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독특한 사랑채의 구성과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자적인 집으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의 살림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다. 고택을 돌아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모든 고택에 사람들이 온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래등 같은 집에 온기가 없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3인 김주송은 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현재 수원 효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주송은, 그렇게 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의 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화성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제는 그렇게 화성의 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자식들은 부모님을 따라 배운다. 주송이의 부친인 김충영은 현재 수원시 환경국장이다. 도시공학박사이기도 한 김충영은 1979년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화성사업소장과 팔달구청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주송은 이런 아버지와 함께 늘 화성을 돌아보았고, 이제는 누구보다 화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성을 바라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화성을 돌아본 김주송은, 전국의 문화유산도 상당히 답사를 하였다. 또한 우리 역사와 관련되는 해외의 문화유산까지도 돌아보았다. 그렇게 휴일만 되면 “주송아 일어나라 화성가자!‘는 아버지의 부름에, 대동여지도를 따라 걷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수원에서 조암까지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주송이는 화성을 늘 가까이 했다. 그동안 화성을 찍은 사진만도 수천 장에 이른단다. 그러나 막상책을 내려고 하니, 마땅한 사진이 없어 다시 화성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그런 주송이는 현재 고3이다. 얼마 안 있으면 수능을 치러야 할 학생이 화성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설마 고3짜리가 책을 써

 

수원의 언론들은 다투어 김주송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책을 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정작 주송이가 바라다본 화성, 그리고 들려주는 화성의 이야기들의 속내의 깊이는 알기가 어렵다. 그 길고 긴 시간 때로는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싫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주송이가 책까지 내기까지에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속내가 있었으리라 본다.

 

주송이는 제1장 ‘성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이미 성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의 기울기는 왜일까?’를 질문으로 던져 놓고 그 해답을 얻어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에서 성돌을 떼어내는 방법인 ‘야질’에 대해서도 설명을 한다. 그리고 성벽이 곧바르지 않고 구불거리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쓴 책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제3장 화성을 다시보다. 제4장 화성 건설 현장 속으로, 제5장 부록 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알 수가 있다.

 

 

고3 다운 발상에 웃다

 

책을 펼쳐보면 놓을 수가 없다. 그만큼 주송이는 이 책에서 우리가 몰랐던 화성의 구석구석을 이야기를 한다. 축성을 한 돌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주송이는 이 대목에서 ‘학생답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꿈 많은 학생이 일궈내는 이야기 하나하나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든다. ‘젊은 꿈’ 만이 느끼고 찾아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벽의 쌓은 돌을 소싸움, 염소싸움에 비유하기도 하고, 조각보 같다고도 표현을 했다, 그저 표현을 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들어 온 부모님들이나 주변의 어르신들의 말씀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주송이의 표현은 재미있다. ‘혀를 날름 내민 메롱 돌’, ‘테트리스 게임 돌’, ‘아리랑 혹은 바람개바 돌’. ‘대장을 감싸고 보호하라’, ‘애기돌도 역할을 하도록 만들자’ 등 그만이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아마 당분간은 이 책으로 인해 화성이 달라 보일 듯하다. 나 역시 화성에 대한 기사를 쓰고는 했지만, 오늘 고 3짜리 김주송에게 한 수 배운다. 앞으로 이 책을 들고 주송이가 찾아낸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보아야겠다.

 

지은이 : 김주송

감 수 : 김충영

발 간 : 2012년 7월 25일 초판발행

가 격 : 10,000원

펴낸곳 : 한라애드플러스

살다가 보면 가끔은 술이 한 잔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긴 요즈음처럼 날 덥고 왕짜증이 나는 날이면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해야 잠을 편케 잘 수가 있지만. 그럴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을 자랑 좀 해야겠다. 내가 가는 술집은 뻔하다. 고급 룸살롱이라는 곳은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질 않았고, 비싼 유흥주점도 나는 별로란 생각이다.

 

하긴 주제도 안 되지만, 그런 곳에 가서 목에 힘주고 목소리를 까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로 생리에 맞질 않는다. 그래서 자주 찾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를 마시거나, 두부김치 한 접시에 만원이면 소주 2병을 해치울 수 있는 곳,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원하게 소주 몇 병을 비우고 나올 수 있는 포장마차 정도이다.

 

'술집포차'의 대표적인 술안주인 '할매돼지볶음'

 

수원의 새 명소 인계동 포장마차 골목

 

수원시 인계동에 자리한 인계종합상가 인근은 요즈음 새로운 명소로 자리를 잡아간다. 한 집씩 늘어나기 시작한 실내포장마차가 어느 새 골목골목마다 자리를 하고 있다. 이 포장마차들은 각기 나름대로 내세우고 있는 음식들이 달라, 가끔 찾아가면 입맛에 맞는 대로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술 한 잔 마시는데 무엇을 그리 까다롭게 구느냐고도 하겠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것저것 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작은 행복이다. 이곳을 가면 찾아가는 집이 있다. 새롭게 문을 연 집이라고 하는데, 주인 부부가 손님들에게 참 친절하다. 나는 이 집을 갈 때마다 ‘정말 짜증나게 친절하다’ 라고 표현을 한다.

 

 

추신수(남, 38세)씨와 정진경(여, 39세)씨가 운영을 하고 있는 ‘술집 포차‘는, 인계동 990-9에 소재한다. 이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안주인이 요리를 해서 내어놓는 ’할매돼지볶음‘ 때문이다. 그저 별 것 아닌 듯한데 묘하게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이 할매돼지볶음 한 접시면, 그저 소주 서 너 병은 거뜬하기 때문이다.

 

3대째 물려받은 요리비법 ‘할매돼지볶음’

 

‘할매돼지볶음’ 이란 명칭은 할머니에게서 전수 받은 요리이기 때문이란다. 안주인 정진경씨는 부산 사람으로 어릴 적 양념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 할머니가 돼지볶음 요리를 해주면 담백한 맛이 있어 좋았는데, 그 요리를 자신들의 주력상품으로 삼자 손님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한 접시 내 오는 요리를 보면 특별하지도 않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은 통마늘을 썰어 넣고, 양파와 당근, 피망, 고추 등이 보인다. 맛을 보면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 듯한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맛이 사람을 사로잡는다.

 

“요리는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어릴 적부터 할머니께서 해주시던 요리를 어머니께서 저에게 알려 주셨어요. 포장마차를 하면서 이 요리를 손님들에게 드렸더니 생각 밖으로 반응들이 좋아, 저희 집의 대표 안주가 되었죠.”

“들어간 것들은 다 알겠는데 특별한 양념을 사용하시나요?”

“그건 비밀인데요. 아마 그걸 말씀드리면 모두 다 따라 하잖아요. 그럼 단골이 많지 않은 우리는 장사 못해요.”

 

담백한 맛이 일품

 

하긴 그렇다. 어느 집이나 자신들이 자랑하는 음식은 꼭 한 가지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괜히 묻고도 머쓱해진다. 조용하던 홀 안이 갑자기 사람들이 몇 테이블 들어왔다.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할매돼지볶음’을 찾는다. 그만큼 이 음식에 대한 마니아들이 생겨난 모양이다. 술을 하고 있는 옆 자리 손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주인이 추천한 안주 '닭똥집볶음'은 12,000원이다. 

 

“할매돼지볶음, 맛이 어때요?”

“담백하니 돼지냄새도 나지 않고 정말 좋습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저로서는 최고입니다”

“옆에 게신 선생님은요?”

“이 집은 주인이 요리를 시킬 때 미리 물어봅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느냐고요. 매운맛을 좋아한다고 하면, 맵게 해주더라고요. 이런 안주라면 언제나 술 마실 수 있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담백하다’라고 한다. 하긴 몇 번을 먹었지만, 먹을 때마다 돼지고기 특유의 향이 나질 않아 좋다. 맛집 탐방을 하라고 했더니, 술집 탐방이냐고 눈을 흘겨도 할 수 없다. 어차피 음식점이나 술집이나 요리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이러다가 나중에 전국에 있는 ‘포장마차 음식특선’이라는 책 한 권 펴내자고 하지 않으려나?

 

(찾아가는 길)

 

주소 :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990-9 '술집포차'

전화 : (031) 235 - 9673

사람이 살면서 한 가지 일에 몰두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버거운 일이라고 해도 아마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9일 오후, 한창 취재를 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발신자가 ‘오마이뉴스’라고 뜬다. 요즈음은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가 채택이 되면, 바로 휴대폰 문자로 연락이 온다. 가끔 전화를 직접 통화할 때는 기사에 대한 정확한 문의 등이 필요할 때이다. 기사를 송고하고 난 후라 그런 상담전화일 것이란 생각을 한다.

 

오마이뉴스 '알립니다'에 공고된 내용입니다


“축하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셨습니다.”

 

“하주성 기자님이시죠. 축하드립니다.”

“예?”

“기사 천개를 쓰신 것은 알고 계시죠. 이번에 명예의 전당 오름상에 올랐습니다. 시상식은 내년 초에 일괄적으로 합니다. 오늘 오마이뉴스 알립니다에 공고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기사 많이 써 주세요.”

“아 ~ 예, 고맙습니다.”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2008년 9월 5일에 첫 기사를 송고를 하고 난 후, 한참이나 기사를 쓰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1년이 지난 200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올 해 7월 14일 경기도의회 최재연 의원과의 인터뷰 기사인, "교육위원장 요구, 자리싸움 아니다"가 1,000번째의 기사로 채택이 되었다.

 

 

 

오마이뉴스 홈페이지를 열어본다. 우측 중간에 ‘알립니다’라는 박스가 보인다.

 

「[공지]7월의 뉴스게릴라 김종길·김종술·최오균, 새뉴스게릴라 권희진·장윤선, 오름상 하주성. 2012년 7월의 뉴스게릴라에 김종길·김종술·최오균 기자가 뽑혔습니다. 새뉴스게릴라에는 권희진·장윤선 기자가 선정됐습니다. 하주성 기자는 잉걸기사 1000개로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에 올랐습니다. 수상한 분들 모두 축하합니다. 아울러 이 달에 활약한 모든 시민기자께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라는 공지가 올라있다. 햇수로 따지면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블로그를 쉬고 있을 때도 끊임없이 답사를 한 것도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지난해에는 오마이뉴스에서 수첩과 명함을 받아 답사를 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만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당당하게 활동을 한 셈이다.

 

특히 오마이뉴스를 기사를 올린다고 해서 모두 채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생나무라고 해서 채택이 되지 않은 기사들이 있다. 그만큼 꼼꼼하게 따져서 기사를 채택한다. 하기에 오마이뉴스의 1,000개의 기사는 의미가 남다르다.

 

 오마이뉴스 <명예의 전당>에 65번 째로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숱하게 돌아다닌 결과였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을 정리해본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참으로 허망한 일도 많이 당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정리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남은 시간, 내 체력이 감당할 때까지는 더 열심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화재는 가치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글을 써도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이 많이 보아주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송고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이다. 적어도 그곳에서 기사를 보는 독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글을 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독자층이 상당히 두텁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기에 같은 글을 오마이뉴스와 다음 뷰에 송고를 한다. 두 배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한 우물만 들입다 파더니 결국 샘이 솟았다’고 지인이 전화를 했다. 그런 전화를 받고나서 마음에 다짐을 한다. 앞으로 힘이 부치는데 까지는 길에서 살아야겠다고.

 

(주) 내용 중 7월의 게릴라 중 '김종길'은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을 하는 티스토리 ‘김천령의 바람흔적’( http://neowind.tistory.com )을 운영하고 있는 김천령님입니다. 아우님 축하하네^^

찜통더위’라는 말이 올 한 해 유행어로 떠올랐다. 10여일이 넘게 40도를 육박하는 무더위는 가히 ‘살인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이런 날은 길이 막혀 더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 바닷가를 찾아가기 보다는 가까운 계곡으로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시원한 숲과 맑은 물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아침에 잠깐 시원한 바람이 불기에, 이제 이 더위도 수그러지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낮이 되자 오히려 기온은 전날을 웃돌고, 길을 걸을 때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날 취재를 나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판이다. 군포시 대야동 반월호수 인근, 수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반월천을 형성한 곳이다.

 

수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이용한 군포시 대야동 반월천 아영장. 뒤편으로 수리산이 보인다.


반월천변에 마련한 야영장, 인기 만점

 

반월호수에서 둔대교를 지나 상류로는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야영장으로 조성을 한 반월천은 천변 한 편 숲이 있는 곳을 차량을 통제하고 야영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8월 8일(수) 오후 찾아간 반월천.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들과 함께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며 담소를 한다.

 

“시원하세요?”

“그럼요, 왜 고생하고 막히는 먼 길 가서 바가지 쓰고 고생들을 하나 몰라요. 여긴 수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깨끗하지만, 그리 차지도 않아서 아이들이 놀기도 좋아요.”

“자주 나오세요?”

“예전에는 그저 사람들이 여기 와서 텐트를 치고 놀고 가고는 했는데, 올 해 부터는 시에서 관리를 잘 해주어 많이 좋아졌어요.”

 

반월천 야영장은 반월천 위편 숲 속에 마련되어 있어, 숲과 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군포시 계룡삼환 아파트에 산다는 이아무개(여, 45세)는 아이들과 함께 자주 찾는다고 한다. 멀리가지 않고도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굳이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 수심이 낮다보니 아이들이 들어가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물놀이를 해도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군포시에서 시범운영 중

 

이곳 반월천은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쉬고는 했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정리를 해 놓은 개울가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함부로 쓰레기들을 버리고 가 주변을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도 여름철이 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어지르고 가는 것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

 

 

 

군포시에서는 올 해 들어 이곳에 야영장을 시범운영하기로 하고, 대야동주민자치위원회와 관리운영 용역계약을 맺었다. 7~8월 45일간 시범운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8월 26일까지 야영장을 운영해보고 난 뒤, 그 자료를 평가분석을 하겠다는 것.

 

군포시 청소년교육체육과 청소년정책팀 임현주 팀장은

 

“그동안 반월천은 매년 많은 분들이 찾아와 피서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개울가에 너무 많은 음식쓰레기들이 쌓여있어, 그런 것들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불편을 겪기도 했고요. 올 해 시에서 야영장을 정리하고 대야동주민자치위원회에 운영 용역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올 한 해 45일간 운영을 해보고, 그것을 평가 분석하여 앞으로의 운영에 반영하려고 합니다.” 라고 하다.

 

 

음식의 조리는 개울가에서는 못하지만,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장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각 밑에는 텐트를 칠 수 없는 곳이지만 햇볕을 피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어, 수시로 지도계몽을 한다는 것.

 

군포시민은 물론, 인근 타 시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부담 없이 즐기고 갈 수 있는 곳. 수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분들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반월천의 여름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만들어 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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