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사에는 문수보살을 모신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협시보살로 최고의 지혜를 갖고 잇는 보살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이라고 하여, 문수보살을 대지(大智)보살이라고도 한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문수사는 우리나라의 많은 절 중 오대산 상원사, 춘천 청평사, 삼각산과 김포의 문수암, 울산 문주사 등과 함께 문수보살을 모신 절 중 한 곳이다.

 


 


  
익산 문수사의 극락전은 1994년에 새로 지었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이후의 연혁은 알 수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 중건한 바 있다. 그 후 몇 차례 중건한 문수사는 백운암과 백련암의 부속 암자를 두고 있다. 천호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관세음보살 등 3대 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문수사는 문수보살, 백운암은 보현보살, 백련암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산신각은
  
1994년까지만 해도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나무의 단풍. 매년 이렇게 아름답게 물이 든다고 한다


  
아름답게 그려진 단청이 눈길을 끈다

 

가을 날 찾은 문수사는 비구니 절들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대웅전이 극락전 앞에 선 나무는 반홍반황(半紅半黃)의 색을 띠고 있어 아름답다. 극락전 뒤에 선 삼성각은 1994년까지는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1994년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이 정리가 되어 있는 절. 장독대는 얼마나 닦아댔는지 윤이 반지르르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을이 깊었음을 알린다. 요사 뒤에 있는 모과나무에는 튼실한 모과들이 달렸다. 그저 밑에만 가 있어도 모과냄새가 코를 간질일 듯하다.


  
문수사 요사 뒤에 모과나무에는 모과들이 참 많이도 달렸다


  
깨끗히 정리된 장독이 윤이 난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고 하는 문수사. 현재는 김제 금산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 문수사의 가을은 또 하나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어디를 가나 아름다움이 한 가지씩은 있다는 절집들. 문수사의 가을은 극락전 앞에 선 아름답게 물든 단풍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e수원뉴스 시민기자와 담당자 등 30여명이 떠난 ‘시민기자 워크숍’.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니, 꽤 많은 양의 사진을 찍었다. 700여장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 안에 꽤 그럴 듯한 풍경이거나, 아니면 시민기자들이 놓친 곳들도 있어, 내 나름대로 10경을 정해본다.

 

사실 이렇게 워크숍을 떠나, 2박 3일을 돌면 나는 나름대로 녹초가 된다. 쉴 새 없이 찾아다니고, 사진을 찍어대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딴 분들은 몰라도 이미 20년이 넘게 우리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헤맨 나이기 때문이다. 장서에는 3,000여장의 CD에,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을 퐐영한 자료들로 차 있다.

 

 

 

먼저 걷고 돌아본 이번 워크숍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단체가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만큼 더 열심을 내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혼자 미친 듯 돌아다닌 답사 길에 미안함이 조금 가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설사의 설명 중에는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 모르고 있던 부분도 있다. 이참에 꼭 한마디 할 만은 해설사들이 너무 오래 사람들을 붙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많이 보아야 할 사람들이다. 시민기자들도 기자이다. 기본적인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는 분들을, 생 초보 다루듯 해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가?

 

사실 난 어디를 기거나 해설사들의 설명은 일체 거절하는 편이다. 문화재 기사를 20년 넘게 써 온 사람으로서, 그 해설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 느낌을 글로 쓰는 나에게는 사실 해설을 듣는다는 것 자체도 부담이 된다. 이번 워크숍에서도 먼저 뛰고, 하나라도 더 취재해야 하는 나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사비를 드려 통영을 가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정한 워크숍에서 만난 풍광 10경

 

이번 2박 3일간의 워크숍 기간 중 해설사의 안내로 돌아본 시민기자들이 놓친 부분도 있을 테고, 함께 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10경을 선정해보았다. 제일먼저 전주 한옥마을의 지붕이다. 해설사가 안내하는 길로 따라갔다면, 이목대를 오르는 길에 있는 포토죤을 만날 수가 없다. 지붕과 지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한옥마을의 지붕은, 사진을 찍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입구 건너편, 명정동 194번지에 자리한 ‘정당샘’이다. 이 샘은 1670년 제51대 통제사인 김경이 팠다고 전해진다. 충렬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이 샘은 처음에는 하나를 팠는데 물이 탁해, 또 하나를 곁에 팠더니 믈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샘 이름은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고 붙이고, 일정은 충무공 향사에 사용하고, 월정은 주민들이 사용했다. 이 두 물을 합하여 ‘명정’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곁으로 시체나 상여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여, 지금도 이 우물곁으로는 상여가 지나지 못한다. 햇볕을 받지 않으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는 명정은, 우물을 보호하는 지붕을 덮지 않고 있다. 한번은 그 위에 팔각정을 지었더니, 마음에 돌림병이 돌았기 때문이란다.

 

두 번째는 사적 제402호인 통제영지 내에 있는 국보 세병관 동편 문밖에 서 있는 비석군이다. 통제영지는 통영시 문화동 602번지 일원에 있는 삼도수군 통제영의 본영이다. 당시에는 100여 동의 전각들로 차 있었다고 하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현재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장원홍예문,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통제영지를 복원 및 보수를 하느라 부산하다. 세병관 동편 작은문을 나서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비석군들. 출입을 시키지 않아 일일이 확인을 할 수가 없지만,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 등이 아닐까 한다. 그 밑으로는 전각 안에 비가 하나 서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12호인 ‘두룡포 기사비’이다.

 

이 기사비는 통제사를 지낸 이경준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 사적비로, 조선조 인조 3년인 1625년에 제16대 통제사인 구인후가 세웠다. 이경준은 제5대와 9대 두 차례 통제사를 지냈으며,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무장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동피랑벽화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영항의 안편 강구안에 정박한 거북선과, 그 거북선이 있는 강구안의 저녁노을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돌아본 전주와 통영에서 만난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충무공 유적을 돌아보다

 

세째 날인 14일, 통영유람산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사적 제113호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한 이곳은 선조 25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에서 왜선을 섬멸한 후, 선조 26년부터 30년인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두억포에는 임진왜란 때 전함인 판옥선과 척후선 등 1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740여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들어서면 해안가로 길게 제승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 바닷길에 서서 물을 바라보면 물속 바위에 하얗게 달라붙은 조개껍질이 보인다. 이 또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 제승당 곁에 서 있는 수루에 올라가면 한산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만으로, 이곳은 안쪽은 넓고 입구가 좁다. 이 한산만은 수심이 낮아 소형선박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과 낮은 수심, 여기저기 만과 포구들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한산대첩의 승리를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아홉 번째는 제승당 안에 있는 적송들이다. 적송은 우리의 소나무로 나무가 단단하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소나무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목재감이다. 이러한 적송이 유적지 안에 숲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의 아름다움 또한 멋지지 아니한가? 유적지 관람 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 뒤편에는 갈매기들이 따라붙었다.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기 위해 따라오는 갈매기 떼.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물길과 허공을 비상하여 과자를 따라 물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갈매기들. 그렇게 전주와 통영의 워크숍에서 만난 광경들은, 앞으로도 한참이나 기억될 것만 같다.

 

제2회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거북시장은 수원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전통시장 중 한 곳이다. 예전 거북시장 인근에는 영화역과 객사가 있었다. 이곳은 장영외영 군사들이 묵는 곳이었고, 더구나 정조의 능행차 때도 이곳 영화역 앞을 지났다. 또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장안문을 벗어나 이곳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다.

 

이 시장 일대는 영화역에 있는 말들을 키우는 마방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상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 중 한곳이었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땅 주인의 별명으로 지어진 이름 거북시장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 평 규모에 말을 키웠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들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거북시장은 수원의 재래시장 중에서도 그 넓이로 친다면 1~2위 안에 들어갈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곳에 집단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여러 길과 골목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은

 

“이곳의 시장 이름이 예전에는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거북시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30~40년 정도인데, 이곳 일대의 땅이 모두 한 사람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별명이 ‘거북이’였는데, 시장 이름을 그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이죠” 라고 한다.

 

 

 

밤늦은 음식문화제 현장을 돌아보다.

 

원래 제2회 거북시장 음식문화제는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열렸다. 지역의 상인들이 시장 중심의 도로 양편에 부스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축제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음식을 팔았다. 하필이면 행사 날과 e-수원뉴스 시민가자들의 전주, 충무를 돌아보는 워크숍 일정이 같아, 할 수 없이 막판에 시장을 찾을 수밖에.

 

전주와 충무를 거쳐 수원에 도착한 시간이 14일 오후 6시 30분경. 시민기자들과 헤어져 거북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중심가에 도로는 사람들로 들어차 있고,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인해 그야말로 거북시장 일대가 온통 시끌벅적하다. 거기다가 시간이 배가 고파오는 때라, 음식냄새로 인해 시장 끼가 더 돈다.

 

행사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자리에 앉았다. 이런 좋은 곳에 와서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그도 실례라는 생각에서이다. 축제는 함께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적된 피로와 속이 허한데, 술을 한 잔 마시면 탈이라도 날 것 같아 따끈한 국물이 있는 홍합탕과 안주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 본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느끼는가 보다. 가끔 이렇게 지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술을 한 잔씩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소중하단 생각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아는 분들이 들려 인사를 하고는 한다.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게 거북시장의 음식한마당은 밤이 깊어가는 데도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3일 동안 장사를 했다는 상인회의 한 분은

 

“정말 피곤합니다. 새벽부터 준비를 해서 밤 10시가 넘도록 서서 손님들을 맞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3일씩이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노동입니까?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좋기는 하지만, 내 년 부터는 이틀 정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기도.

 

파장동에서 왔다는 어느 여성은

 

“이렇게 시장 길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죠. 물론 준비를 하는 집행부나 음식을 파시는 분들은 힘이 드시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싼 가격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이런 행사가 여기저기 많이 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수원 영화동에 조성 된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그 축제에서 점점 깊어가는 10월의 밤을 즐긴다. 그래서 축제는 계속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가 보다.

구불구불 돌아서 바쁜 숨을 헐떡이며 오른 적상산(1,034m). 덕유산 국립공원 내 소백산맥에 있는 적상산은, 한국 백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상산(裳山) 혹은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불리는 적상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을이 되면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고 하여 적상산이라고 했다는 이 산 정상 밑에 적상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10월 중순 답사일정의 끝 날에 찾아간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곽 안편의 높이는 현재는 1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사적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용해 축성을 한 산성은 보기에도 천연의 요새다. 성곽의 높이는 현재는 1m~1m 50c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험한 지세로 인해 성의 구실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총 길이 8,143m에 이르는 적상산성은 본래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문에는 2층으로 된 문루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안국사 주차장 밑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어, 이곳 산성 안에 사고를 짓고 사고를 지키는 승군을 모집하던 호국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다.

  
가울이 되면 온통 붉은 치마를 펼친듯 하다는 적상산. 성곽 주변도 온통 붉은색으로 닾였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당하다고 하여,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곳에 산성을 축성할 것을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 산성의 형태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 후 이 산성의 중요성을 느껴 증축하기를 건의했을 것이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의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을 정도로 난공불락이다

  
낙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적상산성

 

산성을 따라 거닐어본다. 저 밑에 가물거리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그 위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이곳을 적이 기어오르기란 수월하지가 않을 것 같다. 설령 이곳을 오른다고 해도 성벽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면, 오르기도 전에 다 돌에 묻힐 것만 같은 형국이다. 축성을 한 돌은 이리저리 모서리가 날카롭다. 그런 자연스런 돌들을 다듬지도 않고 쌓아올렸다. 성곽 주변은 온통 붉다. 성벽에 난 작은 배수구에도 붉은 단풍이 쌓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적상산성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저 밑에 가물거리는 마을이 있다. 저곳에서 적들이 기어오를 수가 있었을까?

  
성에 나있는 배수구에도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였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오랜 세월 이 산을 지키고 있었을 적상산성. 가을이 깊어 그 마지막 불을 태우고 있을 때 찾아간 산성이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국사를 찾아든다. 적상산 정상을 밟아보기 위해서다. 산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이 높지 않은 성곽이 얼마나 자연과 동화가 되어 있는지를 깨닫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축성. 우리 선조들의 자연과 하나 됨이 참으로 놀랍다. 늦가을, 붉은 칠을 한 적상산성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었다. 

해동은 대한국이요 경기도는 삼십칠관 마련하여

광화는 일품이요 광주는 이품

수원은 정삼품이요 안산은 군수수령 내명은 부사또라

 

10월 8일 오후 7시, 오산시 마등산 자락에 자리한 역말굿당 한 편에서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장단을 치면서 부정무가를 부르고 있다. 경기도당굿 중, 굿을 시작하기 전에 거리부정에서 부르는 무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 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굿이다. 도당굿은 매년 또는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 초나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현재의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나,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일씩 거행이 되던 경기도당굿

 

대개 마을의 도당굿은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에 끝이 난다.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부지역에서는 3일간이나 굿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굿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당굿을 영위하는 무격들은 집안으로 대를 이어 기능을 연마하고, 음악과 무용에 뛰어난 세습무들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남자무당으로, 줄을 타면서 재담을 늘어놓거나 재주를 보이면서 굿을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예전에는 도당굿판에는 기생들의 소리와 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기, 예능적으로 뛰어난 도당굿의 제차

 

경기도당굿은 굿을 하기 전날 당주 집에서 벌이는 ‘당주굿’으로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을 친다. 요즈음에는 대개 강신무인 여무들이 주로 굿을 하기 때문에, 거리부정도 여무들이 많이 맡아서 하는 편이다.

 

굿당에 도착하면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를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을 벌일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가리 앞으로 가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되돌아오는 ‘도당모시기’,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굿당에서 군웅마나님께 대취타연주를 올리는 ‘장문잡기’ 등으로 순서가 진행이 된다.

 

그런 다음으로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알아보는 ‘시루말’을 한다. 시루말은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 가로 확인한다. 이어서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과 도당조상, 본향조상을 모셔서 집안의 평안과 자손번창을 축원하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경기도당굿에서만 볼 수 있는 화랭이와 무녀가 함께 군웅상을 마주하고 진행하는 쌍군웅춤인 ‘군웅굿’, 날이 밝아 도당신을 도당으로 다시 좌정시키고 돌아오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화랭이가 놀며 동네축원과 영산수비를 풀어주는 ‘중굿’,에 이어, 굿판에 따라든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은 끝난다.

 

 

 

 

오산은 경기도당굿의 남다른 지역

 

경기도당굿은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산과 경기도당굿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것은 오산 부산리(현 부산동)에 재인청 3대 대도방의 가문인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대를 이어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오산 부산동에는 도당굿을 펼치던 당집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용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마등산 역말 굿당이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경기도당굿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여, 57세)은

 

“그동안 경기도당굿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굿거리 제차임에도 불구하고, 전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까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당굿을 전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죠. 3년 전부터 1기생 17명을 데리고 시작한 도당굿의 전수가, 올해로 3기생을 맞았습니다.”

 

 

 

 

일일이 소리를 하고 장단을 치는 법 등을 알려주는 승경숙은, 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에게서 춤과 소리를, 전수조교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방돌근 선생에게서는 장단 등을 학습했다.

 

“오산은 도당굿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란 생각입니다. 3대 째 재인청의 도대방들이 직접 도당굿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제가 배운 그대로 많은 전수자들에게 전승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도당굿이 옛 모습대로 활성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죠.”

 

열심을 내어 도당굿의 소리와 춤을 배우고 있는 전수생들. 언젠가는 저들이 도당굿의 굿판에 서서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당굿 제차를 해낼 것이다. 그래서 오산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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