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표교리에서 서이천 IC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우측에 약수터 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나온다. 조금 지나면 U턴을 할 수 있고, 내려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에 <보물 제982호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이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논이 나오는데, 이들을 '넘어새말들'이라고 한다. 길 좌측에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미륵바우'라고 부른다. 화강암의 재질에 조형된 이 마애불은 도드람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좌상은 이 바위에 옅은 부조로 새긴 3.2m의 보살좌상이다.   

 


자연석을 최대한 이용한 걸작

 

넓적한 화강암에 새긴 이 보살상은 고려 경종 6년인 980년에 조성이 되었다. 마애불에 조성 연대가 새겨진 것은 흔치가 않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바위 뒷면에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조성연대가 밝혀졌다. 그런데 이 마애보살상을 보면 얼굴의 부분이 돋을새김을 하였다. 턱 부분이 돋아있고. 남은 부분은 굵게 선각처리를 하였다. 오른발은 밑으로 내려 앙련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상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중앙에 화불을 새겨넣었다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발은 밑으로 내려 앙련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상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 발을 올린 부분을 보면 이곳 역시 턱이 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턱을 그대로 이용해 반가자세를 취한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저 턱도 돌이 돌출된 부분을 다듬어 이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강암을 절단한다고 하여도 지금처럼 칼로 무를 베듯 그렇게 절단할 수가 없었던 지난 시절, 그 돌의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조성한 당시의 석공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보관 위에 구멍은 무엇일까?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전체적으로 조형이 잘 맞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런데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이 구멍은 도대체 언제 뚫은 것이며, 무슨 용도로 사용된 것일까?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굵은 나무젓가락이 들어갈 만한 크기다. 그렇다면 이것은 처음부터 뚫려 있었고, 아마 이곳에 쇠막대 등을 집어넣은 후 그곳에 보관의 장식을 하였을 것 같다. 즉 보관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기 위해, 막대에 구슬 등을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 이곳 장암리의 옛 지명 이름이 '장수왕리'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명과 관계되는 것도 연구할 만하다. 

 

  
보관 양편 끝에 두 개의 구멍은 무엇일까? 아마 그 곳에 쇠막대 등을 끼워 장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측면에서 보면 얼굴의 턱 부분이 돋을새김으로 조성하였고, 다리부분도 돌출이 되어있다.

 

마애불 앞에 놓인 돌의 용도는

 

마애불 앞에는 커다란 돌이 두 개 놓여 있다. 그 중 하나는 네모난 구멍이 나있다. 이 돌들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마을주민의 이야기로는 처음부터 그 근처에 굴러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각에 사용한 돌은 아닐까? 혹은 마애불의 앞에 석등의 받침돌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어디에도 이 돌들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중앙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석등보다는 마애불이 전각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마애불의 앞에 있는 두개의 사각형 돌의 용도는 무엇일까? 전각을 지었던 돌이나 석등의 받침돌 등으로 보인다.

 

보물이라고 해도 보호각이나 주변에 특별한 설치물이 없이, 길 가에 놓여있는 마애보살좌상. 바위 뒷면에 새겨져 있다는 명문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기가 힘들다. 아주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어, 그동안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보관 위 양편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 자꾸만 눈이 간다. 명문으로 인해 조성연대가 밝혀진 보물 제982호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그 앞에서 마음 속에 서원을 빌어본다. 제발 보통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이런 전시는 세계 최초일 듯합니다. 한, 중, 일 3국의 대목장들이 우리 화성박물관에 모입니다. 세 사람 모두 각국을 대표하는 대목장으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수천 년 동안 이어 온 대목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전시기간 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응수 대목장과 함께 화성을 돌아보면서 실제 건축도구 시연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10월 24부터 2013년 1월 30일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소재 수원화성박물관에서,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大木匠의 세계’ 라는 제목으로 기획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이달호 관장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이번에 참가를 하는 3국을 대표하는 대목장들은 이번에 한국의 신응수(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와 중국 이영혁(자금성 고건수선중심 주임), 일본 오가와 미츠오(이카루카공사 대표)로 명실공이 3국을 대표하는 대목장들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대목장들의 작품 100여점이 전시된다고 하니, 벌써부터 3국의 대목장들의 기능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크다.

 

동아시아 목조건축 초유의 일

 

이번 기획전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동아시아 목조건축의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번 전시는 3국의 대목장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와 학술발표회를 통해, 서로의 건축세계를 비교하고 논의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실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아시아 목조건축물인 한국의 창덕궁과 수원화성, 중국의 자금성, 일본의 법륭사 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목조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건축물들이 누구에 의해 설계되고 시공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는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번에 3국의 대목장전에 참가를 하는 세 사람은 모두 자국에서 인정을 하는 대목장이라는점이다. 한국의 대목장 신응수는 한말 궁궐건축 기문(技門)의 계승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궁목수이며 수원 화성의 장안문 복원의 대목장이기도 하다. 중국의 이영혁은 자금성 수리보수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궁목수이며, 일본의 오가와 미츠오는 법륭사의 마지막 궁목수 니시오카의 계승자로 일본을 대표하는 궁목수이다.

 

6부로 나뉜 전시장, 꼼꼼히 살펴보아야

 

이번 전시는 모두 6부로 나눠진다. 그 6부의 내용은 각각 대목장의 위상, 대목장의 교육과정, 한중일 대목장의 역사, 한중일 대목장의 건축세계,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대목장, 목수의 방 등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부 : ‘목조건축의 총책임자 대목장’이라는 주제로 건축물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총괄 지휘하는 대목장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 코너에는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가, 김홍도의 「기와이기」를 재해석한 작품이 같이 전시된다.

 

2부 : ‘대목장의 교육과정’ 코너로, 한 사람의 목수가 설계능력을 갖춘 대목장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실제 건축도구의 사용법을 연출하여 실감나게 전시되어 있다.

 

3부 : ‘한중일 대목장의 역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청대·에도시대 대목장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다. 조선시대 영건의궤와 영건일기를 통해 기록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4부 : ‘한중일 대목장의 건축세계’로 한국의 신응수, 중국의 이영혁, 일본의 오가와 미츠오의 자료를 건축모형, 건축도구, 생애자료, 주요건축물, 저서 등으로 구분하여 전시한다. 전통건축업에 종사하는 목수들이 가장 기대하는 코너로 한국의 경복궁 근정전, 중국의 자금성 태화전, 일본의 법륭사의 건축양식을 모형을 통해 비교할 수 있다. 특히 국내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구인사 공포가 실물크기로 전시되어 대목장의 힘을 느낄 수 있다.

 

5부 :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대목장’이다. 1796년 축성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성을 수리했던 대목장의 계보를 밝히고, 장인을 귀하게 여긴 정조의 뜻을 되새기는 코너이다.

 

6부 : ‘목수의 방’이다. ‘목수의 방’을 들어선 순간 은은한 소나무 향과 아련한 대패소리에 잠시나마 힐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목수가 사용했던 다양한 건축도구와 목재가 전시되어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국내 유일의 자료인 『조선경국전』이다. 태조 3년인 1394년 음력 3월에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을 정리하여 지어 바친 『조선경국전』에는, 조선 초기 대목장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국제전시의 위상을 고려하여, 그동안 박물관에서 비장해오던 것을 처음으로 공개 전시한다고 밝혔다.

이 식당 알고 보니, 사연 있었네.

 

통영답사 이튿날인 10월 13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갔던 멍게비빔밥 전문식당인 ‘나폴리식당. 통영시 도남동 224-4번지에 소재한 이 식당은 통영 관광케이블카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통영에 가서 멍게비빔밥을 먹지 않으면, 통영을 반만 본 것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집이라고 한다.

 

2박 3일의 통영 여행은 나에게는 남다른 여행이다. 2박 3일 동안 가급적이면 통영을 하나라도 더 담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기 때문이다. 이날도 예외는 아닌 것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와 산으로 올랐다. 식당 앞에 있는 조선소를 찍기 위해서였는데, 숲이 우거져 결국엔 일부밖에는 찍을 수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지어진 집

 

세상사는 것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저 통영의 한 편에 자리한 멍게비빔밥으로 소문이 나 있는 집이려니 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벽에 글귀가 하나 보인다. 이 집에 대한 역사를 적고 있다. 그 내용을 보니, 이 집이 역사 속에서 아픈 기억 하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폴리식당은 1969년에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월남에 군인들을 파병시킨 정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음식으로 장병들의 보급품을 보냈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 앞에 수산물이 풍부한 통영에 통조림공장을 지었다고 한다. 그 통조림 공장이 현재 식당 앞 바닷가에 자리한 조선소이다.

 

 

당시 조선소 자리에는 <대한종합식품>이라는 통조림 공장을 차린 후에,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공들을 위한 기숙사를 지었는데 그 집이 바로 현재 나폴리식당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사정권 시절이라 군인들이 이 기숙사로 사용한 집을 지었으며, 준공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을 하여 치사를 했다고.

 

슬픈 로맨스가 전하는 여공 기숙사

 

당시 이 기숙사에는 대한종합식품에 다니는 여공들 250여명이 묵고 있었는데, 젊은 처녀들이 묵다보니 인근 남자들의 기숙사에 묵는 남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젊은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서로 만나다가 보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연애사건을 비롯한 각종 사건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이다.

 

 

남녀 사이에 자주 만나다가 보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여공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자진 퇴사를 하는 반 강제적인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 남녀가 서로 좋아하다가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을 갖고 강제 퇴사를 시켰다니, 먹고 살기 힘든 당시에 직장을 잃은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아픔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 이 건물은 슬픈 로맨스의 현장일 수 밖에 없었을 듯하다.

 

그런 각종 사고로 인해 이 여공기숙사의 사감은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바뀌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구나 인근에 자리한 충무관광호텔에는 대통령 전용실이 있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이곳의 간섭이 심했을 것이란 것이다.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통영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어르신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 중에서도 바닷가나 강가의 마을에 가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다. 한창 때는 돈이 주체를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들이다. 충남 논산 강경은 한창 번성할 때는 인구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금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기 때문에 장이 번성한 곳이다.

 

고깃배와 소금배가 이곳에 배를 대고 짐을 풀었기 때문에, 강경포구에는 색주가가 100집이 넘었다고 한다. 조기철이 되면 서해안 연평도 인근에서 잡은 고기를 강경포구에서 내리게 되는데, 지나가는 개들마다 생선 한 마리씩 물고 다녔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곳 통영도 해산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니, 당연히 이런 이야기 하나 쯤은 전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통조림 공장 등이 들어선 통영은, 월남 특수로 인해 돈이 넘쳐났다는 것. 그래서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재미있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 집은 월남전이 끝난 다음에 보수를 해 1층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2층과 3층은 통영 게스트하우스로 변모를 했다. 옛 추억 때문인지 3층은 여성전용이라는 것이다.

 

통영의 맛집이라는 나폴리식당. 우연히 벽에 붙은 글 하나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생각나게 만든다. 그래서 답사는 늘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고, 그 재미에 길 위를 걷게 되는 것이지만.

검은 벽돌로 성에서 돌출시켜 쌓아올린 포루.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3층으로 지은 구조물이다. 포루는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이런 설명만 갖고는 포루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를 쏘는 포루가 있는데, 관리를 위해서 모두 잠가놓았다. 하기에 포루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포루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포루의 형태는 같게 생겼지만, 크기는 조금 다르다.

 

 

 포루는 성안에서는 맨 위에 전각만 들어나지만, 성 밖에서 보면 3층으로 된 구조물이다.


 

3층으로 된 포루, 위용이 대단해

 

화성의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다. 맨 위에 총안을 낸 문은 판문(板門)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포루의 책임자가 있어, 적을 향해 공격을 지시하게 된다. 포루는 성 안에서 보면 맞배지붕이지만, 성 밖에서 보면 팔작지붕으로 그 형태가 다르다. 성 밖에서 보면 3층의 구조로 되어있지만, 성 안에서 보면 맨 위의 전각만 들어난다. 이 포루 안에는 몇 명의 군사들이 들어가 있었을까?

 

화성박물관 이달호 관장은 포루의 병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포루 안에 병사들이 몇 명이나 들어가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규모 등으로 볼 때, 한 층에 대략 5~6명 정도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2층 상설 전시관에는, 화성문화실에 포루의 한 면을 절개한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포루 안의 생김새와 그 안에 병사들의 모습이 모형이로 만들어져 있어, 포루의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과거 성벽 위에 있는 여장의 한 타에 5~6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을 보면, 아마도 포루의 한 층에 그 정도 인원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모형을 보면 맨 위층인 전각에는 포루 안에서의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과 총수들이 있고, 1층과 2층에는 불랑기를 가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임진왜란 전부터 사용한 불랑기자포

 

홍이포, 신기전, 녹로 로 등과 함께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861-1호는 육군박물관에 3점이 있으며, 861-2호는 서울역사박물관에 1점이 지정이 되어있다.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로는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 화포이다. 불랑기는 15세기 포루투칼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졌었으나, 이미 그 이전인 명종 때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불랑기자포에는, 자포 포신 표면 우측에 <가정계해 지통중칠십오근팔냥 장김석년(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포가 1563년에 제작되었으며 중량이 75근 8냥이고 장인 김석년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랑기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화성과 포루. 아마 당시 이들의 화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한 포루를 돌아보면서 과거 ‘정조의 꿈’이라는 화성이 더욱 달라져 보인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난 포루 하나로만도 가슴이 벅찬 이유이다. 역사 속의 산물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게 세월이 지나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

 

토요일 오후라서 인가 양평으로 올라가는 도로에 차들이 많다.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를 찾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아무래도 한 번 길을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길을 나서면 몇 군데를 돌아오고는 한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는 늘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다. 고택을 돌아보다가 보면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향교나 서원 등은 거의가 문을 걸어놓는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 '오늘은 제발 문이 활짝 열려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창대리 고가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굳게 닫혀버린 문, 주위만 겉돌아

 

오늘도 역시 그 불안이 적중했다. 여주 대신면을 지나 양평군 개군면을 거쳐 양평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들어가는 창대리. 창대3리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고가가 보인다. 앞에는 철탑에 '정각사'라는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 정도가 된 집이다. 경기도의 전형적인 농촌 중류가옥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가이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자물통이 걸려있다.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들어갈 만한 곳이 없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일각대문도 안으로 걸려있다. 밖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인기척이 없다. 대문간 앞에 두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만 요란한 채.

 

  
▲ 고가 대문 창대리 고가 대문. 자물통이 걸려있다. 대문롸 일각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쪽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ㅁ 자형의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농촌가옥

 

현재 정각사라는 절로 변한 창대리 고가는 ㅁ 자형으로 된 전형적인 경기도 중류 농촌가옥이다. 대문을 중앙에 두고 좌측으로는 사랑채가 앉아있고, 우측으로는 행랑채와 광채가 ㄱ 자로 꺾여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일각문으로 연결이 되었으며 이 또한 ㄱ 자로 배열이 되어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채의 정면을 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 안채와 광채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 뒷마당으로 드나들 수가 있다. 창대리 고가는 최근에 보수를 한 듯 밑 마당 한편에는 낡은 목재가 쌓여있다.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사랑채

 

사랑채는 안채의 남쪽에 밖을 향하고 자리를 잡았다.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보편적인 형태로 지어졌으며, 잘 다듬은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았다. 대문에 붙은 행랑채보다 앞으로 돌출이 된 사랑채. 그저 평범한 듯한 이 사랑채는 앞마루에 앉으면 조금 떨어진 우측 능선 위에 있는, 수령 500년이 지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아마 흐드러지게 은행 알이 달린 그 나무의 가을은 상상만 하여도 장관일 듯 하다.

 

  
▲ 사랑채 앞에는 마루를 깔고 좌측에는 마루방으로 꾸몄다. 우측에는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대문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다리꼴의 주추를 놓았다

  
▲ 대문과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고택을 답사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추위를 막기 위해 문에 쳐놓은 비닐이다. 어디를 가나 겨울만 되면 이런 형태로 겨울을 날 채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고택의 모습을 흉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니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꽉 막힌 창대리 고가. 나름대로 여기저기 촬영을 한다. 이렇게 잠긴 고택을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하나가, 조그마한 틈만 보여도 그 안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버릇이다. 때로는 바닥에 엎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산위로 올라가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내친 걸음이니 어떻게 하랴. 일각문 위로 까치발을 하고 올라서 행랑채를 들여다 볼 수밖에.

 

  
▲ 행랑 일각문 안으로 본 행랑채. 마루방과 방이 있고 이어지는 광채는 부엌과 헛간, 곳간 등이 있다

     

사랑채와 대문으로 이어지는 행랑채는 대문 곁에 마루방을 들였다. 그리고 ㄱ 자로 꺾이는 부분에는 방을 들이고, 부엌과 광, 곳간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문을 안으로 들여다보니 안을 벽을 막아 바람이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바람벽을 쳤다. 사랑채의 뒤는 그저 평범한 한옥과 같이 처리가 되었다.

 

집 뒤쪽으로 추리를 해보는 안채

 

몇 번이고 집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채를 볼 수가 없어 답답하다. 절이라고 해서 안을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뒤편의 모습으로 안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이런 재미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ㄱ 자형으로 꺾인 안채는 안방이 정남향을 보고 있다. 사랑채와 가지런히 안방과 건넌방, 부엌 2칸이 있다. 안방과 대청마루는 직각으로 꺾여있다. 안방서부터 대청, 건넌방까지는 모두 툇마루로 연결이 되어있다고 하는데 볼 수가 없다. 이런 형태는 딴 가옥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 안채 뒤 방 뒤에는 마루를 놓고 부엌은 두 칸으로 꾸몄다

  
▲ 안마당 담 밖에서 들여다 본 안마당. 좌측이 행랑채와 연결이 된 광채. 우측이 안채다. 안채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넣어 멋을 더하고 있다
 

 

안채가 자리한 뒤로는 뒷마당이 있다. 안채의 방 뒤편에도 마루를 놓아 여유를 부렸다. 뒤로 본 부엌은 한 칸은 부엌으로, 한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부엌으로 사용한 한 칸은 밑에 나무로 만든 창살을 붙여 환기가 되는 것을 도왔다. 담을 돌아보니 마당 안이 보인다. 절이기 때문에 마당 한 가운데 탑이 있다. 안채 건넌방의 박공부분은 기와로 줄을 멋을 부렸다. 농촌 중류가옥이긴 해도 나름대로의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가옥이다.

 

창대리 고가. 결국 안채의 앞모습을 보지 못한 체, 길을 떠나고 말았다. 시간이 허락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찾아가 안채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한다. 조금은 아쉬운 발길이지만 다음 답사지가 있으니, 마냥 머무를 수도 없는 일. 돌려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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