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 복원이 된 남수문. 그 옆에는 끊어진 채, 화성의 연결이 멎은 곳이 있다. 바로 화성 중에서 훼손이 되었던 구간이다. 지금은 예전 남수문에서 팔달문까지 연결이 된 부분에는 상가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상가들이 앉은 자리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화성 겉돌기 그 10번째 구간은 참으로 마음 아픈 구간이다. 팔달문 양편으로 아직도 끊어진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구간이 이어지겠지만, 이 끊어진 구간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화성 겉돌기, 남수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남치까지 돌아본다.

 

 

 

일제는 왜 팔달문 일대를 파괴했을까?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 중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에 찍은 사진에는, 남수문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성곽의 돌출된 치성 위에 축조한 남공심돈이 보인다. 그리고 팔달문 양편에는 적대가 있었다. 적대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성 양편에 있었던 치성위에 축조한 포를 쏘는 구조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남암문도 팔달문 동쪽 약 95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 암문은 후미진 곳에 설치해 비상시에 적의 후미를 공격하는 병사들이 출입을 하거나 식량 등을 나르는 비상문이었다. 암문은 성벽에다 돌로 무지개 문을 설치하였는데, 제도는 정문과 같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고 한다.

 

 

 

 

남암문이 완성된 것이 을묘년인 1795년 2월 23일인데, 화성의 다섯 개의 암문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문의 너비도 다섯 암문 중에서 가장 넓었는데,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암문은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屍柩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여가 통과할 만큼의 너비와 크기를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남암문과 남공심돈, 그리고 팔달문 양편의 적대가 사라진 것이다.

 

언제인가 화성 답사를 할 때, 팔달문 인근에 오래 사셨다는 어르신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팔달문 양편의 성곽 일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동문으로 백두대간과 연결된 광교산의 지기가 흘러들어, 성곽을 타고 팔달문을 거쳐 팔달산으로 지기가 오르면 수원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팔달문 양편의 성곽을 허물어, 수원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한 소리이긴 하지만, 유독 이 곳만 성벽을 허물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끊어진 성곽, 마음이 아파

 

화성은 이 구간만 빼고는 거의 복원을 마쳤다. 올해 남수문을 복원하면서 서남각루 아래서 끊어졌던 성곽이 남수문을 지나 연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달문은 양편 성곽을 잃어버려, 마치 양팔을 잃은 체 외롭게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서편으로도 잘려진 성벽이 미쳐 잇지 못한 체,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끊어진 팔달문과, 사라진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양편의 적대. 그 모든 것이 언제나 제대로 연결이 되어, 완전한 화성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가시지 않은 아픔이다.

 

팔달문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길을 건넌다. 그리고 팔달산 쪽으로 다가선다. 그곳에서 미쳐 연결을 하지 못한 성곽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언제나 저 팔달문과 맞닿을 수 있으려는지. 성벽을 따라 천천히 팔달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남치.

 

 

 

 

그런데 이곳은 여장의 간격이 없다. 모두 연결을 시켜 만든 여장. 왜 유독 이 구간만 이렇게 여장의 사이를 떼지 않고 연결을 한 것일까? 그 여장과 성벽이 연결되는 부분에 꽃이 피어있다. 이곳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는 곳이다. 남치를 둘러보고 팔달산으로 치솟아 오르는 성벽을 바라본다.

 

이곳을 지나 남암문으로 나가는 용도를 따라가면, 화성 겉돌기는 끝이 난다. 성 밖으로 돌면서 살펴 본 화성 겉돌기. 난 이 화성 겉돌기를 하면서 또 다른 화성을 만난다.

10월 10일 오후, 서장대에 올랐다. 늘 돌아보는 화성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화성 때문에 어쩌면 수원을 잊지 못하는가 보다. 서장대에서 화서문을 돌아 돌아오는 길에, 장안동 화서문로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항상 보는 느끼는 것이지만 유난히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은 골목이다.

 

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을 모시고 남을 위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지나는 길이다. 무속에 대한 책을 십여 권을 쓰고, 방송 일을 할 때도 무속에 대한 프로그램만 만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데 딴 집과는 달리 낯선 간판이 하나 보인다. ‘칠성궁 제석당’이란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터라, 무조건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새내기 제자 칠성궁 제석당

 

문 앞에는 ‘새 신제자’란 글이 보인다. 30세쯤 됐을까? 잠깐 소개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속인들은 신을 모신 곳을 ‘전안’이라고 한다. 그 신당부터가 딴 집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울긋불긋한 무신도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갈하니 글로 써서 신령들을 모셨다. 그 앞으로는 산신, 용왕, 대신할머니의 상이 좌정하고 있다.

 

붉은 색을 띤 조명도 없다. 대신 신상 앞으로는 축원카드가 나란히 놓여있다. 아마도 축원중인 신도들인 모양이다. 한편에 놓인 점상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든지, 책상 위에 종이와 연필 등이 놓여있다. 수원시 장안구 315-2, 3층에 마련된 황인애(가명, 여, 30세)를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전안을 차려놓은 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단다.

 

 

 

신병으로 인해 술로 보낸 20대

 

전안에서 만난 황인애에게 내림을 하기 전에 어떤 무병(巫病)을 앓았느냐고 물었다.

 

“23세 정도 되었는데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입에도 못 대던 술을 무지하게 먹어댔죠. 그러다가 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가게라도 열 생각으로 열심히 모아두었던 돈을 다 탕진하고 말았어요. 이상하게 몸이 아픈데 딱히 병명도 나오지 않고요. 무릎에 물이 잡히고 십자인대가 다 망가졌다는 거예요. 수술을 해도 걸을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없다고 병원에서 이야기를 하고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생전 처음 점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병이니 신령을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러나 선뜻 그런 것에 동조를 할 수가 없어 많은 고민을 했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몸에 진동이 와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소변을 보고나면 몸서리를 치잖아요.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떨림이 오기 시작하더니, 그 떨리는 시간이 멀지 않고 매초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잠을 못자 무섭기도 하고 밤새 울었죠.”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저것이 날마다 술을 먹더니 미쳤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단다. 일 년 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날마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조차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황당한 것이었다고.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저수지에 마네킹이 빠졌는데 건져놓으면 사람이 되거나, 제가 산에 배를 타고 올라가거나, 애들이 옷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거나 하는 꿈을 꾸었어요. 또 모르는 남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놀래기도 하고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니면 밤새 여자들의 노래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로 미루어 황인애는 이미 자연통신이 된 상태에서, 3년 전에 내림굿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림굿을 받고 난 후,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는 다리가 아픈 것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가리를 잡고 나서 관악산을 여럿이서 갔는데, 그 꼭대기를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죠. 몇 발만 걸어도 무릎 통증이 심했거든요. 그런데 몇 발 옮겨보니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그래서 동행을 한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단박에 정상까지 올라갔죠. 참 지금 생각해도 신병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어요.”

 

‘타인능해’가 되고 싶다는 그녀, 무당이라 상처도 받아

 

내림을 받고 일 년 동안은 선생을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면서 허궁 기도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에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올 6월에는 채널 A라는 TV에 출연도 하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덕분에 생활이 조금 여유로워지고요. 그래서 모인 쌀을 갖고 경로당을 찾아갔는데 필요없다고 가져가래요. 아마도 제가 무당이라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상처를 받기도 했단다. 생활에 꼭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도울 생각을 했지만, 돈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오고 말았다고.

 

“전남 구례 운조루에 가면 타인능해라는 쌀독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돈이 조금 모이면, 공부를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요. 제가 신령들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젠 그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도 해야죠.”

 

생각하는 마음이 착하다. 팔달산을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일어서는 그녀를 보면서 세상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늘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는 그녀의 생각에 고마움을 느낀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모든 사람이 열게해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하라' 라는 뜻.

조선시대 영조때 류이주 선생은 자신의 가옥 '운조루' 안 뒤주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꺼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다.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거리는 440m에 불과하다.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으로 정한 이 곳에는 동이포루와 동삼치, 그리고 성벽 안으로 떨어져 지은 동남각루와 급격한 경사면 밑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천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다. 남수문은 올해 6월 9일 90년 만에 복원이 되었다.

 

화성 축성 당시 축조를 하였던 남수문은 1842년과 1922년의 대홍수로 인해, 두 차례나 유실이 되었다. 일제 때에는 그나마 남은 것을 철거시켜 터만 남아있던 것인데,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면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거쳐, 어떠한 비에도 무너지지 않는 최신공법을 이용해 복원을 하였다.

 

 

 

밖으로 돌아보는 축성의 극치

 

이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인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길은, 사실 화성의 외벽을 돌아보면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다. 이곳까지 화성의 겉모습이 다양하게 변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벌써 이 구간을 답사한 날짜가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화성이 변한 것이야 아니겠지만, 이렇게 뒤늦은 답사기를 쓴다는 것은 사실 답사의 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답사를 한 날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뒤로도 이 구간을 몇 번인가 지났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답사를 한 것은 화성문화제 기간인 10월 7일이었으니, 그 때의 시각으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화성 외벽으로 답사하다가 보면, 꽤 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성 밖 길을 걷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간을 특히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남수문과 팔달문 인근에 재래시장이 몰려있어, 시장구경을 마치거나, 지동시장 순대타운에 들렸던 사람들이 성을 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곳은 지형의 격차가 크고, 더구나 화성에 두 개의 수문 중 한 곳인 남수문이 있어 사람들이 외부로 관람을 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동이포루와 동삼치를 지나다

 

포루는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시설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구조물이다. 동이포루는 봉돈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며, 치 위에 세웠다.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3일에 완성을 한 동이포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밖에서 보는 동이포루 위에는 사람들이 쉬고 있는 듯, 왁자하니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밑에서 올려다본 동이포루의 날렵한 지붕이, 지금이라도 당장 날아오를 듯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이다. 성벽 위에 지은 전각 하나하나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곳, 그것이 바로 화성 외곽을 돌아보는 즐거움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지난 듯, 돌보다 색이 다르게 변한 동삼치로 향하다가 보면, 그 성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깊다. 이 돌들은 200여 년 전 화성 축성당시, 팔달산, 여기산, 숙지산, 궐동 등에서 날라 온 것들일 것이다. 200년 세월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동남각루와 남수문의 조화

 

동삼치를 지나 조금 더 걷다가 보면 갑자기 성벽이 변한다. 그 위를 보면 지붕 끝만 삐죽이 얼굴을 내민 동남각루가 있다. 이곳은 평지를 이루고 있던 성벽이 갑자기 이래로 곤두박질을 한다. 성벽을 둥글게 감아 들이고 아래로 층층이 여장을 놓은 곳, 그 아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중간 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남각루는 높은 곳에 남공심돈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 중 한 곳이다. 각루는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를 하였으며 주변을 잘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데, 예전 이 동남각루에 쉬고 있던 장용영의 병사들은, 그 밑으로 펼쳐지는 장시의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밑으로 고꾸라지듯 떨어져 내리는 성벽. 그리고 그 밑으로 서 있는 남수문. 아마도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 등을 함께 조망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 화성의 아름다운 곳 중 한곳이 아니었을지.

 

아홉 번째 그간을 걸으면서 또 다시 느끼는 것은, 역시 화성은 겉돌기를 할 만한 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에 소재한 봉녕사. 봉녕사는 우리나라 비구니 가람의 으뜸이라 칭한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성창사라 하였다. 1400년경에는 봉덕사로 개칭하여 오다가, 조선조 예종 원년인 1469년 혜각국사가 중창하고 사명을 봉녕사라 하였다.

 

혜각국사는 수원 광교산 일대에서 오래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광교산 중턱에 있었던 창성사에서도 혜각국사의 흔적이 발견이 된 것을 보면, 광교산 일대에 99개의 사암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허튼 소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각국사는 세조로부터 스승으로 예우를 받았으며, 간경도감의 경전언해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져

 

그 이후 봉녕사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971년 비구니인 묘전스님이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봉녕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묘전스님은 봉녕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에는 비구니 묘엄스님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설립한다. 1979년에는 묘엄스님이 주지와 학장을 겸직하고, 1983년에는 승가대학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에는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처음으로 금강율원을 개원하였다.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사찰인 봉녕사에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 삼존불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신중탱화와 현왕탱화가 모셔져 있다.

 

 

 

 

지난 10월 5일, 사찰음식문화대향연을 취재차 찾아간 봉녕사. 대적광전 앞으로 올라가 참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조와 어우러진 꽃들, 연화세계가 여기든가?

 

대적광전과 수령 800년이 지난 향나무의 모습만 보아도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런데 여기저기 놓인 석조마다 가득 꽃을 품고 있다. 그만 그 꽃구경에 취해버렸다. 정작 사찰음식대향연은 뒷전으로 미루고, 꽃에 반해버리다니. 아마도 누구보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석조와 어울리는 꽃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취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정작 취재를 할 것보다 더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한다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닌가. 땀을 흘리며 꽃을 찍고 있다가 보니, 어느새 나도 그 꽃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꽃과 바람, 산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고 했는지. 대적광전과 향나무 인근에 꽃들을 촬영하고, 대적광전 앞으로 가 잠시 머리를 숙인다. 누군가 열심히 절을 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등 뒤로 땀이 축축이 배어있다. 아마 오랜 시간 저렇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마음속에 간구하는 것이 있어 저리도 열심을 낸다면, 그 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작은 내 마음 한 자락 덜어내어 그 절을 하는 이의 마음에 보태고 싶다.

 

 

 

아마도 아직 봉녕사에는 그 석조에 담긴 꽃들이, 찾아가는 이들을 반겨줄 것만 같다. 서리가 오기 전에는 시들지 않을 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멀지 않은 길이라면 봉녕사를 찾아 꽃들과 대화를 해보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사물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하신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그것이 바로 법문이었다는 것을.

 

 

이산 정조는 화성을 축성할 때, 직접 화성축성 장소까지 행차를 하기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면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에 참배를 한 후 8일간의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 ‘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에 불을 밝힌 모습이다.

 

 

 

이산 정조의 꿈인 야조

 

정조는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명,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명,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명,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명,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더욱 장용영의 군사들은 가장 무예가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면, 그 훈련을 보면서 누구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훈련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야간 군사훈련

 

제49회 화성문화제의 둘째 날인 10월 8일. 오후 8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화성, 정조의 꿈 야조’는 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단의 숨소리와 마상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장용영 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보다 시연장을 더 넓혔다. 관객들은 도로건너 연무대 앞에 자리를 틀었고, 시연은 창룡문 앞 잔디광장 일원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올해 야조를 기대한 것은, 정조 당시 그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인지. 한 마디로 올해 야조는, 전혀 야조답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넓고 크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 등은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인 야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곳에는 정조의 꿈은 없었다. 그저 화려하게 포장된 그야말로 ‘총체공연’인 공연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처음 20여분 동안 무예24기 시범단의 모습은 늘 보던 대로였다. 늘 보아오지만 창, 검, 봉 등 <무예도보통지>에 보이는 무술과 마상재 등을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지만. 문제는 정조가 이곳으로 행차를 한 후이다.

 

야간군사훈련의 의미도 해석되지 않은 야조

 

그런 데로 연희가 시작되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창룡문을 화면을 삼아 스크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날고, 말을 탄 군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행기가 폭격을 하고 난리법석을 떤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징한 듯하다. 관람객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문에서 쏟아져 나온 무희들이, 창룡문 문루에서 떨어져 내린 긴 천을 끌어다 놓더니, 변형된 도살풀이를 추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넋이라도 달래 보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이때쯤엔 이미 ‘야조는 물 건너갔다.’라는 느낌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야간군사 훈련이 행해진다. 성문으로 쏟아져 나온 장용영의 군사들과 적들이 서로 진을 형성한다. 그리고는 ‘학익진을 펼쳐라’라는 호령과 함께 양편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성문 양편에서 발사가 되는 신기전은 폭죽에 불과했다. 신기전의 위엄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진배없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거기에는 장용영의 힘도, 정조의 꿈도 없었다. 결국은 이 마무리도 무예24기 시범단이 그나마 분위기를 살려주었을 뿐이다.

 

마지막은 더욱 가관이었다. 정조가 훈련에서 승리를 한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연희를 베풀라’고 명령을 했는데, 신칼을 든 무용수들이 나와 난리를 친다. 신칼은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추었다는 춤이다.

 

한 마디로 실망스런 야조였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진 야조는, 그렇게 허무함만 남기고 끝났다. 수원에는 화성이나 야조, 무예 24기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분들이 많다. 적어도 이렇게 광대한 무대를 사용할만한 야조를 생각했다면, 연결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물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해야만 했다.

 

 

실망만 가득안고 돌아서는데 야조를 늘 보아왔다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수원시민을 배제한 야조는 있을 수 없다. 수원시민들은 정조의 꿈에 당연히 동참을 해야 한다. 지난해에도 횃불을 들고 행사장에 참여를 해, 우리들의 행사라는 긍지를 가졌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서울사람들에게 퍼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수원시민들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연결도 안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 이런 야조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조대왕의 꿈을 찾을 것인가? 행사를 주관한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들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2013년은 수원화성문화제가 50회를 맞이한다. 제발 그 50회 야조에서는 진정한 정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야조를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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