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1박 2일'이 예전보다 못하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담당PD가 바뀌고 출연자들이 바뀌면, 처음에는 모두가 낯설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즈음 1박 2일을 보면, 나름대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참에 KBS 1박 2일 제작진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한다. 먼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바로 코앞에 아름다운 화성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복불복게임’을 할 수 있는 수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재미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고 안 오고는 전적으로 방송제작 담당자들의 몫이지만.

 

화성 연무대 앞에 마련된 활쏘기 체험장에서는 저녁 잠자리 복불복을 할 수가 있다. 무예24기 단원 7명과 1박 2일 출연진 7명이


 

왜 수원이 1박 2일에 좋을까?

 

우선은 수원은 거리상으로는 가깝다고 하지만, 정말 좋은 1박 2일의 코스가 있다. 아름다운 수원 화성과(낮과 밤이 전혀 다른) 행궁, 그리고 벽화골목과 수원갈비, 순대타운 등 복불복에 필요한 조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1박 2일의 진행에 적합하다는 것일까?

 

1박 2일의 멤버로는 김승우, 엄태웅, 이수근, 차태현, 성시경, 김종민, 주원 등 7명이다. 수원에는 무예24기 단원들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무예 24기를 연마한, 과거 장용영의 병사들이 하던 무술이다. 이들 중 7명과 함께 1박 2일 동안 시합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한 수는 접고 시합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화성열차를 타고 30분 정도 화성구경을 할 수가 있다. 여기서도 문제를 제출해 14명의 사람들 중 절반은 화성열차를 타고, 남은 사람들은 화성을 걸어서 성신사까지 이동을 하면 된다. 


서장대에 어르면 수원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는 화성에 대한 문제를 제출해 저녁 복불복을 할 수가 있다. 이긴 사람은 수원갈비로 진 사람은 알아서....  


 

제일먼저의 복불복은 연무대 앞에 마련된 활쏘기 체험장에서 시작을 할 수 있다. 각자에게 화살을 쏘게 해 복불복을 하는 것이다. 이긴 편은 행궁의 방에서 취침을 하고, 진편은 당연히 마루에서 한데 잠을 자는 것이다. 1박 2일이 즐겨하는 ‘잠자리 복불복’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화성열차를 타고 성신사로 이동을 하면 된다. 여기서도 문제를 맞춘 사람은 열차를 타고. 못맞춘 절반은 화성을 걸어가면 된다.

 

성신사에서 서장대로 걸어 올라가면 수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또 한 번 시합을 할 수가 있다. 바로 화성에 대한 상식을 묻는 게임이다. 이긴 편은 당연히 수원의 자랑인 ‘수원갈비’를 먹을 수가 있고, 진편은 제작진이 알아서 준비를 해주면 된다. 그리고 화성을 걸어본다.

 

 지동 벽화골목은 한창 조성중이다. 이곳에 1박 2일팀의 벽화를 남겨놓으면 보는 사람들에게 홍보만점이다.


 지동교회 종탑인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원 화성이다. 행궁과 화성박물관 등이 보인다.


 

지동 벽화골목으로 오면 요즈음 자원봉사자들의 그림봉사가 한창이다. 이곳에 1박 2일팀의 벽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두고두고 기억이 될 만하다. 그리고 나서 지동교회 노을빛 전망대에 올라 수원과 화성의 야경을 관람한 후, 화성의 야경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다.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4기 무예를 배울 수 있는 시간도

 

첫날 일정을 마치고나면 화성 행궁에서 낮에 활쏘기에서 이긴 사람은 방에서, 진 사람은 야외취침을 하게 된다. 또한 행궁의 이모저모를 돌아볼 수가 있어, 다양한 우리 고건축과 정조대왕의 효심 등을 알릴수가 있다. 요즈음 말초신경만 자극하고 있다는 방송사가 제대로 된 효(孝)와 충(忠)이 무엇인가를 시청자들에게 일깨울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가 이런 표현을 했다. '화성의 야경은 처절하리만큼 아름답다고..' 야경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충분한 영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이튿날 아침에는 무예24기 단원들에게 장용영의 무사들이 익혔다는 무예도 배워볼 수가 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무예24기 단원들을 따라 24기 무예를 배우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다. 그 또한 아직껏 접해보지 못한 1박 2일의 재미를 더할 수 있는 부분이다. 11시부터는 행궁의 신풍루 앞에서 시연하는 24기 무예를 관람한 후, 수원천을 따라 지동 순대타운에 가서 전골 등을 먹을 수가 있다.

 

이렇게 좋은 1박 2일 코스가 있는 수원. 왜 이곳을 선택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좋은 곳이 많은 우리나라라고 하지만, 역사와 아름다움, 효와 먹거리, 그릴 것과 즐길거리, 이런 것들이 완벽하게 준비기 되어있는 수원이다.

 

1박 2일 팀, 수원으로 오라!, 와서 7명의 멤버들과 장용영의 후예들이 한 판 붙어보자. 물론 ‘복불복’으로.

9월부터 시작한 ‘화성 겉돌기’가 끄트머리에 왔다. 팔달산을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남포루에서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의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용도동치와, 팔달사의 능선 끝에 자리한 서남각루인 화양루의 구간이다. 약 600m정도의 이 구간은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10월 26일 오후, 팔달산에는 가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남치를 벗어나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온이지만, 한낮의 기온은 땀을 나게 만든다. 그저 성벽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느끼면서 오르다가 보니, 성에 아치형의 문이 나있다. 이 길을 따라서면 팔달산 중턱에 있는 화성을 지켜준다는 신을 모신 성신사가 나온다.

 

 

가을을 느끼며 걷다

 

조금 안으로 걸어본다. 팔달산이 나무들이 붉은 색으로 옷을 입었다.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는 화성열차에 몸을 싣고 그 가을을 느껴보는가 보다. 다시 걸음을 옮겨 성벽 밖으로 돌아 길을 오른다. 남포루가 성벽 밖으로 돌출이 되어 서 있다. 남포루는 팔달산의 오르막에 자리를 하면서,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인 듯하다.

 

남포루의 또 하나의 기능은 팔달산으로 오르는 적들에게 공격을 하여 서남각루인 화양루를 보호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3층으로 된 포루에서 쏘아대는 포와 총 등을 피하기가 어려웠을 듯하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저렇게 비탈을 올라야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을 텐데, 거기다가 포까지 쏘아대는 포루로 인해 용도를 공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화성의 5곳의 포루 중 하나인 남포루는 1796년 7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만드는데 3,203냥의 비용이 들었다. 포루를 지나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갑자기 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그 위에 서남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서남암문은 용도로 군량을 옮기는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곳으로, 암문 중에서는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다

 

용도의 시작점인 서남암문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곳에는 성 밖으로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갈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용도에는 중간에 동서로 치가 한 곳씩 있다. 그 동편의 치를 끼고 돌아 서남각루로 향한다. 지난 9월, 비가 몹시 심하게 뿌리던 날, 이곳에서 화성 밖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 마지막 구간인 11번째의 구간. 그저 계속 걸으면 두 시간, 사진 촬영을 꼼꼼히 하면서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2달 만에 끝을 내다니. 물론 게으르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가는 계절에 따라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성은 역시 밖으로 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는 완전한 성을 돌아보고 싶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서남암문서부터 화양루까지 능선을 따라 낸 길이다. 팔달산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볼 수가 있다. 하기에 이곳은 화성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중 한 곳이다.

 

 

그렇게 화상을 밖으로 돌아보기가 끝났다. 화성 겉돌기를 하면서 성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화성의 진면목을 보았다. 화성은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성이라는 것을, 밖으로 돌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화성의 겉돌기는 화성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언젠가는 완전히 이어진 화성 겉돌기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지난 달 26일 구미공단에서 발생한 불산누출 사고로 인해,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와 임천리 일대가 황폐화가 되었다. 아직도 300여명의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피소로 옮겨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 피해를 입은 농작물의 면적은 212헥타르, 인명 피해는 사망 5명에 23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정부에서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를 했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은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한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봉산리 주민들은 농토가 불산으로 오염이 되었는데, 내년 농사는 어떻게 지을 것이냐고 볼멘소리를 낸다. 더욱 23일 환경부는 피해지역에서 불산에 노출된 3,997마리의 동물을 ‘일괄폐기처분’한다고 발표해, 주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황폐화 된 마을, 보기만 해도 처참해

 

구미시 임천리와 봉산리로 들어가는 주변의 농작물은 다 말라 처참하게 변해있었다. 논이며 포도와 같은 과실도 말라비틀어져 있고, 잘 익어가던 고추는 그대로 붉게 말라죽어버렸다. 논이며 밭 등 여기저기에는 붉은 현수막에 ‘불산누출사고 피해지역. 절대식용불가’라고 쓴 글씨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대구지방환경청의 대기오염측정차량의 모습이, 이곳이 아직도 안전하지가 않은 듯하여 걱정스럽다. 임천리에서 만난 주민이라는 어르신 한 분은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며

 

“도대체 이렇게 땅이 다 오염이 되고 사람이 죽어나갔는데도, 내년에 여기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온전한 이주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옮겨갈 수가 없습니다. 말이 괜찮다고 하지만, 그 누가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라고 한다.

 

 

 

짜장스님 불산피해 지역에서 봉사

 

얼마 전에 선원사 주지인 운천스님이 전화를 거셨다. 부산에 들렸다가 올라오시면서 구미 불산피해 지역을 들려오셨단다. 마을회관 등에서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분들에게 따듯한 짜장면이라도 대접을 하고 싶다는 것.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한다면서, 당신이라도 그분들에게 따듯한 음식을 대접해야겠다는 것이다.

 

10월 28일(일), 아침 일찍 선원사를 떠난 봉사단 일행은 4시간여를 달려 구미시 산동면 임천리 청소년수련원에 도착을 했다. 가는 길에 차장으로 보이는 마을은 그야말로 사람이 살 수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심하다. 다 타버린 논이며 밭은 푸른색이 보이지 않는다. 논이며 밭, 과실나무들도 모두 벌겋게 타서 죽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일까? 임천리 청소년수련원에 모이신 분들은 200여명 정도. 그분들에게 ‘스님짜장’을 봉사하기 위해, 봉사단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봉산리는 조리를 할 수 있게 준비가 되지 않아, 수련원에서 짜장을 볶아 밥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봉산리에서 짜장밥을 드신 주민들은 100명 정도의 인원이다.

 

두 마을을 돌면서 짜장면과 밥의 봉사를 마친 운천스님은 잠시 휴식을 하면서

 

“무책임한 실수가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한 끼라도 이분들에게 따듯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짜장면과 밥뿐이라 안타깝습니다. 얼른 이분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 가실 수 있기를 매일 간구하겠습니다.”라고 한다.

 

 

 

황폐가 된 들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정작 피해를 입은 분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온다. 아마도 몇 날은 그 타버린 농작물이며 붉은 현수막이 아른거릴 듯하다. 언제나 이분들이 웃음을 되찾을 수 있으려는지.

지난 10월 24일(수), 수원시 팔달구 구천동 수원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달마선원에서는 태평소와 아쟁 등의 소리가 울린다. 2층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굿판이 벌어졌다. 요즈음에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에서 굿을 하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찾아든 굿판에 참 볼것이 많다.

 

청주시 흥덕구에서 왔다는 굿을 의뢰한 제가집 사람들은 굿을 하면서 무격이 내리는 공수에 귀를 기울이며 연신 “고맙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굿판에서는 모든 것이 직설적이다. “내가 다 알아서 도와주마.”라는 무격의 공수는 굿을 하는 내내 계속된다. 아마도 그런 말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 바로 굿판인 듯하다.

 

 

‘입살이 보살’이라는데

 

이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이 4명, 악사가 3명, 그리고 제가집 사람들과 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합해 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중에서 달마선원의 원장이라는 김종해(남)와 팔달구 장안동 315-1에 거주하는 황인애(여, 30세) 두 사람이 주관을 하는 굿판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신아버지와 신딸이다.

 

무격들은 자신의 내림굿을 주관한 사람을 신아버지 혹은 신어머니라고 부른다. 내림을 받은 사람을 딸 혹은 아들로 칭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령 안에서 부모의 관계로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나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내림을 하고, 받은 관계로만 형성이 되기 때문이다.

 

 

굿판에서 제가집의 조상이 실려 연신 ‘도와주마’라고 공수를 하던 김종해는 그 도와주마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입살이 보살’이라고 흔히 말을 합니다. 사람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것이죠. 거기다가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 입에서 나오는 공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죠. 굿판에서 무당이 도와주마를 계속하다가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굿판 내내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죠.”

 

 

 

이 무녀 사람께나 홀리겠소.

 

신딸인 황인애가 신복을 갈아입고 굿판으로 들어섰다. 처음에 전국 명산에 있는 산신을 초대한다는 산바라기 굿을 시작한 것이다. 홍천익에 빛갓을 쓴 무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거기다가 굿판에 선 무녀가 엷은 미소까지 띤다. 구경을 하던 한 분이 작에 말을 한다.

 

“저 무녀 참 남자께나 홀리겠네요. 저렇게 웃으면서 굿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황인애는 24살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회사에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작은 점포 하나를 차리려고 계획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다리가 심하게 아파 걷기조차 힘들었다는 것.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더니,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수술을 해도 정상적은 사람들처럼 걸을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을 통해 신아버지인 김종해를 찾게 되었고, 거기서 들은 이야기가 ‘무병이니 수술을 하지 않아도 고칠 수 있다. 다만 네가 결정을 할 일이니 시간을 줄 테니 결정을 하라고 했다는 것.’ 그런데 점점 심해오는 통증과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날마다 이상한 꿈과 소리가 들려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매초마다 심하게 몸이 떨려 막 울기도 했어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모아 둔 재물도 다 날아가 버리고요. 그래서 결국 내림을 받았는데, 그렇게 아팠던 다리가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싹 가시는 거예요”

 

 

이제 내림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굿을 하다니. 굿은 그렇게 쉽게 배울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5년 이상은 지나야 굿을 배워 한 거리라도 굿판에서 할 수가 있는데, 애동(내린지 얼마나 안되는 무당을 지칭하는 말)이 굿판에서 그렇게 춤을 추고 소리를 하면서 공수까지 주다니.

 

밤늦게까지 이어진 굿에서 몇 거리를 맡아 한 무녀 황인애. 굿을 연구한다고 30여년 세월을 굿판을 쫓아다닌 내 눈에도 굿을 하는 것이 예쁘게 보일 정도였으니, 타고난 팔자라는 생각이다. 굿판을 나서는데 ‘다음에 굿 할 때는 더 잘 배워서 보여드릴게요.’라고 인사를 한다. 하기야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언젠가는 더 잘 배운 굿을 하는 황인애를 굿판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에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에서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년.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 강월헌 강월헌의 현판

  
▲ 강월헌 판소리 중고제라는 한 류파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명창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 강월헌 명창 염계달이 밤마다 소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강월헌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에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작은 이 정자 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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