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체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경체정은 뒤편에 낮은 산을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한다. 그저 바라다보면 단아한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정자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정자다.

 

전국에 있는 많은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거개의 정자들이 문을 닫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정자를 만나면 그저 담 밖으로만 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설명이야 안내판이 있으니 대략적인 것은 알 수가 있다고 해도, 그 속을 모르니 답답할 때도 있다.



 

사면에 다른 글씨로 현판을 달아

 

  
경체정에는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중에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확인을 할 수가 없는 정자는 늘 안타까움만 더한다

경제청은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조 철종 때인 1854년에 지어진 경채정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경체정이라는 현판이 4개나 달려있으니 어느 글이 추사 것인지 밖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경체정은 강윤(예조정랑, 승지),강완, 강한 세 형제의 덕행과 학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이 지었다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세웠으며 앞으로는 누마루를 깔고 뒤로는 방을 드렸다.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으니 외형만 보고 정자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주변에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마루 밑에 있는 외바퀴 손수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주인의 마음을 닮아

 

담 밖에서 경체정을 둘러보니 정자의 누마루 부분은 기둥을 세워 받쳤고, 방을 드린 뒤편은 흙으로 쌓았다. 그 한편에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을 놓은 듯 하다. 기둥이 선 뒤편에는 무엇에 사용을 한 것인지 외바퀴 수레가 놓여있다. 정자 주위를 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 마감을 한 담장, 앞쪽에 낸 작은 일각문, 그리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경체정. 주변과 잘 어우러지며 서 있는 정자는, 그저 선비 같은 모습으로 말이 없다.

 

정자를 볼 때마다 그 정자를 닮아가는 마음이 없다면, 정자가 그저 단순한 전각 하나로만 보일 텐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만난 경체정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을 것 같다.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지동 벽화골목에 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동벽화길 제2구간인 지동 10통과 13통 일대의 골목길엔 왁자하다. 여기저기 자원봉사자들이 벽에 달라붙어 나뭇잎을 그리고, 열심히 칠을 하고는 한다. 이들 자원봉사자 중에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 블로거 10여명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날 3개 미술학원에서 참여를 한 봉사자들은 1구간에서 하루 종일 작업을 했으며, 오후에는 경기수원르네상스 포럼에서 20명, 일반인 자원봉사자 25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도란도란 수원e야기 블로거 중에는 어린 딸들과 함께 참여를 하기도 했다. 이들은 4살과 6살짜리 두 딸과 함께 참여한 닉네임 러브연희맘님도 있었으며. 4살짜리 딸을 데리고 참여를 한 양영주 블로거도 있었다.

 

 

지동 벽화골목의 한 벽에 설치된 나비 조형물과 하트모양의 탁자(위) 11월 24일(토) 오후 자원봉사자들이 그림을 그리기전 설명을 듣고 있다(아래)


 

벤치마킹을 하러 오기도

 

요즈음 지동골목에는 인근은 물론, 타 도시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러 오고는 한다. 24일에도 수원시 조원동의 그린나래 봉사단 25명 정도가 골목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지동 벽화골목은 이제 봄, 여름, 가을을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으며, 겨울풍경으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눈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골목마다 특이한 것들도 있다. 벽에 붙어있는 평상과 조형물로 꾸며 놓은 나비, 그런가하면 곳곳에 놓인 나무화단이 아름답게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간이 가면서 점차 날이 쌀쌀해졌지만, 벽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리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가끔은 허리를 펴느라 일어서다가, ‘끙’ 소리를 내기도 한다.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러거들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위) 딴 벽에는 어린 딸들과 함께 참여를 한 블로거들이 딸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아래)  


 

마을주민들이 좋아하는 그림들

 

지동 제2 벽화길은 테마골목이다. 계절별로 그림이 이어지는가 하면, 집집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했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린 것이 아니다. 순수한 그림을 못 그려도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이루어 낸 작품이다. 이들은 4세 꼬마부터 70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참여를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골목에 특별한 구조물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골목길 안에 우물이 있는 곳에는, 벽 여기저기서 물이 쏟아지는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양이들이 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한다. 그만큼 가장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오후 내내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위)과 벤치마킹을 하는 사람들(아래)


 

골목 외곽 길가의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한 자원봉사자는 요즈음 지동이 날마다 변해가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면서

 

“저는 오늘이 세 번째인데 정말 아름다워졌어요. 처음에는 그림들이 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렇게 완성 단계에 들어가면서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는 듯도 하고요. 요즈음은 그림을 그리다가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위해 노력들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지동의 벽화골목을 보면서 ‘마을만들기 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를 알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방관을 하고 있던 주민들도 이제는 스스로 동참을 하고 있다. 이 벽화 골목 조성사업이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낡고 읍습하던 골목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벽마다 나열이 되어있다.

 

 

우물이 있는 집의 벽에는 물이 콸콸 흐르는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물로 인해 놀라는 고양이가 모습이 재미있다(위) 아래는 겨울테마로 들어가는 벽화 


 

철조망 때문에 벽에 녹물이 흐르던 담 등, 벽이 더러우면 나무판자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계획된 밑그림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다. 이 제2 골목벽화가 끝나면, 내년에는 또 한 곳의 골목에 제3 벽화길이 조성된다. 아마도 마을만들기 5년 사업이 다 끝나는 2015년이 되면, 지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변해있을 것이다.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집을 짓다가 보니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게 되었겠지만, 우리들의 집을 짓는 방법으로 따지면 조금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 하나가 오히려 이 집을 더욱 기억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고택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면이 있다.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 1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5호인 김병호 고가. 용문면소재지에서 용문사가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오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 샛말로 들어가면, 마을의 중앙 언덕 위에 자리한 김병호 고가가 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30년인 1893년에 지어진 집으로,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튼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건넌방을 경계로 삼은 안채

 

이 집은 조선조 말 내시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연못을 3년간이나 터를 닦아 지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99칸의 큰 집이었으나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안채만 원래의 집이라고 한다. 김병호 고가를 돌아보면 그 말에 수긍이 간다. 그만큼 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김병호 고가의 안채는 남서향을 하고 있다. 마루문을 달아낸 두 칸의 대청이 있고,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는 안방과 날개로 꺾어 달아낸 두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건넌방이 있는데, 이 고가의 특징은 바로 건넌방이다. 건넌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 그 다음에 달아낸 두 칸의 방과 안방의 경계로 삼고 있다.

 

덧달아 낸 두 칸의 방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문을 달아내고, 그 다음은 온돌방을 놓아 그 북측에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폐를 모셔놓았다. 앞으로는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사랑방의 구성을 한 것이다.

 

결국 이 건넌방을 앞으로 돌출을 시킨 것은, 안방과 사랑방의 경계를 건넌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일반 고가에서는 보기가 힘든 구성인데, 조선조 말에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중인계급이 신분상승을 하면서, 나름 안채와 사랑채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택한 가옥의 구조이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건넌방이 돌출이 되어 안방과 사랑방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넌방을 지나 두 칸으로 꾸며진 사랑은 한 칸은 마루방으로 하고, 끝의 방은 북쪽에 감실을 낸 사당으로 사용한다.

부엌에 벽에 낸 쪽문은 냉수문

 

김병호 고가를 주의 깊게 보면 두 칸 부엌의 위로는, 두 칸의 다락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은 전면은 판자벽으로 했으나 옆으로 돌아가면 심벽으로 구성하였다. 나름대로 전체적인 집의 구성을 사대부가의 집에 걸맞게 꾸몄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판자로 문양을 내고 쪽문을 하나 내었다. 이 집을 소개하신 어르신의 말은, 이 쪽문이 '냉수문'이라는 것이다. 즉 안방에서 부엌을 드나들 때, 번거로움을 피해 이 구멍을 통해 냉수그릇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용도로만 꼭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름대로 멋을 더하고 생활의 편리를 생각한 쪽문이다.

 

안방에서 날개채로 달아 낸 두 칸의 부엌은 위에 다락을 두었다. 앞은 판바벽으로 막고 옆과 뒤는 심벽으로 꾸몄다.

부엌의 까치구멍 위에 낸 쪽문. 이런 것 하나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대문 밖 아궁이를 둔 대문채

 

김병호 고가의 특징은 대문채의 대문 밖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6·25 동란으로 불이 타버린 대문채는 다시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데, 대문채와 행랑채가 붙은 ㄱ 자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은 행랑채로 구성해, 길가로 툇마루를 냈으며, 우측으로는 대문채를 두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헛간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문채의 밖으로 한데아궁이를 내고, 그 위로 다락을 둔 점도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밖으로 아궁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으로 자리를 잡은 김병호 고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이곳에서 음식을 하고 행랑채의 툇마루를 이용하여 급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를 사랑채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마 후에 이곳을 사랑으로 사용했기 때문인가 보다.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면 사랑채가 별도로 있었을 텐데, 안채에 건넌방을 막아 사랑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구조는 대문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문의 우측에는 한데 부엌을 내고 그 위에 다락을 꾸몄다. 그리고 좌측의 행랑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내었다.

뒤태가 아름다운 김병호 고가

 

김병호 고가를 둘러보다가 보면, 이 고가의 뒤태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대문채의 밖을 판자벽으로 둘렀는데, 기단의 돌이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이 무늬가 있는 돌로 사용을 했으며,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집을 소개하신 분께 이 돌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잘 모르시겠단다. 

 

기단을 모두 이렇게 무늬가 있는 돌로 꾸민 것으로 보면, 김병호 고가의 처음 모습은 범상치가 않았을 것 같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용문사를 지은 대목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보아도 그렇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나 툇마루 등에 목재를 사용한 치목도 뛰어나 보인다.

 

김병호 고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니 기와를 교체하면서 내린 흙 기와를 담장에 붙여 쌓아 놓았다. 기와의 형태로 보아 가마에서 구운 기와다. 이러한 기와는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들이다. 이 뒤뜰이 이 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뒷벽과 굴뚝의 조화다. 굴뚝을 강돌로 쌓아 담벼락과 쌍으로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벽과 강돌로 조형한 굴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담장에는 오래된 기와가 가득 쌓여있다.

대문채에 붙은 광과 헛간의 뒤는 모두 판자벽으로 처리해 멋을 더했다. 그리고 기단은 무늬가 있는 장대석을 사용했다.

고가를 돌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만난다. 후일 이 특별한 부분만 따로 모아 책으로 쓴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고택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줄다리기는 풍년, 풍어의 기원

 

줄다리기는 여러 사람이 두 편으로 갈라,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한 해의 길흉을 점치고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마을 행사였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점점 이웃마을로 합세를 하면서 대보름이 되면 거대한 줄로 변한다. 새끼줄이 중줄이 되고, 그것이 다시 모여 쌍룡이라는 암수의 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줄은 주로 음력 대보름을 기해 행해졌으며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장정들이 하거나 또는 남녀노소가 함께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었다. 줄다리기를 삭전(索戰)·조리지희(照里之戱)·갈전(葛戰)이라고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줄다리기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주로 중부지방 아래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아 벼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줄다리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 행하지만, 곳에 따라 단오나 한가위에 하기도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각각 만든다. 예전에 여주 흔암리 일대의 줄다리기는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줄의 길이가 한편이 80m 정도의 큰 줄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기 때문에 일대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줄은 암수줄을 만들어 그 용두(줄머리) 부분을 암줄은 넓게, 숫줄은 좁고 위로 오르게 만든다. 숫줄의 용두를 암줄의 용두에 넣은 후 비녀라는 나무빗장을 걸게 된다. 용목의 너비가 1m에 이른다고 했으니 그 줄의 위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줄의 용두 부분. 굵은 줄은 용목이 1m 나 되었다

 

줄다리기는 공동체의 구심점

 

줄다리기는 단순히 줄을 당기는 놀이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를 창출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내적 사고를 지니게 된다. 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틀이 지나고 나면 마을마다 작은 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줄을 갖고 이웃마을과 줄다리기를 한다. 진 마을에서는 이긴 마을에 줄을 넘기게 되고, 이긴 마을에서는 그 줄을 합해 조금 굵은 줄을 만든다. 이처럼 처음 만들어진 줄이'새끼줄'이다. 마을마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며 새끼줄을 모으고, 이긴 마을끼리 또 다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날이 갈수록 줄은 점점 굵어지는데, 이때 줄을 '중줄'이라고 한다.

 

줄을 이긴 마을에 넘겨줄 때는 사람들도 함께 그 편이 된다.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절로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줄이 보름이 가까워지면 커다란 암줄과 수줄로 형태가 변한다. 즉 암용과 수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마을도 강을 사이로 강북과 강남이 암숫룡을 이고 줄다리기를 할 강변으로 모여든다. 마을마다 들고 나온 깃발에, 마을의 풍물패가 한데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마음으로 풍농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였던 것이 바로 우리 줄다리기의 근본이다. 또한 겨우내 움츠려진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길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 것이다.

 

  
거대한 줄로 보를 막으면 그 줄을 이용해 많은 어종들이 알을 낳기도 했다.

 

'줄보'는 생명의 근원

 

줄다리기를 마친 후 줄은 마을마다 사용법이 다르다. 어느 곳에서는 줄을 당산에 쳐놓기도 하고, 어느 마을에서는 얼음이 언 강에 갖다 놓기도 한다. 새끼줄을 잘라 지붕에 던지면 집안에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잘라가기도 한다. 또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줄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줄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줄보>라는 줄의 사용법이다. 마을에 내가 흐르면, 줄을 당긴 후 내를 막아 보를 만든다. 이 짚으로 만든 줄보는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자연을 보호하고 물을 정화시킨다. 수많은 어류들이 이곳에서 생명을 잉태시킨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어장이 되는 것이다.

 

물속에 많은 먹이를 만들어 배부른 강을 만들고, 여름 장마철이 되면 떠내려간다. 이때쯤이면 농사를 지을 물이 부족하지 않다. 생명을 잉태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물을 가둘 수 있는 줄보.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하면 스스로 떠내려가 물의 흐름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생명의 줄보가 물을 막는 것이다.

 

  
줄을 이용해 보를 막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자. 강을 오염시키지 않고 수 많은 생명을 잉태한 생명의 줄이다

 

이런 줄보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들의 논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조상 대대로 이용해 농사를 지을 물을 가두고, 많은 생명을 잉태시킨 줄보.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선조들의 자연사랑과 공동체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저마다 잘났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 이 줄보를 과연 알고는 있었을까? 그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저곳을 줄보로 막을 수만 있다면 굳이 이런 논란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의 보 <줄보>, 이 줄보를 만들어 썩은 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사랑의 김치를 담는 못골 사람들과 김명순 부녀회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수원의 각 동마다 떠들썩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판을 벌린다. ‘판’이라고 하면 ‘먹자판’이나 ‘놀이판’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각 주민자치센터에서 벌이는 판은 바로 ‘김치판’이다. 수십 명이 모여 1,000포기 정도의 김치를 담는다. 물론 자신들이 먹을 것은 아니다.

 

11월 23일 아침 일찍 수원시 팔달구 지동 주민자치센터(동장 박찬복) 주차장에도 판이 벌어졌다.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앞치마를 두르거나, 혹은 비닐을 앞에 대고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그리고는 너른 판 위에 있는 속을, 열심히 절인 배추에 집어넣는다. 배추 잎을 하나씩 들춰가며 속을 가득 채운 배추는, 금방 붉은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웃사랑의 본보기 보여주는 행동

 

말로만 하는 이웃사랑은 사실 사람들만 더 피곤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이 쌀쌀한데도 3일씩이나 고생을 하며, 몸소 실천하는 이들이야 말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벌써 3일째 김장에 매달린 사람들이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 첫날은 배추밭에 가서 배추를 뽑고, 둘째 날은 배추를 다듬어 절였다. 그리고 셋째날인 11월 23일에는 김장을 한다.

 

오늘 지동자치센터 앞에 모인 사람은 지동의 8개 단체가 모두 모였다. 오늘 김장담기의 주관모임인 새마을부녀회를 비롯하여, 주민자치위원회, 통장협의회, 새마을지도자회, 바르게살기협의회, 심지어는 방법기동대까지도 합세를 했다. 한편에서는 배추를 나르고, 한편에서는 속을 넣고, 또 한편에서는 상자에 담아 하나씩 정리를 한다.

 

 

‘2012 사랑의 김치’를 담는 사람들

 

부녀회원들과 함께 열심히 김장을 담고 있는 지동새마을부녀회 김명순(58세) 회장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챙기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와중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김포댁이 지동으로 시집을 온 것은 벌써 35년. 그동안은 부녀회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남편(정광수, 65세)과 남매의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는 것이, 현모양처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농사는 반듯하게 지은 것 같아요(웃음). 남매를 다 유학까지 보내고, 큰애가 아들인데 가정을 꾸렸고, 딸애는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제가 부녀회를 맡은 지는 3년이 조금 지났어요. 지동 부녀회가 있다가 해체가 되었다고 하는데, 동장님과 여러분이 계속 부녀회를 맡으라고 종용을 해도 거절을 했죠.”

 

 

 

그러다가 반 강제로 부녀회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연신 부녀회원들이 ‘회장님’을 찾아댄다. 2012 사랑이 김치는 모두 150 박스 정도를 마련한다고 한다. 이렇게 담군 김치는 홀몸어르신(예전에는 독거노인이라고 했으나 요즈음은 명칭이 바뀌었다)들의 겨울 식량으로 보내드린다는 것이다.

 

“와서 가져가실 수 있는 분들은 오늘부터 와서 가져가시고요. 하지만 대개 어르신들이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동직원분들과 통장님들이 배달을 해 주시죠. 이렇게라도 해야 겨울에 반찬 걱정을 좀 덜하고 사실 수가 있으니까요. 한 달에 한번은 저희들이 밑반찬을 만들어서 갖다 드리기도 하고요”

 

봉사를 하다 보니, 세상이 달라져 보여

 

그동안 몰랐었다고 한다. 지동이 지금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지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만이 갖고 있는 ‘정’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지동에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무시를 하는 투로 대했다는 것. 거기다가 지동은 ‘꼴통동네’라고 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정말 화도 많이 났어요. 그런데 살다가 보니 지동처럼 정이 넘치는 마을이 없는 것 같아요. 지동 분들은 떡을 해도 나누고, 하다못해 수제비를 떠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분들이죠. 저희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려고 도움을 요청하면, 한 분도 거절한 사람들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에게 힘을 되는 말들을 해주시고는 하죠.”

 

 

부녀회를 맡고나면서 점점 지동에 빠져든다고 한다. 사실 김명순 부녀회장 부부는 지동에서는 봉사를 잘하는 부부로 유명하다. 부녀회에서는 결손가정돌보기, 홀몸어르신 찾아뵙고 도움주기, 불우한 이웃돕기, 김장담기 등 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회원들이 만나 함께 일을 한다고 한다.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부모처럼 대하고 싶어

 

김치를 담느라 바쁜 일손을 오래 뺐을 수는 없다. 부녀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어르신들도 물론 도와야 하지만, 결손가정 아이들을 저희들이 부모처럼 따듯하게 함께 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 이아들이 영 마음을 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았죠.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아이들 대답이 ‘얼마 안 있으면 또 우릴 떠날 텐데’라면서 고개를 떨구는 거예요. 아이들 마음속에는 친 부모도 자신들을 버렸는데, 남이 언제까지 우리들을 끼고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그냥 놓아둘 수가 없어 동사무소에 부탁을 해 주차장 옆에 가건물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반찬도 만들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잖아요. 부모도 없이 저희끼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혼자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못 된 길로 들어서도, 누구하나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저희들이 앞으로 이런 결손가정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그 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베풀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당에는 김치상자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부녀회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정성이 가득한 사랑의 김치. 이 김치를 받아서 고마워할 어르신들의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수고를 하는 분들을 위해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보내주었다고, 꼭 ‘고맙다’라는 말을 빼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김명순 회장.

 

“세상에 우리 지동 같은 마을은 없어요. 정말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곧 거듭날 것입니다. 그 때 다시 한 번 찾아오세요.” 라고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푹하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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