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편 산 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이다. 나무의 수고는 약 20m,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는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이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큰 키로 자라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대부분 작은 나무만 볼 수 있다.

 

 사진 위는 11월 22일의 물푸레나무, 아래는 문화재청 자료로 잎이 무성한 모습의 물푸레나무 

 

마을에서 신목으로 섬기던 나무

 

11월 22일 오전, 모처럼 답사를 떠났다. 그동안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마을지를 쓰느라, 거의 한 달여를 답사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길을 나선 것이다. 화성으로 들어서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저수지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산 중턱에 잎을 다 떨군 물푸레나무가 보인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동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으며, 이 나무를 해하면 마을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온 나무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 속이 비어있는 나무의 밑동

 

나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이 눈여겨본다. 아마 나무라도 어찌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사진만 찍고 있다는 것은 것을 알고 안심을 했는가보다. 대개 마을에서 신목으로 삼아 섬기는 나무를 조사할 때는, 유난히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의 눈총 때문이다.

 

속빈 줄기 안에 또 작은 가지가 자라고 있어

 

수령이 350년이 넘어서인가, 나무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 밑동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거의 밑동의 반 이상이나 속이 비어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다. 나무도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는 수령을 다 채워 스러지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런 아픈 상처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륜을 느끼게 만드는 표피

 

나무 주변에는 굵은 동아줄을 쳐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은 차에, 마침 한 편 줄이 늘어진 것이 보인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 형태를 살펴본다. 350년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주민들의 서원을 들어주었을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새삼 그 위용에 압도를 당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을 일부러 가을이 지난 후에 찾아보기도 한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 그 줄기나 속을 일일이 살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의 한편에 이상한 것이 있다. 텅 빈 안으로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 안에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안에 줄기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다.

 

 원줄기의 빈속에 또 다른 가지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나무가 보인다 (붉은 원안)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무의 원줄기 안에 또 다른 줄기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 동안 수많은 노거수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마도 이 물푸레나무가 그 원 즐기 속에 또 다른 나무 하나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나무가 자식을 그 줄기 안에서 키우고 있는 것일까? 마치 새끼를 밴 듯한 놀라운 모습이다.

 

한참이나 그 속이 곳을 바라다보면서 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런 기이할 때가 또 있을까? 내년 여름에 이 나무의 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때는 뱃속에 든 것이 줄기인지 뿌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 분들도 만나 뵙고 나무에 얽힌 사연도 알아보고.

참 세상을 살다가 보면, 아주 가끔은 길에서 횡재를 하는 수가 있다. 이런 글을 쓰면 무슨 ‘돈지갑이라도 주웠나 보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요즈음 통 답사를 나가지 못했다. 하는 일이 많다가보니, 하루 종일 취재하고 글쓰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11월 22일(수), 모처럼 멀리는 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인 화성시로 답사를 나갔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가보지 못한 몇 곳을 돌아볼 생각으로. 그런데 두 곳을 돌고 보니 속이 허하다. 어제 과음을 좀 한 탓인지, 아침에 밥맛이 별로 없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땅히 들어가 속풀이를 할 만한 음식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속이 깊은 냄비에 가득한 칼국수(위)와 마치 카페같은 분위기가 나는 호호락 전경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

 

어차피 내선김에 대부도를 들어가 얼큰한 매운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부도로 가는 길인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89-2에 간판이 보인다.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이란 글이 쓰여 있다. 그런데 식당을 찾아도 비슷한 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 대신 꽤 괜찮은 카페 같은 집이 있다.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그 아름다운 집이 바로 호호락이라는 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깔끔한 곳이 여느 식당 같지가 않다. 메뉴판을 보니 해물 얼큰이 칼국수, 샤브샤브 칼국수, 그리고 부대찌개가 주 종목이다. 속을 풀려고 얼큰이 칼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이 집은 점심특선이 11시부터 13시까지 한사람 1인분에 한해 8,000원이란다.

 

 처음에는 카페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실내가 상당히 심플하다. 

 

그것도 좋지만 우선은 ‘해물 얼큰이 칼국수’를 시켰다. 반찬은 김치 딱 2가지, 그런데 8,000원이면 좀 비싸지 않은 것인지? 실내를 돌아보니 정말 깨끗하고 특이하게 꾸며져 있다. 하기야 이 정도 분위기라면 반찬이 김치 2가지라고 해도, 그 분위기에 젖어들 것만 같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조개

 

커다란 속이 깊은 냄비에 가득한 칼국수가 물 위에 올려졌다. 그런데 2인분치고는 양이 상당하다. 속을 한번 휘저어 본다, 바닥에서 무엇인가 달그락 거린다.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냄비 안에 조개가 가득하다. 거기다가 버섯과 새우를 넣어 국물 맛 또한 일품이다.

 

 해물 얼큰이 칼국수(위)와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 이 집은 모든 음식재료를 유기농으로 지은 화성에서 생산된 것들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장사를 해서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먹으면서도 걱정스럽다. 음식을 먹으면서 미안해 보기는 이번이 또 처음이다. 둘이서 한 참을 먹었는데도, 밑에는 조개가 가득하다.

 

“지난해 8월에 이 길을 지나다가 보니 집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이 집을 사버렸죠. 그리고 칼국수를 팔았는데, 요즈음처럼 물가가 비쌀 때라 남는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요새는 입소문을 듣고 이리로 일부러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왜 안 그렇겠습니다. 이 분위기에, 이 냄비 가득한 해물에, 거기다가 맛까지 일품인데 누군들 한번 찾아오지 않을라고요.’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이 집은 원래 카페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난 후 한 때는 영양탕을 팔기도 했다고. 세상에 이 아름다운 집에서 어쩌자고 영양탕을 판 것일까?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조개와 새우 등에서 우러난 국물이 시원하다. 거기다가 고추가루를 최상품을 사용한단다. 칼구수 안에는 조개와 새우, 그리고 버섯까지 가득하다(위) 아래는 칼국수에 들어있는 조개(이것이 반 정도의 양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 호호락에서 먹는 얼큰이 칼국수. 아마도 한 동안은 그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음식을 먹고 나면 또 얼마동안은 힘을 얻어 답사를 한다. 답사길에서 만난 음식 한 그릇이 주는 행복. 아마도 땀을 흘리거나, 눈길에 미끄러지거나, 혹은 비를 맞으며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가 없는 행복이다.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89-2

전화 : 031)357-6432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 서운산은 남으로는 서운면 청룡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북동으로는 석남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석남사는 가파른 경사에 층계를 놓고, 전각을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운치 있는 절이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19년인 680년에 승려 담하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성왕 18년인 876년에 염거화상이 석남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고려 광종의 아들인 혜거국사가 후에 크게 중건을 했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서운산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아 헤매다

 

마애불이 있음을 알리는 이졍표

 

석남사에서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보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석남사까지는 300m, 정상까지는 1.8km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애불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금광면 상중리 산22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 높이 5.3m의 이 마애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남사를 한 바퀴 돌고 종무실에 가서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대답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애불이 500m 앞에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우측으로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직진을 해도 역시 산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마애불을 안내하는 표시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리를 건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으로 난 다리를 건너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500m 이상을 더 걸었을 것 같은데도, 마애불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새 산 정성이 바로 앞에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마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나,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편이라는 것이다. 다리 건너에 작은 이정표 하나만 세워주었어도, 이런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석남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석남사에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의, 자연암벽에 입상을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길이 갈라지는 마애불의 밑에서부터 돌로 탑을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이 지역의 마애불들이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를 한 것에 비해, 석남사의 마애불은 전체를 돋을새김 하였다.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전체적으로는 육중한 느낌이다. 암벽에 꽉 차게 조각이 된 마애불. 3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놓았는데, 그 모습이 투박하다. 그리고 몸에도 신광이 표현이 되어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겼을 텐데, 아직도 뚜렷하게 형태가 남아 있다.

 

발가락이 시리겠네요

  

얼굴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두광과 삼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연화대 위에 올라선 마애불, 법의 밖으로 발가락이 돌출이 되어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연화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발가락 부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경스런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양 발가락의 표현이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돌출이 된 연화대 위에 법의에서 벗어난 발. 그리고 한 편에 다섯 개씩의 발가락.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사실적이다. 법의 속에서 삐죽이 내민 열 개의 발가락. 전체적으로 무거운 마애불을 이 발가락이 희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모두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육계는 낮고 어깨는 넓게 표현을 하였다. 목에 보이는 삼도는 필요 이상으로 두텁게 해, 마애불의 인상이 투박하면서 무겁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덥고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U 자형의 주름을 이룬다. 주름은 복부 밑까지 내려오다가, 다리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석남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 그 모습 그대로

 

내의의 가슴께 묶은 매듭. 투박한 모습이며 밑으로 잡은 주름도 투박하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묶었으며, 밑으로는 주름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매듭이나 주름도 상당히 투박해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내영인과 같은 형태의 수인이지만, 한 팔을 아래로 하지 않아 내영인은 아니다. 일설에는 법설을 할 때의 수인과 같다고 한다. 양 팔에도 법의가 팔에 걸쳐있는 형태다.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산을 한 바퀴 돌아 찾아와서인가, 저녁 햇살이 비치는 마애불의 모습이 유난히 자비로워 보인다. 인간세상 고통을 지금이라도 다 가져갈 듯한 미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것인지.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향이 연기를 허공에 퍼트리고 있다.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에는 세 곳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서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보물 제403호인 화서문이다.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문이기도 하다. 화서문의 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 화서문은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져 있다.

 

화서문은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좌우의 문루 위 전각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옹성의 제도는 어떠했나?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으로,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적에게 어떤 공격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고 하면, 화서문의 화력을 어느 정도였을까를 유추해 보자. 우선은 화서문 자체의 화력만 갖고도 섣불리 접근을 할 수가 없다. 멀리서 오는 적은 원총안에서 쏟아지는 조총의 총탄을 피하기도 어려운데, 많은 인원이 몰려 가까이 접근을 한다고 해도 활을 쏘는 구멍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가 어렵다.

 

 

 

또한 용케 성벽 가까이 다가온다고 하면 가까운 거리의 적을 쏠 수 있는 근총안(근총안은 밑으로 비스듬히 뚫려있다)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기가 어렵다. 거기다가 화서문을 지키는 장용영의 군사들은 여장이 보호를 하고 있어, 적에게 노출이 되지 않아 손을 쓸 수가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성문을 벗어난 성벽에도 무수히 많은 군사들이 여장 뒤에 몸을 숨기고 총과 활을 쏘아댄다. 우리의 전통 활인 각궁은 그 사거리가 145m에 이른다, 가까이 오기도 전에 화살을 맞거나 원총안에서 쏟아지는 화력을 당할 수가 없다. 또한 화서문의 바로 곁에는 소라각이라 부르는 서북공심돈이 자리한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의 병사들이 함께 적을 향해 공격을 한다고 하면, 당시를 생각하면 그 화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적이 공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의 열린 부분이 없다. 다만 옹성 중앙에도 철갑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화서문과 창룡문은 고제에서 언급했듯, 한편을 틔어놓았다. 그러나 그 트인 부분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는 어렵다. 더구나 힘을 받기 위해서는 적당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옹성 안은 그렇게 넓은 공간이 아니다.

 

만일 옹성의 터진 부분의 성벽을 깨고 들어오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옹성은 외벽은 전돌이지만, 내벽은 단단한 돌을 이용해 쌓았다. 또한 옹성의 열린 부분의 일부는 크고 단단한 돌로 쌓아, 공성무기 등으로 무너트릴 수가 없다. 공성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은 사면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그 안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철통같은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화서문이다. 거기다가 성벽위에는 쇠뇌와 불랑기포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불랑기포는 1호에서 5호까지 있었는데, 1호의 길이는 9척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큰 것으로 보아 이것은 대형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먼 거리에 있는 적도 사살할 수 있는 쇠뇌와 불랑기포, 불랑기포는 세 곳의 공심돈에서 사용하는 주력무기였다. 화서문 바로 옆에 자리한 서북공심돈에도 대형 화포인 불랑기포가 있었다는 것이다. 쇠뇌는 긴 창을 이용한 화살이다. 강력한 힘으로 날아가는 쇠뇌에, 조총과 활로 무장을 한 화성의 주둔 병사들이었다.

 

결국 당시의 화력으로는 화성을 범접할 수가 없었다는 결론이다. 화서문 하나로만 보아도 화성이 얼마나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었는가를 유추할 수가 있다. 우리가 화성을 막강한 군주의 위엄을 보이는, 최고의 성곽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즈음을 SNS시대라고 한다. SNS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이다. 광의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블로그나, 카페, 개인 홈피 등도 모두 이 소셜 네트워크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요즈음은 SNS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트위터나 Facebook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즉 상대방의 블로그 등에 방문을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내 글과 남의 글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블로그를 갖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현장에서 직접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쓸 수 있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비해, 블로그는 일일이 글을 작성하고 사진을 편집해야 하는 분주한 작업이 뒤따르지만 말이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SNS를 이용하는 방법

 

블로그는 ‘일인 미디어의 꽃’이라고 한다. 많은 블로거들이 이미 소셜 네트워크에 앞장 서 있고, 그들은 블로그와 함께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잘 활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과 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블로그 하나쯤은 스스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해서 모두 ‘파워소셜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공을 들여야 하고, 많은 이웃들과 서로 소통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작성한 글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고 소통을 할 수 있다.

 

 

간단한 글과 사진을 갖고도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시민기자들의 기사를 블로그에 올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해, 더 많은 이웃에게 알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모바일을 이용하는 것이 간단한 요약을 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후자의 블로그는 상황을 반듯하게 정리를 해서 남들에게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민기자들은 블로그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블로그 이렇게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블러거들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어느 블로거들은 블로그만을 운영하면서도 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야 하고, 글과 사진 등이 남달라야 한다. 파워블로거 혹은 파워소셜러 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기장쯤으로 블로그를 운영한다면, 그 블로거들은 절대로 파워소셜러가 될 수가 없다. 자신의 주장이 확실하야 하고, 또한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운영방법이 있다.

 

1. 전문성을 가져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무 글이나 쓰면 일명 ‘슈퍼마켓’이다. 그런 운영방법보다는 한 가지 자신이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 전문적인 콘텐츠를 이용해 남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부제를 하나 더 두어라

전문성을 가지라고 한 가지에 너무 집착을 하다가 보면, 자칫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다. 전문성을 갖는다는 것은 시간을 많이 소요하게 되고, 그에 대한 경비도 만만찮게 들어간다. 그러다가 보면 나중에는 회의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글을 하나 쯤 더 적을 수가 있다면, 꾸준히 글을 올리게 된다. 꾸준함, 그것이 곧 파워소셜러가 될 수 있는 필수이기 때문이다.

 

 

3. SNS를 최대한 활용하라.

‘파워블로거’들은 거의 ‘파워소셜러’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나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함께 올리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블로그가 모두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연동이 된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파워소셜러로 자리를 잡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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