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2013년 5월 말레이시아 총회에서 취임

 

11월 19일 수원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세계화장실협회 이사회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을 했다. 비공개로 속행된 19일 오후의 이사회에서는 신임 이사들의 선임(한국 4명, 외국 2명)과 함께 차기 회장 추천, 이사회 내용 보고, 그 동안의 추진 사업 보고, 네팔 화장실 보급사업 승인, 2013년 총회 준비 논의, 그 동안의 프로젝트 소개, 기술위원회 활동 토의 등으로 이어졌다.

 

화장실 문화 개선 운동의 발원지인 수원에서 개최된 2012년 세계화장실협회 이사회에는, 미국, 러시아, 호주, 몽골, 네팔,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11개국에서 27명이 참석했다.

 

 

세계화장실협회는 화장실 시설의 보급 및 개선, 화장실 관련 기술 및 세계기술 표준 개발·보급, 세계의 화장실 문화 및 시설 실태조사, 홍수 등 세계적 재난 발생 지역에 화장실을 설치하고, 물 절약 및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노력과 수준 높은 화장실 보급 등의 사업을 수행하는 국제기구이다.

 

환송만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 승낙연설

 

19일 오후 5시 30분부터 1시간 동언 비공개로 펼쳐진 세계화장실협회 제5차 정기 이사회를 통해 경제적인 어려움, 불결한 환경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인류의 고통을 덜어 주고, 불결한 화장실 환경을 개선하는 등을 의이했으며, 세계화장실협회 차기 총회와 엑스포는 2013년 5월 경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사회의 일정을 마치고 난 뒤 가진 환송만찬 장에서 조용이 현 회장은 이제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다고 하면서, 염태영 시장에게 차기 회장자리를 넘길 수 있어 고맙다고 인사말을 했다.

 

축사에 나선 차기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에 추대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을 찾아 준 세계화장실협회 이사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세계화장실협회를 잉태시킨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뜻을 이어갈 수 있게 되어 책임이 무겁다고 했다. 또한 조용희 현 회장의 뒤를 이어 세계화장실협회의 무궁한 발전에 기여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해우재문화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밝혀

 

축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세계화장실협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이 30년간이나 살고 있던 집을 변기모양으로 짓고 이름을 ‘해우재’라고 붙였으며, 전 심 시장의 유족들이 그 집을 수원시에 기증을 했고, 수원시는 그 뜻을 받들어 리모댈링을 거쳐 ‘수원시 화장실문화 전시관 해우재’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해우재를 문화공원으로 조성을 하겠다고 했다. 또한 심 전 시장의 뜻을 이어 수원을 화장실 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화장실을 개선하는데도 앞장 설 것을 피력했다. 환송만찬 장에는 심 전 시장의 부인인 선정선(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 회장) 여사와 아들인 심영찬 씨(세계화장실협회 신임 이사)도 참석을 해 박수를 받았다.

 

축사를 마치고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한국의 전통춤인 진도북춤과 장고춤, 소고춤 등을 감상하는 이사진들은, 연신 동영상으로 춤을 촬영하느라 부산한 모습을 보이기도. 제5회 세계화장실협회 정기이사회는 환송만찬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동문인 창룡문 성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은 누가 했으며, 석수는 누구, 그 외에 몇 명이 참여를 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실명제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성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기록을 해 두었다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적힌 기록을 보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 아무개가 언제부터 어디서 일을 했는지, 또 임금은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정조의 애민주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적은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에도 보인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을 한 화성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돌 하나 목재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해 놓았으며, 일일이 그림을 그려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에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도 꼼꼼히 기록을 해 놓았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형태가 여러 가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에 지워져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성벽의 기록으로 보아, 모든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머릿돌에 해당하는 회사명을 적어놓듯, 그렇게 책임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밥숟가락의 숫자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 단청에 들어가는 물감은 물론, 가마니와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등 화성성역의궤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고 적고 있다.  

 

 

 

2달만 일을 하면 초가집을 한 채 살 수 있어

 

정조는 화성 성역을 하면서 각 처에서 올라온 인부들에게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 축성 및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의 축성시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735냥4전3푼이었다. 이 가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게 2만4419냥7전으로 19%, 목수들에게는 1만3381냥으로 10.4%, 대장장이는 1만745냥8전7푼으로 8.3% 등의 순이었다.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 지급한 돈이 11만7520냥 8전7푼이었으며,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561냥5전7푼이 지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817냥8전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와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이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부들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화성이 딴 성과는 달리 치밀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명제와 함께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냥 겉도는 화성이 아니라, 화성을 하나하나 보아가면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 - 181에는 거주하는 조명화(여, 52세) 13통장은, 이제 지동에 보금자리를 튼지 3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족들과 늘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수원의 경치를 감상하고는 했다. 봄이면 연산홍이 붉은 화성을 바라보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진 광교산과 팔달산을 바라보고는 했다.

 

계절마다 변해가는 주변의 경치를 옥상에서 늘 감상하고는 했던 것이다. 가을이면 팔달산을 붉게 타오르게 하는 단풍에 취하고, 겨울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백설의 세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조명화 통장 댁의 옥상은 늘 가족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는 했다. 하기에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옥상음악회’를 선뜻 응낙을 했다.

 

 

도대체 ‘옥상음악회’라니, 놀랍기만

 

조명화 통장은 마을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다. 늘 마을에 누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지동이 더 아름답게 변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옥상음악회의 제의를 받았고, 가족들이 불편함에도 감수를 하고 옥상을 개방하였다.

 

‘옥상음악회’. 남들은 그저 옥상만 개방하면 되는 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옥상음악회는 그것과는 다르다. 우산 주거공간 안으로 많은 외부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생활에 방해를 받는다. 더욱 화장실까지 개방을 하고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였다.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가족들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더욱 학생들이 있어 많이 불편할 텐데도 그것을 감수한 것이다. 매사 남들보다 더 부지런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조명화 통장으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을 감수하고도 행복을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늘 가족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사계절 변화하는 주변공간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는 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 가족만 보아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가 옥상음악회 제의를 받았고, 주민들과 함께 공유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뜻 응낙을 하게 된 것이죠.”

 

올해 벌써 두 번째로 옥상음악회를 치렀다. 2013년에는 봄, 가을 두 번이나 옥상음악회가 잡혀있다. 또 번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명화 통장은 싫은 기색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남들에게 개방을 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노을빛이 아름다워서인가, 옥상음악회의 이름도 ‘노을빛 옥상음악회’라고 했다. 노을빛을 바라보다가 화성에 조명이 들어지면 시작하는 옥상음악회이다. 옥상에 작은 무대를 만들고,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치를 벌인다. 도시형 마을만들기의 롤 모델이기도 한 노을빛 옥상음악회는 순전히 조명화 통장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음악회로 자리를 잡았다.

 

 

지동, 화성,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요즈음 아이들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이런 옥상음악회로 인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불편해 할 수도 있다.

 

“아뇨, 우리 아이들도 다 좋아합니다. 지난번에 화장실로 개방을 한 방은 아이들 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늘 옥상에 올라가죠. 그곳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화성의 야경을 감상하는가 하면, 하늘에 별도 헤어봅니다. 아이들이 자연과 동화가 될 수 있도록요.”

 

그래서인가 아이들도 옥상음악회를 연다고 하면, 무엇 하나라도 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이기에 올곧다는 생각이 든다. 지동과 화성,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 지동을 떠날 수 없었다는 조명화 통장. 앞으로도 얼마든지 옥상을 사용해도 좋다는 그녀의 말에서 작은 감동을 받는다. 늘 그렇게 주민 곁에서 따듯한 마음을 전이시키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이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불입상 1기가 서 있다.

 

미륵불로 조성된 매산리 석불입상.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려 초기의 석불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상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석불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 쓴 사각형의 보개와 비례에 맞지 않는 보관

보개와 보관이 마주하는 부분에도 연꽃문양을 조각해 나름대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이 미륵당의 부처는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모습보다, 오히려 괴이하기까지 한 모습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석불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길게 조성한 눈도 조금은 어색하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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