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답사는 힘이 든다. 발목을 넘는 눈길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여기저기 멍이 들기 때문이다. 용인에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 기흥구 지곡동 615번지에 소재한 사은정. 지난 해 겨울 눈이 쌓였던 사은정의 모습. 당시 사은정의 앞에는 여기저기 고라니가 눈을 끌며 지나간 자국만 남아있었다. 눈이 쌓인 곳을 새롭게 밟고 지나가는 기분도 꽤 좋다. 발밑에서 빠삭거리며 밟히는 눈의 감촉도 한 겨울에 느끼는 재미다.

 

사진을 찍으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미끄러졌는데, 하필 그 밑에 날선 돌이 박혀있다니. 눈물이 난 것만 같은 통증이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할 일은 다했으니, 참 '문화재가 밥 먹여주냐'는 질문이 딱 맞는 듯하다.

 


 

경(耕) 신(薪) 조(釣) 채(菜)의 즐거움을 위한 정자

 

사은정은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즉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낚시질을 하며, 나물을 캔다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사은정은 이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세워진 정자이다. 그리고 네 분의 선조들을 위하여, 후손들이 몇 번을 중수하면서 그 뜻을 기린 정자이기도 하다.

 

처음 사은정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초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은 이유는, 조선조 중종 때의 명현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사현 중 일인인 정암 조광조(1482 ~ 1519), 중종 때의 유학자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임애 이자(1480 ~ 1533) 등이, 도의로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서재를 짓고 방을 드렸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처음에 사은정을 건립하였을 때는 단순한 정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정자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과 198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은정의 현판. 사은정은 1,500년대 초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은정 대청 안편에 걸린 중수기

 

설경(雪景)이 아름다운 사은정

 

용인 정신병원에서 신갈 오거리 길을 비켜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지곡동이 된다. 이 길로 가다가 민속촌이 나타나기 전 우측에 주유소가 있고, 그 옆길로 들어가면 사은정이 있다. 사은정은 민속촌의 옆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흰 눈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국의 정자들은 사계절 언제 찾아가든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사은정 역시 겨울 경치도 아름답다.

 

사은정의 앞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아늑하다. 뒤 야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을 것이다. 그리고 앞의 너른 곳에 밭을 갈아 먹거리를 장만하고, 멀지 않은 내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 하루해를 즐겼을 것이다. 사은정은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네 분의 선조들이 마련한 정자이다.

 

눈에 덮힌 사은정. 눈이 채 녹지 않은 소나무와 기암들이 함께 해 더욱 아름답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우측 한편에 한 칸의 방을 드렸다. 이 방은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새롭게 드렸다.

방을 뒤로 놓고, 앞으로 툇간을 내어 마루를 놓았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사은정

 

겨울에 보는 사은정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사은정은 중앙에 계단을 놓았다. 중앙의 계단은 장대석으로 하였으며, 계단 양 옆이 돌출이 되게 하여 멋을 냈다. 마름모꼴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전면과 측면은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우측으로는 한 칸 방을 드려 겨울철에도 묵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방과 대청을 나란히 놓고, 좌우에 개방된 툇간을 놓았다. 툇간은 본 건물보다 돌출이 되게 구성해 여유를 보인다.

 

정자 대청 위 벽에는 중수기와 중건기가 걸려있다.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대청의 뒤로 낸 판자문이 투박하다. 그렇게 투박하게 낸 판자문이 오히려 우직한 충정을 엿보게 한다. 방 뒤에 높게 솟은 굴뚝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높은 하늘을 따라 오르는 듯 하다. 뒷산을 올려다본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소나무와, 여기저기 솟은 바위들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를 하고 노년을 보냈을 선조들이, 오히려 부럽기만 하다. 지금 우리네들이야 어찌 이런 여유를 느낄 수가 있을까?

 

툇간을 놓고 계자각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대청의 뒤편에 낸 판자문. 뒤켠으로 돌아 본 판자문이 투박하다. 오히려 우직함이 있어 좋다.

 

돌에 부딪쳐 얼얼한 엉덩이를 부비며, 눈길을 밟다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언제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가 있을까? 쌓인 눈이 고맙기만 하다. 봄이 되면 주변에 많은 봄나물들이 돋아 나오려나? 괜한 걱정까지 해가며, 사은정을 멀리한다. (지난 해 겨울 눈이 엄청 쌓인 사은정 모습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 그 안에 구조물 중 하나인 각루란 높은 위치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각루는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에서 성의 안과 밖으로 가장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팔달문에서 남공심돈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며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듯 가팔라지는 성 안에 자리한다. 이곳에 동남각루를 세운 것은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남공심돈과 마주하면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구조물 ‘각루(角樓)

 

화성에는 모두 네 곳에 각루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용연을 바라보고 있는 동북각루이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하여 화성이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답게 지어졌다. 방화수류정은 별도로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답다. 또 하나는 용도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로, ‘화양루’라고도 부른다.

 

서북각루는 가을 철 화성의 억새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화서문의 남쪽 145보 정도 거리에 산 위로 성이 휘어져 굽어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각루들은 모두 정자와 같은 형태로 지어져, 나름의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누(樓)’란 다락처럼 층이 지게 꾸민 것이니,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닌, 정조의 강한 왕권을 상징

 

정조대왕의 효심이야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임을 목격한 정조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묘를 정조 13년인 1789년에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 화산(현 화성 융능)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여 효성을 다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치했다. 당시 장용외영은 실로 막강한 당대 최고의 무사들이었다. 그 무사들이 47,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화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조가 화성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은, 노론벽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양을 벗어나 강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많은 정사를 처리하였으며,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행궁에서 펼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능 행차 시에 화성 행궁에서 머물며 과거시험을 치룬 것을 보아도,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다.

 

동남각루에 보이는 정조의 애민(愛民) 정신

 

동남각루는 화성 내에 있는 군사시설물이다. 높은 곳에 세워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이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동남각루와 마주하며 남수문을 보호하던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서 훼파가 된 뒤 복원을 하지 못하였다. 동남각루가 짝을 잃은 채, 복원이 된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단지 화성의 군사 시설물 중 하나인 동남각루를 보고, 어떻게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아낼 수가 있을까? 동남각루는 중층 누각으로 마련하였다. 정면과 측면 두 칸으로 마련한 동남각루는,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도깨비 그림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한편으로 계단을 놓아 위로 오르게 하고, 밑으로는 삼면을 막고 한편에 문을 달아냈다.

 

그리고 서편으로 연도를 뽑아 굴뚝을 내었으며, 동편에는 이궁이가 보인다. 바로 이 동남각루의 아래층에 온돌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사들이 겨울에도 춥지 않게 하기위하여 온돌방을 드린 것이다. 화성이 시설물들을 보면 이렇게 온돌을 놓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성의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시설물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것은, 그 안에는 단순히 성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심과 강한 왕권을 위한 노력, 그리고 부강한 나라의 건설과 애민정신 등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시설물인 동남각루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경기도 화성시 북양동(주석로 80번길 139)에 소재한 비봉산 봉림사. 봉림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3) 때,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정확한 설은 아니나 만일 전하는 바대로라면, 봉림사는 1,500년이나 지난 고찰이 되는 셈이다.

 

‘비봉사’라는 절 이름도 궁궐에서 기르던 새 한 마리가 이 숲으로 날아들었다고 해서, 산 이름을 ‘비봉산(飛鳳山)’이라 불렀으며 절 이름은 ‘봉림사(鳳林寺)’리고 불렀다는 것이다. 11월 22일 찾아간 봉림사. 일주문을 지나면 양편으로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조금 오르다가 보면 새로 지은 듯한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은 2009년 12월 16일에 현판식을 가졌다.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 봉림사

 

아직 천왕문에는 아무런 조형물이 없다. 위로 조금 오르다가 보니 석물로 만든 금강역사가 계단에 양편으로 서 있다. 그 뒤편에는 아래층은 사천왕각이란 현판이 걸리고, 위편에는 범종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천왕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서 만나는 정면의 극락전은 정면 세 칸의 맞배지붕이다.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98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화성 봉림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 안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 목불좌상으로,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편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체구 역시 단정하면서 건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U자형으로 처리된 가슴에 젖가슴을 불룩하게 표현하고, 통견의 불의에는 띠 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 주름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고려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 뒷산에 보이는 섬뜩한 표시

 

극락전을 나와 좌측을 보니 소대가 아름답다. 소대를 촬영하려고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무엇인가 하여서 자세히 보니 이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지뢰제거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지뢰라는 삼각표시를 한 깃발이 달려있다. 제거는 했지만 완전히 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보니 절 뒤편 산 여러 곳에 이런 표시가 보인다.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봉림사 삼성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1988년 용상스님이 신축하였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렇게 표시를 해 놓아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겠지만, 왜 이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는지 궁금하다.(사진은 일부러 찍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동란 때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으로만 상륙한 것이 아니라, 화성 서신 앞바다로 진격한 UN군들과 이곳에서 접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지뢰를 매설한 것이 누구인가를 알만하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사천왕각을 지나서면 너른 극락전 앞마당에,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은 요사가 있고 우측에는 설법전이 자리한다. 설법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1979년에 조성한 사리를 모셔놓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사리는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을 할 때, 복장물로 나온 것이다. 복장물에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 전기 사이에 각종 경전 8종이 나와 보물 제1095호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1339년에 간행된 목판본인 금강경은 그 크기가 가로 7.3cm, 세로 4.5cm로 담배값보다 적은 크기이다. 이 목판본 금강경은 섬세한 필치로 변상도까지 갖춘 호신용 경전이다. 이 외에도 복장에서는 각종섬유와 곡물병, 사리병, 구슬 등이 함께 발견이 되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

 

 

 

뒷산의 안내표시는 그렇다고 쳐도 초겨울의 봉림사 경내는 그렇게 또 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보물을 안고 있는 천년고찰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뒷산에 대한 대대적인 지뢰제거를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 하나로 인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가끔은 팍팍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이 없는데, 몸이 아프다거나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무엇인가 모를 허전함도 생겨나고요. 그런 날은 괜히 누군가 해질녘이 되면, 전화라도 걸어 한잔하자고 하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바로 어제 같은 날이 그런 날이죠.

 

마침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날도 꾸무럭한데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요. 예전에는 막거리를 잘 마시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아주 좋은 막걸리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막걸리를 아무데서나 팔지 않는다는 것이, 좀 불편하지는 하지만요. 대충 정리를 하고 만나기로 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갖은 양념에 한 냄비 가득한 도루묵 찌개가 단돈 만원입니다

 

항상 정갈한 찬이 마음에 들어

 

수원천 변 화성박물관 길 건너편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은 제가 가장 자주 가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우선은 이 집 주인은 항상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음식솜씨가 또 일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집의 밑반찬은 모든 것을 직접 만듭니다. 그리고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물론 다 좋지만, 이 집을 가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좋은 막걸리가 있고, 안주 값이 딴 곳에 비해 아주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몇 번을 가보아도 늘 정갈한 음식에 싼 가격, 술을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을 때는 참 부담이 없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정갈한 밑반찬(위)과 서비스로 내주는 소머리국입니다. 소머리국에는 수육이 가득합니다

 

착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계절별 음식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71 -1 에 소재한 ‘소머리국밥’집. 이 집의 사장을 우리는 주모(김정희, 여, 55세)라고 부릅니다. 주모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고 있죠. 아름다운 데다가 음식까지 잘하니, 어찌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집은 일석삼조나 됩니다. 바로 음식 값이 정말 저렴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집의 특징은 바로 서비스가 좋다는 점입니다. 국물을 달라고 하면, 수육이 많이 들어간 소머리 진국을 내어 줍니다. 딴 곳에 가면 이것도 7,000 ~ 10,000원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바로 계절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을철에는 전어가 상당히 쌉니다.(이 집만 그렇습니다)

 

 도루묵에 알이 꽉 차 있습니다. 요즈음이 제철이죠

 

요즈음에는 꼼장어와 도루묵찌개, 거기다가 꼬막 등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요즈음이 제철 들인 것들이죠. 어제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해 도루묵찌개를 시켰습니다. 냄비 안에서 맛을 내며 끓고 있는 도루묵찌개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집은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계란찜 하나에도 딴 곳에서는 최하 5,000원입니다. 그런데 이 집은 3,000원입니다. 가오리찜을 딴 곳에서는 12,000 ~ 20,000원 정도 받습니다. 이 집은 6,000원입니다. 이렇게 싼 가격에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코앞에 재래시장에 세 곳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항상 싱싱한 어물을 사용해 멋이 일품입니다.

 

 도루구 하나를 접시에 옮겼습니다. 누르자 알집이 쏟아집니다. 휴대폰으로 찍어 화잘 엉망입니다

 

아무튼 이 집만 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제 세 사람이 먹은 것은 도루묵찌개 한 냄비 10,000원, 계란찜 하나 3,000원에 막걸리 9병입니다. 막걸리는 형평에 의해 딴 집들처럼 3,000원씩을 받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정말 포식을 하고 난 뒤 지불한 돈이 4만원입니다. 거기다가 막걸리 한 병을 또 서비스로 더 마셨지만. 이 집 주모는 늘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집에는 어려운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이랬거나 저랬거나 이 집 이렇게 장사하고도 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아무리 손을 꼽아가며 계산을 해보지만,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장사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 참 이 집에 무슨 화수분이라도 있는 듯합니다. 다음에 수원을 들리시거든 꼭 한 번씩 찾아가 보세요. 애주가들에게는 정말 끝내주는 집입니다.

 

속리산 자락 지하 250m 암반수에서 길어올린 물로 빚는 막걸리입니다. 우리는 이 술만 먹습니다. 탄산을 섞지 않는 술입니다(위) 아래는 이 집의 가격표입니다. 정말 대단히 착한 가격이죠. 요즈음 조금 올린 것들도 딴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 소 : 수원시 남수동 71 -1(수원천 변)

문의전화 : (031) 253 - 6363)

예전에 MBC - TV 프로그램 중에 ‘행복주식회사 10,000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만원의 한계를 극복하는 초특급 프로젝트로, 스타들이 출연을 해 만원으로 한 주간을 버티는 프로그램이었다. 사회에서 돈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연예인들이 출연을 해 재미를 더해 준 프로였다.

 

요즈음 장을 보러나가면,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만원을 들고 장을 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돈의 가치는 하락하고 말았다. 하루에 만원을 갖고 살라고 해도 힘든 지경이다.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이니, 만원의 행복이란 그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목욕을 해라,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한 달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일 년이 행복하려면 새집을 구하라,

일생이 행복하려면 정직하라’

 

라는 말을. 사람들은 적어도 이발을 하고나면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시골 장터에 가도 이발비가 최하 8,000원을 주어야 한다.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만원을 들고 이발을 했다고 하면, 그 다음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을 할까? 그리고 하루를 무엇으로 소일을 할 것인가?

  

사실 요즈음 단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보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하루 종일 소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휴일 날 집안에서 전전긍긍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단 돈 만원으로 과연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가 있을까? 문제는 이발까지 하고 말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 종일 행복해 질 수 있는 곳

 

단 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소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벽화 길로 유명해지고 있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이다. 실제로 11월 25일(일), 단돈 만원을 들고 오전부터 지동을 걷기 시작했다. 지동시장 순대타운 곁에 자리한 주차장 건너편 팔달새마을금고 영천지점에서 미나리광시장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수원식품(수원시 지동 400-8) 옆으로 작은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즐거운 이발’이란 이 집이 바로 이발을 하는데 3,500원이다. 세상에 요즈음 이발료를 3,500원을 받는 곳이 어디 있을까? ‘즐거운 이발’의 주인은 이발경력이 45년이 지났다. 12살 어린나이에 이발소에 취직을 해, 사람들의 머리를 감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요즈음처럼 사람들이 살기가 힘든데, 이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발료를 싸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즐거운 이발소에서는 면도를 해주거나 머리를 감겨주지 않는다. 머리는 본인이 직접 감아야하는데, 머리를 감을 경우 물 값과 수건사용료 500원을 더 내야한다. 그렇게 해도 이발료가 4,000원이다. 아침에 나가 이발을 하고 나니 시간이 점심때가 다 되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옆 못골 시장으로 들어갔다.

 

 

국수 한 그릇 먹고 즐기는 벽화길

 

못골시장 안에는 ‘통큰 칼국수’집이 있다. 이 집에서는 잔치국수는 2,000원, 칼국수는 3,000원이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이발을 하고 점심을 해결하는데 들어간 돈이 7,000원이다. 그리고 칼국수집을 나와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발을 해서 기분이 좋은데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는 바쁠 일이 없다. 어차피 만원을 갖고 하루를 소일해 보려고 나선 길이다.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살피면서 돌아보니, 날마다 달라지고 있는 벽화골목이 행복감을 더해준다. 가다가 다리를 쉴 수 있는 평상 등이 있어 더 좋은 벽화길이다. 벽화 골목길을 돌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벽화골목 구경을 하고 나오는 곳에 핑퐁음악다방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의 향에 취한다. 커피 값이 3,000원이다. 단돈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하루가 행복하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돌아본 ‘지동의 행복’은, 그렇게 만원으로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지동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원으로 즐길 수 있는 행복. 만원으로 이발을 하고, 점심을 먹고, 벽화길 구경하고,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곳. 이곳이 진정한 만원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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