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1792∼1868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다. 이항로 선생은 순종 8년인 1808년에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포기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고종 3년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 전쟁으로 맞설 것을 건의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으며,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는 반대를 하기도 하는 등,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자리한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부친인 이회장 때에 지은 집으로 250여 년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까지 복원을 마친 생가는 노문리 벽계마을의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앞으로는 벽계천을 내다보고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집이다. 이 집은 성리학의 요람으로 최익현, 홍재학, 김평묵, 유중교, 박문일 등 많은 선비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벽계천을 바라보며 학문을 연마한 사랑채

 

사랑채는 대문 우측에 세 칸으로 마련하였다. 마루에 앉으면 벽계천이 바라다 보인다.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사랑채와 대문채, 그리고 사랑채의 뒤로 이어진 행랑채가 있고, 안담장에 난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안채의 뒤편에 낸 광채로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는 대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자리한다. 사랑채는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마루방으로 꾸며졌다. 사대부가의 사랑채치고는 단아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랑채의 앞으로는 모두 툇마루를 내어, 이곳에서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안채의 마루방에 걸려있는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현판은, 이 사랑채에 걸려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선생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다보면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찾아간 이항로 선생의 생가. 큰 길에서 5.5km 정도를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길도 비좁은데 눈까지 쌓여, 차라도 만나면 몇 번이고 후진을 하면서 찾아간 곳이다. 사랑채 마루에 올라앉으니, 마을 전체가 보인다. 아마 제자들과 함께 이 마루에 앉아 강학을 하고, 벽계천 주변에 있는 노산팔경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랑채와 붙어 역 ㄷ 자로 꾸며진 행랑채. 안 담장을 구분으로 안채와 같은 선상에 있다.

기와로 만든 굴뚝. 낮은 굴뚝에게서 스스로 겸손함을 배웠을 것이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붙어있으며, 역 ㄷ 자형의 구성으로 꾸며졌다. 안담과 경계로 구분을 한 행랑채는 ㄱ 자형으로 사랑채와 붙어있다. 행랑채는 두 칸의 방과 꺾인 부분에 헛간을 두고, 다시 방으로 이어진다. 이 꺾인 부분에 들인 두 칸의 헛간은 밖으로도 빗장문을 낸 것으로 보아, 각종 농기구들을 넣어두고 손쉽게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랫사람들의 동선까지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아마 그것이 이항로 선생의 부친 때부터 전해진, 선비의 올곧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행랑채 뒤편에 선 기와로 만든 굴뚝은, 이 집의 딱딱함을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낮게 낸 굴뚝은 항상 모든 일에 겸손하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찬광을 낸 안채의 아름다움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역 ㄱ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은 앞에 툇마루를 냈는데, 양편 툇마루를 벽으로 막았다. 흡사 이 한 칸의 건넌방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넌방 옆으로는 개방한 아궁이를 두었다. 그리고 한 칸의 방을 지나 두 칸의 마루방이 있는데, 툇마루가 안방까지 연결이 된다. 지금은 이 마루방 위에 청화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에 대청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두 칸의 마루방을 꾸몄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넌방. 툇마루 양편이 벽으로 막혀있다. 조금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을 한 듯 하다.

역 ㄱ 자로 꾸민 안채. 모두 열 칸으로 꾸며진 안채. 중간에 두 칸의 마루방을 내었다. 대청이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안방은 꺾인 부분에 드렸는데, 두 칸의 안방에 비해 부엌이 세 칸으로 넓다. 부엌 안으로 들어가면 한 칸이 벽과 판자문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문을 열어보니 현대식으로 싱크대 등을 마련해 놓았다. 아마 이곳을 한옥체험의 공간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원래 이 끝에 달린 막힌 한 칸은 찬광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을 이항로 선생의 생가에는, 그만큼 기물 등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한 칸의 찬광을 드려놓았다.

   

세 칸의 부엌 안에는 담과 판바문으로 구분을 한 찬광이 한 칸 있다.

                   

뒷문을 낸 광채와 대문채

 

안채 뒤편에 마련한 광채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지에서 유일하게 초가로 된 건물이다.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이 된 광채는 우측 맨 끝에 문을 내었다. 문을 열면 바로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집 뒤편에 있는 마을 동산으로 포행을 다녔을 것이다. 네 칸의 광채는 안채 부엌의 뒤편에 있는데, 작은 문과 두 칸의 광, 그리고 한 칸의 측간으로 지어졌다. 담장은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넓지 않은 부지에 많은 건물을 들여서인가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이루어져 공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안채와 마주한 대문채는 광채와 마찬가지로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대문을 들어서 안 담장으로 막혀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 자 형으로 되어 모두 광으로 사용을 했다고 한다.

 

안채 뒤편에 자리한 광채. 광채 끝에는 문이 있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채는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대문채는 판자벽으로 담벼락을 내어 운치를 더했다. 모두 세 칸으로 꾸며졌다.

 

생가 벽계천 주변에 있는 제월대, 명옥정, 분설담, 석문, 쇄취암, 일주암 등, 선생이 직접 친필로 각자를 했다는 노산팔경과 어우러진 집. 날이 춥다는 것을 잊을 만큼 빠져드는 집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항로 선생의 생가. 구불구불 찾아들어가는 집은 한 겨울 찬바람에도 그렇게 의젓하니 객을 맞이하고 있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조령 삼 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수옥폭포. 단원 김홍도가 초대 현감으로 부임하기도 했다는 이곳은 '옥을 씻는다'고 할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명절 연휴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이 폭포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한 겨울의 얼어붙은 수옥폭포
 

사극 다모와 여인천하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수옥폭포는, 지난 해 MBC 대하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여름철에야 폭포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폭포가 꼭 여름에만 아름다울까? 겨울철에 보는 폭포의 모습은 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 모습을 보기위해 설 연휴에 찾아들었다. 여름철 주변 암반과 노송들이 어우러진 폭포는 절경이다. 하지만 설이 지난 명절에 찾는 수옥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줄까?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은 옛 수옥정

 

폭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흥을 돋우고, 겨울이면 빙벽으로 변하는 폭포를 보면서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 수옥정은 바로 그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정자가 처음 지어진 것은 숙종 37년인 1711년이다. 당시 연풍현감 조유수가 청렴했던 삼촌인 동강 조상우를 기려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수옥정(漱玉亭)' 이라 했다. 이는 폭포의 암벽에 적힌 글이 증명을 한단다.

 

물이 언덕에 부딪쳐 흐르는 모습이 옥 같다는 뜻이니, 가히 이곳의 경치와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당시의 수옥정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수옥정은 예전 수옥정이 있던 자리에, 1960년에 팔각정으로 새롭게 꾸몄다. 한 겨울 노송의 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여, 그 무게로 가지들이 적당히 밑으로 처져있다. 엊그제 내린 눈을 치우지 않아 눈을 밟고 걷는 기분이 좋다. 발 밑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이 눈길을 하염없이 밟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이 쌓인 노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수옥정의 겨울정취


오늘의 수옥정은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과 그 틈새로 녹아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노송에 쌓인 눈꽃과 함께 서 있다. 이 수옥정을 조선조에 처음으로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수옥폭포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 수옥폭포가 바라보이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소일했다고 하니. 나름 수옥정의 역사는 오래다. 공민왕이 이곳에 와서 행궁을 지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자 하나 쯤은 지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위 틈 사이에 얼어붙은 고드름

 
신비하고 아름다운 빙벽

 

얼어붙은 수옥폭포의 신비함

 

수옥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밑에서 바라보는 폭포 하나만 갖고도 이렇게 절경이다. 밑에 소는 얼음이 얼어있고, 중간에 바위의 틈새 사이에도 천정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수옥폭포에는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라마 여인천하와 다모, 그리고 최근에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녹기 시작한 얼음이 물이 되어 소리를 내며 폭포 아래로 흐른다. 그 또한 여름 시원한 물줄기와 다른 정취이다. 폭포주변 나무에도 고드름이 달렸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신비한 겨울철의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에 보는 폭포의 신비함. 매번 많은 폭포들을 찾을 때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겨울에 만난 폭포는, 우리가 알지 못한 또 다른 풍광을 맛보게 한다. 아마 이 풍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 다른 수옥정의 모습과 함께.

노익장을 과시하는 기사 분, 아픈 기억이

 

요즈음은 어르신들의 연세에 대해 늘 생각을 하게 된다. 수원 지동의 한 경로당에 가면 어르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예전 같으면 65세라는 연령도 꽤 대우를 받았지만, 지금은 70세도 청춘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인가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목소리들이 상당히 높다.

 

며칠 전인가. 시청에 볼일이 있어 택시를 탔다. 시청까지 간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 기사 분을 뵈니 연세가 상당히 드신 듯하다. 요즈음 들어 연세가 드신 분들이나 여성들이 운전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아서인가 특별히 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 분이 먼저 말을 걸어 온다.

 

 

내 나이 78세인데 아직 청춘이지

 

오늘은 그래도 날이 좀 풀려서 다행이긴 하네요.”

그러게요 올 겨울은 참 유난히도 추운듯합니다

이나저나 벌써 두 시가 넘었는데 큰일이네 아직 4만원도 못 올렸으니

 

하루에 회사에 입금을 시키는 금액이 16만원이 넘는다고 하신다. 그런데 아직 4만원 밖에 못 올렸다고 하는 기사 분. 그 시간까지 아침도 드시지 못했다고 하신다. 아무리 그래도 오후 2시가 넘었는데 아침도 드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장해서 어떻게 운전을 하세요?”

어차피 늦었으니 이제 아침 겸 점심으로 때워야지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제 78세인데 청춘이지 머

 

 

그렇게 청춘이라고 강조를 하시는 어르신. 나이가 먹어 딱히 할 일이 없어 택시가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 취직을 하려고 이력서만 60통 이상을 쓰셨다는 것이다. 겨우 들어간 택시회사. 이틀 일하고 하루 쉬시지 않느냐고 하자, 한 달 계속 일을 하신다고 하신다.

 

난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일을 하지. 남들처럼 이교대로 하면 이것저것 힘이 들어. 그래서 혼자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해

 

그래서 아플 수가 없다고 하신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시는 까닭이라도 있으신가 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쉽게 물을 수가 없다.

 

IMF에 찾아 온 아픔, 얼굴엔 그늘이

 

나도 한 때는 종업원을 60명이나 거느리고 있던 회사를 운영했지. 그러다가 IMF 때 그만 회사가 절단이 나고 말았어. 그 때 중풍이 와서 쓰러졌거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운전을 하세요?”

병을 고치려고 전국을 돌면서 무지 애를 썼지. 지금은 건강해. 점심시간이나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운동을 하거든. 아직도 팔굽혀펴기 30번에, 윗몸 일으키기 50번은 거뜬하거든. 그것이 내가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기도 하고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지켜 가신다고 하신다. 집에 가족들이 안계시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으시다. 아픈 사연이 있으신 것을 참고, 그렇게 운전을 하시면서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이신가 보다.

 

지금은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시죠?”

그럼, 아플 수도 없어. 아파서 쉬려면 하루 입금액을 내고 쉬어야 해. 그래서 난 아프면 절대로 안 돼

너무 무리를 하시면 안 좋을 텐데요?”

그래도 내가 우리 회사 60명 기사 중에서는 항상 일등이야. 그 정도면 청춘 아닌가?”

 

 

끝까지 춘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 아마도 당신 스스로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위로가 되시는 듯도 하다. 그래도 아직 이렇게 건강하게 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과연 나는 이 어르신처럼 그 나이까지 활동을 할 수 있을 가를.

 

차에서 내리면서 어르신께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스스로 청춘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는 어르신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르신 건강하세요. 식사는 꼭 제 때 하시고요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27번지 내동 안골마을에는 햇골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기슭에서 약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는, 동쪽을 향해 바라다보이는 곳에 보물 제1401호인 봉황리마애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다. 5년 전에 찾아깄을 때는 보수 공사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돌아 섰던 곳이다.

 

지난 48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암벽의 높이 약 1.7m 정도 너비 5m 정도 되는 넓다란 바위암벽에 일렬로 불좌상 1구와 공양상, 반가상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마애불상군의 형태는 육안으로 쉽게 판별이 되지 않는다.

 

 

마애여래불과 화불을 알현하다

 

삼국시대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는 이 불상군은 육안으로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만큼 많이 훼손이 되어있다. 암벽의 석질이 약한 것인지 곳곳에 균열이 가고,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군은 정확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옆에 자세한 설명을 한 그림이라도 한 장 붙여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곳 마애불상군으로부터 남쪽으로 벼랑을 따라 50m쯤 가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한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 3.5m, 8m의 바위면에, 높이 2m정도 되게 돋을새김한 주존불인 마애여래좌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무릎도 큼직하게 표현을 해 안정감이 있고, 전체적으로 고식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의 두광에는 높이 34cm 정도의 화불 5구가 둘러서 조각이 되어있어 돋보인다. 앞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큰 내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이곳에서는 목조 가구의 흔적과 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이 되어, 어느 시기엔가 이곳에 전각을 세운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전파되다

 

이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자리한 위치의 선택은, 강을 따라 조형문화의 전파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1978121일에 발견된 것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33일 보물 제1401호로 조정이 되었다.

 

 

현재는 마애불상군이 있는 암벽으로 오르는 철계단을 조성하여 놓았다. 계단을 올라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애불상군은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각각의 크기는 1m 안팎의 이 불상군은, 공양상에서 보이는 고리장식과 띠 등은 삼국시대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이 마애불상들은 많은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이 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발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에도 창동 마애불이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절벽에 조각이 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훼손이 된 마애불의 경우도, 불교의 조형미술이 강을 따라 발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강변에 위치한 문화재들을 좀 더 심도있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성군 간성읍에서 건봉사를 항해 가다가 보면, 해상 2리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개울 건너에 보면 커다란 노송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에 작은 전각 한 동이 보인다. 개울 건너편에는 간성향교 기적비란 돌 표지석 한 기가 서 있다. 간성항교 기적비란 말에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맞배지붕으로 지은 비각을 만난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 각 한 칸으로 지어졌으며, 높이 70cm 정도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올렸다. 내부에는 홍살을 두른 안에 비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가 바로 간성형교 기적비이다. 이 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임진왜란에 성인의 위패를 모신 곳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들이 간성항교로 들이닥쳤다. 왜병들은 간성향교를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향교의 재임이었던 김자발과 박응열 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인의 위패를 거두어 정결한 곳에 봉안을 했다는 것이다. 간성항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병들은 위패를 두 사람이 거두어 간 뒤 간성항교에 불을 질렀다. 전소한 향교는 위패를 피신시켰던 김자발과 박응열의 발의로,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10월에 중건을 시작하여 이듬 해 2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 기적비는 순조 5년인 1805년에 향교 유림인 김, 박 등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비각

 

소나무 두 그루가 전각을 내려다보듯 서 있다. 그 아래 맞배집 한 칸으로 서 있는 비각. 그저 시골 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비각이다. 내 앞에 서 있는 향교 기적비란 표지석이 아니라면 누구의 열부각이나 효자각 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면서도 그리 생각이 들어 들리지 않았던 곳이다.

 

새삼스레 세워 놓은 표지석 하나 때문에 이 비각의 남다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니. 더구나 지정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홀대를 하고 지나쳤던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매번 떠들어대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는 지정, 비지정, 혹은 그 품격을 갖고 논하지 말라던 나였기 때문이다.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

 

비각은 단출하다. 정면과 측면 한 칸이지만, 정면이 측면보다 약간 넓게 조성하였다. 홍살을 띤 안에는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의 대좌와 머리에 놓은 개석은 화강암으로 하였으며, 개석의 앞뒤로는 당초문과 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몸돌은 섬록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는 142cm이다. 붉은색의 비문으로 써 있는데, 비문은 영의정이던 이병모가 찬하고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후기의 문신인 서영보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니, 당대 최고의 명필이 글을 쓴 셈이다. 글을 전각한 것은 유한지이다.

 

그저 모르고 지나쳤던 비각 하나.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작은 비 하나에도 큰 뜻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건봉사의 문화재를 답사하러 가다가 만난 이 비 하나로, 다시 한 번 문화재답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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