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소재한 흑석사.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사찰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흑석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1945년부터 새롭게 중창을 하고 있다. 흑석사는 국보인 목조아미타불 좌상, 보물인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문화재자료인 마애삼존불 등이 있는 절이다.

 

현재 불사 중에 있는 흑석사는 극락전에는 목조아미타불이, 그리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마애삼존불과 그 앞에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절 안에 모셔진 부처님들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부처님이 답답하시겠네

 

흑석사 경내를 들어서면 마애불로 오르기 전 좌측에 극락전이 있다. 이 극락전 주위에는 석물들이 있고, 극락전 안에는 국보 제282호인 목조아미타불이 유리 안에 모셔져 있다. 이 목조아미타불의 안에서 발견된 복장유물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아미타불은, 조선조 세조 4년인 1458년에 왕실과 종친들의 시주로 조성된 삼존불 중 한분임이 밝혀졌다. 이 목조아미타불이 처음 있었던 사찰도 흑석사가 아니고, 정암사 법천사라는 것도 복장유물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극락전에 모셔진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불. 1458년에 왕실과 종친들의 시주로 조성된 삼존불 중 한분이다.


국보를 만나는 마음은 조금은 다른 것 같다. 전문가가 아니니 국보와 보물의 차이점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복장유물, 보존상태, 전체적인 형태의 생김새, 희귀성 등을 고려한다면 이 석조아미타불은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조불상의 하나로 평가를 받는 이 목조아미타불은, 높이 72cm, 어깨 폭이 29cm, 무릎 폭 50cm이다. 바라다만 보아도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낀다.

 

조금은 수척한 듯한 안면과 단아한 모습에서, 그저 알기 쉬운 부처님의 미소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절을 한 후 올려다본 석조아미타불의 모습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따듯함이 배어나오게 만든다. 한참이나 앞에 앉아 마음속으로 간구를 하다가 문득 부처님이 답답하실 것이란 생각을 한다.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꼭 저렇게 유리 상자 안에 가두어 놓았어야 할까? 조금은 마음이 편치가 않다.

 

  
보물인 석조여래좌상과 문화재자료인 마애삼존불을 모셔놓은 전각

 

높은 곳에서 중생을 바라보는 석불과 마애불

 

극락전을 나와 조금 위에 있는 전각으로 향한다. 축대를 쌓고 높다라니 모셔진 마애불과 석불이 함께 좌정하고 계시다. 보물 제681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흑석사 주변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마애불 잎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앞에 문화재 안내판이 없었다면, 아마 이 석불이 근자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인지. 아무리 열심히 답사를 하고 배워보지만, 그저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늘 아쉬운 부분이다.

 

  
보물 제681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160cm, 어깨 폭 80cm, 무릎 폭 90cm로 전체적인 표현이 안정감이 있다. 이 좌상의 뒤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커다란 자연 바위에 새긴 이 마애삼존불은 입상으로, 중앙의 본존불과 앙편에 협시불을 모셨다. 그런데 이 삼존불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본존불은 가슴 이하, 협시불은 목 부분 이하를 조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자연바위에 조각한 마애불의 앞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한다

  
마애불의 상단부분.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애불을 제외하고는 제 자리를 벗어난 부처님들. 세상에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 했던가? 어디에나 부처님이 계시고, 어느 때나 불공을 드리라는 소리인지. 이 흑석사에 모셔진 부처님들이 모두 문화재라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그리고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사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뿐이다.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흑석사의 부처님들은, 오늘도 세상을 자기 아집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측은함으로 보고 있지나 않을까? 흑석사를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게 한다. 난 과연 인간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서.

사자란 갈기를 세우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사자가 아니라 모나지 않은 얼굴로, 네발을 딛고 상체를 세운 체 앉아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친근감이 든다.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홍천읍사무소 앞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540호인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의 모습이다.

 

이 탑은 원래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이었으나,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탑이라 부르고 있다. 사사자탑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제천 빈신사지 사사자 삼층석탑과 경남 한안군 주리사의 탑 등이 유명하다.

 

 

뛰어나지 않고, 소박한 사사자탑

 

홍천 희망리의 사사자 삼층석탑은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이 탑이 고려시대의 석탑이라는 특징이 잘 담겨 있다. 위층의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한 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태가 사사자 삼층석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사방을 비스듬히 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다. 아랫면에는 무엇인가 놓여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고 있던 석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층 기단에 놓인 네 마리의 사자는, 많이 마모가 되어서인지 모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한 모습이다.

 

 

강원지역 고려 탑의 형태를 구루 갖춰

 

아래 기단이 네 마리의 사자를 표현하느라 넓게 자리한데 비해, 탑신부는 좁게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치켜져 올렸으며,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만 남아 있다.

 

몸돌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다. 세월이 흘러 닳은 흔적이 보이지만, 대체로 원래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탑이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네 마리의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 후기 강원지역 석탑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

 

 

사사자의 중앙에 있던 석불은?

 

49일 오후 6시가 다되어서 홍천읍에 도착을 했다. 마음이 바쁜 탓에 아는 길도 이리저리 돌아야 하다니. 늦은 시간 답사는 괜히 사람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든다. 그래도 겨울보다는 해가 한결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은 느긋하다.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아쉬운 점은, 바로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고 있던 무엇이다. 그 중앙에 보면 자국이 나 있는데, 도대체 어떤 석불을 모셨던 것일까? 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아마도 지장보살을 그 안에 모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탑의 주인이 된다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중앙에 모셔졌던 석불. 앞으로 이 사사자 삼층석탑을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안에 혹 네 마리의 사자가 호위를 하던 석불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으려는지. 온전치 못한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늘 가슴 한편이 허전하다.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 성문지 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 의 성문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있다

성문지 위에 누각이 소실되 구멍이 뜷려있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면 사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짜장스님인 남원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이 작은 사고로 인해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신대도 불구하고 남원 선원사의 스님짜장 봉사는 그칠 줄을 모른다. 이미 약속을 해 놓은 일정이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허전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운천스님 스스로가 세워놓은 약속이기도 하다.

 

제가 없다고 해서 봉사를 그칠 수는 없으니까요. 다행히 그동안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짜장 봉사를 함께해 온 많은 분들이 모두 일급 요리사들이 되어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만은 항상 스님짜장을 봉사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가끔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운천스님의 봉사에 대한 마음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약속이란 지킬 때 아름다운 것

 

127()에는 익산시 여산에 소재한 부사관학교에서 300명의 생도들에게 스님짜장을 급식하기로 약속을 한 날이다. 그 전날 경기도 일대의 봉사를 마치고 26일에 남원으로 내려가 준비를 하고, 일요일에 부사관학교 봉사를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원사 봉사단과 지구촌공생회(이사장 월주 대종사) 회원들이 함께 참여를 해 봉사자가 1명 정도가 부산관학교 스님짜장 봉사를 도왔다는 것. 한 달에 한 번 생도들에게 스님짜장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새해 첫 달부터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스님짜장을 먹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생도들인데, 제가 못 간다고 해서 약송을 어기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다행히 지구촌공생회에서 봉사를 함께 해 주겠다고 해서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희 선원사 봉사단이야 이미 짜장을 만드는 대는 도사들이니까요

 

참 병원에 있으면서도 짜장 봉사 걱정을 하는 이 스님, 어떻게 말릴 수가 있을까 싶다. 운천스님은 아무리 하찮은 약속이라도 한번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기틀이라는 것.

 

 

300명이 500인 분을 해치워

 

그날 봉사를 함께하지 못해 미안스럽다는 스님은 짜장봉사를 마친 봉사단들과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을 묻는다. 짜장은 맛이 있었는지, 혹 부족한 것은 없었는지 등.

 

눈이 내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선원사 봉사단으로 참여를 한 성민정(, 45. 남원시 금동 휴먼시아)은 그날 분위기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날 저희가 여산 부산관학교 생도 300명에게 스님짜장을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500인분이 모자랐어요. 봉사자들은 스님짜장 구경도 못하고 국수를 삶아먹었어요.”

 

이럴 정도였는데 자신이 다쳤다고 해서 약속을 어겼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을 해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스님짜장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짜장스님. 막말로 개콘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이건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한다.”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574에 소재한 용흥사. 용구산에 자리한 용흥사는 서기 384년인 백제 침류왕 1년에 인도승 마라타 존자가 초암을 지어, 5차에 걸쳐 중창과 복원은 한 사찰이다. 용흥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가 된 것을, 일옥 진묵대사의 발원으로 응중, 쌍인, 혜증대사가 20여 년 간의 대 역사로 48동을 중창하였다.

 

용흥사는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영조가 탄생하였다고도 한다. 영조가 즉위를 한 후에는 일체의 세금을 감해주고, 원래의 이름인 몽성사를 임금과 나라를 위한다는 뜻인 용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용흥사는 한일합방 직전 48동이 거의 전소되다시피 한 것을, 모정선사가 1930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11동을 복원하였으나, 19501229일 불행하게도 아군에 의해 완전히 전소가 되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절 용흥사

 

순창, 담양군의 문화재 답사를 하던 날 용흥사에 들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아마도 한때는 이 일대에도 많은 전각들이 서 있었을 것이다. 계단으로 오르니 전각들이 보인다. 대웅전을 향하다가 좌측을 보니 작은 전각 하나가 서 있다.

 

 

한 평 남짓하게 지어진 산신각이다. 옆에는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산신각에 드는 햇볕을 가리고 있다. 저리도 혼자 서 있는 산신각을 동무하느라, 그렇게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는가보다. 왜 이 절은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거 그 화려했던 호남제일의 가람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몇 동 안 되는 전각들이 듬성듬성 자리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용뉴에는 힘찬 네 마리의 용이

 

대웅전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동종. 보물 제1555호로 지정이 된 이 종은, ‘순치원년명 동종으로 불린다. 그것은 이 종을 만든 연대가 순치 원년인 1644년이기 때문이다. 높이가 102인 이 종은 조선시대 주종장 김용암이 주가 되어, 인조 22년인 1644년에 주성한 종이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은 규모도 비교적 클 뿐만 아니라, 비례감과 조형성이 뛰어나다. 종을 붙들고 있는 용뉴는 일반적인 범종들이 쌍룡으로 조형을 하는데 비해, 활력이 넘치는 네 마리의 용을 채용하였으며 음관을 생략한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종신에 시문된 각종 문양의 표현도 범상치가 않다. 종신에는 인동당초문,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다.

 

범종은 중앙 윗부분에 4개의 유곽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의 유두를 표출하였다. 유곽사이로는 전후좌우로 두광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겼으며, 상대에는 두 줄의 가로줄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그 중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라 명문 한 글씨가 보인다.

 

 

종의 밑면에는 굵은 두 줄의 가로줄을 두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였다. 뛰어난 용의 모습은 3개의 발톱과 입에서 불을 내뿜는 불꽃무늬를 조성하였다. 몸체 중앙부에는 형의 4각 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 사월일 창평현 용구산 용구사 신주종기(順治元年 四月日 昌平縣 龍龜山 龍龜寺 新鑄鐘記)……라는 명문이 표기되어 있다.

 

하나의 종을 만들면서도 이렇게 정성을 다한 선인들. 그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우리 것에 대해 지독히도 무관심한 사람들. 아마도 이곳 용흥사가 이렇게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러한 선인들의 예술혼을 미처 깨닫지 못한 후손에 대한 서운함인가 보다. 뒤돌아 나오는 발길이 무거운 것도,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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