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까? 단지 건물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일까? 담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등으로 사용하며,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 담 중에서 간단하게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나, 안이 들여다보이게 만든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우리 소리에 보면 ‘울도 담도 없는 곳에...’ 라는 노래가사가 있다. 이렇게 울과 담은 그 형태에서 구분이 지어진다. 아마도 양반가의 높은 벽은 ‘담’으로, 민초들의 낮은 울타리는 ‘울’ 생각하면 맞는 뜻일 것이다.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 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경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와담 등 담은 그 재료를 무엇으로 사용했는가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 과연 경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담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사람들이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한 설치물로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물론 그 말이 맞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담과 울은 엄연히 다르다. 담은 경계를 가르고 안을 보호하지만, 울은 굳이 경계를 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은 경계를 나누고 보호를 위한 것이지만, 울은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울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울과 가진 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 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 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울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 집으로, 또 그 다음 집으로 울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 자들이다. 가진 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과 ‘울’의 철학이다.


(주)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송고가 되었던 것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눈을 감은 맹인이 산통 대신 손에 대추알을 잡고 흔든다. 점을 보아준다는 것이다. 굿판에 아닌 대문간에 앉아 장고잽이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재담이 일품이다. 그것 하나만 갖고도 책 한권은 넉넉히 나올 것만 같다.

“이보 오늘 점이나 한 번 보시려우”
“점은 머 할라고 봐요. 눈도 못 보는 양반이 점인들 잘 볼 수 있겠수”
“이보셔, 내가 이래도 장안에 제일가는 점바치여“
“그걸 누가 안답디까?”


경기도 안택굿의 뒷전은 해학의 극치

경기도 안택굿에서 뒷전은 재담의 극치를 보인다. 뒷전은 굿판에 모여든 각종 잡귀들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굿거리이다. 굿판에는 항상 무속신을 따라 다니는 많은 잡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잡귀들은 신령들을 다 돌려보낸 후에도 굿청에 남아 집안을 소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 뒷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많은 잡귀들을 한바탕 흥겹게 놀고 보내지 않으면 집안에 탈이 난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의 '뒷전거리'는 타 지역의 굿에서는 볼 수 없는 재담과 해학이 넘친다. 무격이 지팡이를 들고 온다. 맹인굿을 하는 광경이다.


과거에는 밤새 굿을 하고나면 뒷전무당이 아침에 장고재이를 데리고 굿판에 나타난다. 뒷전무당은 각 거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뒷전만 맡아하기 때문이다. 이 뒷전무당의 존재는 그 굿판을 좌우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사람들은 일부러 뒷전무당에게 줄 돈을 쓰지 않고 간수를 할 정도였다고 하니, 뒷전 무당의 입담이 얼마나 좋은지 알만하다. 뒷전무당은 굿청이 아닌 대문간에 마련한 뒷전 상 앞에서 굿을 한다. 평복에 지팡이를 들고 하기도 하고, 고작해야 무구라는 것은 부채와 방울을 사용 할뿐이다. 뒷전무당이 맹인 굿을 할 때쯤 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뒷전을 하는 곳으로 몰려든다. 맹인 굿에서 산통 대신 성냥 통을 흔들어대며 주는 점사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담이 뛰어난 안택굿판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안택굿판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가 있고,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점 한 자리 봐 주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뒷전을 하는 무격을 바라보다가 배를 잡는다. 하는 표정과 재담이 어느 코미디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굿판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더하다보니 사람들이 발길을 떼지 못한다.

“나도 점 한 자리 봐 주소”

굿판 구경을 하던 구경꾼이 한 수 거둔다.

“점은 무엇하러 보시려고 하슈. 봐 봤자 뻔한 것을”
“무엇이 뻔하다는 것이요”
‘뻔하잖우. 당신이 남자인데 그걸 제대로 하겠수, 아니면 돈을 잘 벌어다 주겠수. 그저 이것도 저것도 다 부족한데 점괘라고 잘 나오겠수“
“아니 내가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우”
“떡 하면 삼천리라고, 복채도 안내고 점을 보자는 양반인데 먼 재주가 있겠우”


맹인 굿을 하는 고성주씨가 산통 대신 대추를 손에 잡고 흔들며 점을 본다.(위) 맹인 굿을 마치고 난 뒤 끝으로 수비영산을 노는 모습. 수비 영산은 못 먹고 헐벗은 잡귀들이다.


사람들이 ‘맞다’를 연발하면서 웃는다. 점을 보아 다라라는 사람도 떠날 갈 듯 웃어댄다. 그저 재미로 하는 농지꺼리들이다. 이렇게 밤을 새운 굿판이다. 밤새 웃고, 떠들고, 마시고, 소리하고. 그런 굿판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다. 그래서 굿판을 ‘열린 축제의 장’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뒷전거리’ 하나만 갖고도 예술적인 가치를 보이는 경기도 안택굿판. 언제쯤 다시 볼 수가 있으려는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 부었다. ‘비가 왔다’는 말은 이제는 옛 이야기이다. 이제는 ‘왔다’ 혹은 ‘내렸다’ 보다는 ‘쏟아 부었다’라는 말이 맞을 듯하다. 단 2~3일 만에 반년 동안 올 비가 왔다는 것이다. 기상이변이라고 애써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속으로는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인지를.

그렇게 한 편에서 쏟아 붓고 있는데, 한 편에선 이마가 까질 정도의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참 이 좁은 나라에서도 이젠 점점 이변이 생기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 쏟은 후에는 불볕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세상을 ‘감(感)’ 으로 아신다. 올 여름은 더위가 예년보다 길 것이란 것을.


여름피서, 폭포를 찾아가는 보았나?

여름철에 만나는 폭포. 아마 이런 폭포보다 더 좋은 피서지는 없을 듯하다. 우선 폭포라는 곳을 가면, 물이 떨어지는 그 소리 하나 만으로도 압권이다. 벌써 그 물소리가 다르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면서 주변으로 튀는 물방울들이 사람을 속 시원히 만든다. 세상에서 찌든 몸과 마음의 때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듯하다.

그래서 여름피서는 복잡하지 않아 좋고, 시끄럽지 않아 좋은 폭포가 제격이란 생각이다. 전국에는 수많은 폭포가 있지만, 그 중 힘들지 않게 찾아갈 수 있는 폭포를 소개한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좋다.

소금강
강릉 소금강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금강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수도 없이 많은 크고작은 무명의 폭포들이 줄 지어 있다. 물 맑기로 유명한 소금강. 아이들과 함께 찾아 폭포를 세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태백 미인폭포
폭포가 마치 미인의 몸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내려가면 미인폭포가 보인다. 까마득한 폭포 주변으로는 괴이한 돌이 붙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구례 수락폭포
도착하면 금방이라도 판소리 한 바탕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여름이 되면 명창이 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폭포독공에 힘을 쓰는 곳. 피서도 하고 소리도 듣고.

지리산 구룡폭포
남원에 있는 구룡폭포. 길 밑에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만날 수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가 있는 곳이다.

양구 팔랑폭포
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한 팔랑폭포. 작은 폭포가 아기자기 하다. 앞으로는 소가 있고, 주변에 나무 숲길이 있어 좋다.

양산 홍룡폭포
양산 홍룡폭포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만한 곳이다. '척판구중'의 일화가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찾으면 고사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줄 수가 있다.

영주 희방폭포
희방사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폭포이다. 폭포 옆으로 희방사를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폭포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완주 위봉폭포
위봉폭포 주변으로는 위봉산성과 위봉사, 그리고 폭포를 가기 전 송광사 등이 있는 곳이다. 위봉폭포를 찾아들어가다가 만나는 아름다운 길은 시골 길의 듬뿍 느낄 수가 있다.

폭포는 많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근접하기 좋은 곳으로 소개를 한다. 올 여름은 폭포에서 더위를 피해보자. 이보다 더 좋은 피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남겨 줄 수가 있으니까

우리 고사에 보면
'모사재인 성사재천(
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일을 만드는 것은 사람에 달렸고, 일을 성공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말이다.

왜 갑자기 이 말이 생각이 난 것일까?
며칠간 쏟아진 비로 온 나라가 난리다.
순식간에 쏟아진 비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감당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손쓸 겨를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감당하기란 녹녹치가 않다.


어제 저녁 지인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강남에 있는 연습실에 물이 차 악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참 운도 없는 분이란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그것도 어렵게 마련한 연습실이다. 거기다가 최근에 비싼 돈을 들여 악기까지 새로 구입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모두 물에 젖어 하나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그 안에 자신이 피땀흘려 쌓아 놓은, 그동안의 노력을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다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보니 하늘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하늘인들 그러고 싶었을까? 난 그 하늘을 보고 원망을 할 수가 없다. 바로 위에 적은 말이 생각이 나서이다. 일은 인간이 벌린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바로 하늘이 그 일을 허락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하늘에, 그리고 자연에 우리가 할 도리를 다 한 것일까?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만 한다. 그 겸손함이 자연이 우리에게 준 많은 것들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강한 동물이 아니다. 단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지, 자연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인간들이 만든 인위적인 믾은 것들. 결국 그런 것들이 이번 참사에 일조를 하지는 않았을까? 일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는 선조들의 가르침. 우리는 무지하게도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자연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저 위 산성이 지금은 비록 보수를 했지만, 몇 백년을 저렇게 버티고 있었던 것은 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쌓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다. 인간이 일을 벌리기 전에 먼저 하늘의 뜻을 알아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자연이 이리 노한 것인지, 반성을 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쪽지’라는 기능이 있다.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간단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생전 열어보지도 않던 것을 열었더니 쪽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개의 쪽지 중 하나는 맛있는 고기 집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문화재청 영상팀이라는 곳에서 나를 촬영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모습과 문화재 글을 쓰는 것 등을. 그래서 전화번호를 남겼다, 다음 날 목소리가 예쁜 작가 분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나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보니 벌써 문화재 답사를 한답시고 전국을 내 집 안반처럼 돌아다닌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다. 남들 같으면 지겨워서 하라고 해도 안 할 그런 세월이다. 그런대도 아직 난 여기 길 위에 서 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리 길 위로 내 몰고 있는 것일까?

‘잘 되면 내 탓이고, 잘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듯, 이런 역마살도 다 조상 탓이려나. 요즈음은 점점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며칠 씩 걷고(길), 오르고(산) 하면서도 다음 날 새벽 같이 다시 길을 나서고는 했는데, 이젠 그렇게 다닐 수가 없다. 현저하게 체력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격려를 보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직 ‘청춘’이라고 고함을 치는 나이기에, 이런 쪽지나 댓글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른 길을 나서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생각해보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아마도 ‘운명’이란 말을 쓰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문화재 답사를 해야 하는 일이.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백점인 나라로 만들고 싶어

‘빵점’. 내가 늘 우리 국민의 수준을 물으면 주는 문화재에 대한 점수이다. 물론 전 국민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아래 점수를 주고도 싶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 눈에 빠지면, 더위에 지치며, 왜 그 짓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 짓’이란 단어를 쓸 만큼 내가 한심해 보였기 때문인가 보다.

난 다시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 짓 한 번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아직 한 번도 같이 해보겠다고 대답을 한 사람은 없다. 아니 딱 한 분 계셨다. 단 하루 만에 소리 없이 사라지셨지만. 그만큼 이 일이 힘들었나 보다. 하기야 돈 버리고, 시간 뺐기고, 힘든 일인데, 누기 이런 일을 좋아할까?

이 무더위에도,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물 폭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도, 난 길에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국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100점’짜리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혼자 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모든 국민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된다면, 아마 그 때는 나도 길거리로 나가는 일을 접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 정말 말로만 소중하다고 하실 건가요?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치욕적이지만 외국에 강탈당한 문화재 하나가 돌아오면 생난리를 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이런 것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수준이다.

‘이제는 솔직히 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쉬는 동안, 누군가 우리 문화재를 발로 걷어차고 갈지도 모르다’라는 생각이다. 며칠 전 들린 통도사에서 부모에게 투정을 버리던 한 아이가 당간을 발로 차듯. 그 옆에 부모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고. 그래서 ‘오늘도 안녕’한가를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20년간 줄기차게 돌아다녔더니, 이런 날도 있다. 하게 될지는 몰라도 자주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면 하긴 하나보다. 또 글거리 하나 늘어 좋겠다고 하실 벗님들. 나 이러고 산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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