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마애불 답사이다. 대개는 산 위에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갂아지른 바위벽에 있기도 하다. 강가를 내려다보고 있는가 하면, 들판에 솟아 난 바위덩어리에도 다소곳 자리를 하고 계시다. 어느 곳에 있어야 한다고 설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당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애불을 답사하는 날은 마음 가짐을 달리한다. 때에 따라서는 몇 시간을 산 길을 걸어 올라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날이 무더운 날은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만날 수 조차 없는 경우도 생긴다. 미리 겁을 먹고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조성한 불심은?

마애불이란 커다란 암벽에 불상을 새겨 넣은 것을 말한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단순히 선으로 그어 불상을 새긴 '선각'도 있지만, 부분을 돋을새김을 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안으로 파 들어가면서 부조로 새겨 넣은 것들도 있어 다양하다.

그런데 마애불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다. 과연 기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그 당시에, 어떻게 저렇게 높은 바위에 조각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몇 년이 걸렸을지, 아니면 평생을 그 바위벽에 붙어 지냈을지도 모르는 것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이다. '무슨 연유로 마애불을 조각하였을까?'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면, 그저 가장 편안한 답이 '불심'이다. 딱히 그 이상의 어떤 답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높은 산 위 절벽에 달라붙어 혼자서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과연 불가사의일까?

마애불을 답사하다가 보면 궁금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과연 마애불을 어떻게 조성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마애불을 보아가면서 그 궁금증을 생각해 본다. 


함안 방어산 마애불이다. 방어산 날망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앞으로 평평한 곳이 있지만, 이 마애불을 조성할 때도 그러했을까? 방어산 마애불을 보면서 가장 궁금한 것은, 이 산꼭대기에서 과연 무엇을 먹고 오랜시간 작업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떻게 살았을까?


천안 삼태리 마애불이다. 저녁 햇살이 비치면 그 은은한 미소가 아름답다. 큰 바위면에 조각을 한 이 마애불을 보면서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하는 점이다. 흙을 바위 끝까지 쌓아놓고, 그 흙을 치우면서 조각을 해서 내려왔을까? 아니면 나뭇단을 쌓아 놓고 조각을 하면서 내려왔을까? 그도 아니면 줄을 걸어 앉을 수 있도록 하고 점차 길게 늘이면서 내려왔을까?    


충주 창동 마애불이다.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 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애불을 내려가는 길은 계단을 놓았어도 지금도 무척 가파르다. 이 거대마애불을 조각한 사람은 어떻게 한 것일까? 당시는 강물이 더 수심이 깊고, 아마 바위면까지 물이 차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작업을 한 것일까? 배 위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대체 그 당시에 어떤 방법을 썼을까?

마애불 조성에 관한 답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해답은 마애불 조성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이다.

마애불에는 이런 전설이 주로 전한다. 어느 고승이 하루 밤 사이에 손가락으로 마애불을 조성했다. 그런데 그 고승 정도의 인물이라면 공중부양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 전설대로라면 가능하다. 어느 마애불은 단 며칠 만에 조각을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높은 바위에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누구의 도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런 경우 관음보살이 나타나거나, 신중들이 나타나 도움을 준다. 이렇게 마애불의 조성에 관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현재의 장비를 갖고도 조성을 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거대 마애불 들. 과연 그 해답은 없는 것일까?

또한 그 깊은 산중에서 무엇을 먹고 생명을 유지했을까? 그 해답은 화수분처럼 누군가 먹을 것을 늘 곁에 두고 갔다고 한다. 또한 호랑이가 아침엔 데려다 주고, 밤에되면 집으로 데려다 주고는 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호랑이답다.

이렇게 마애불의 조성에 관해서는 많은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에 그 해답은 무엇일까? 더 많은 마애불을 찾아 다닌다면, 혹 해답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불가사의라고 단정 짓고, 편안하게 올 여름을 보낼까? 또 하나의 고민꺼리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쓰려고 보니 얼라 화면이 좀 이상하네 그랴. 먼 일인고 싶어 살펴보니 그나마 유일하게 붙이고 있는 <애드박스>가 보이질 않는다.
항상 애드박스를 생각해 글을 맞추어 쓰는 나로서는 휑하니 비워버린 박스 자리 때문에 글이 위로 올라가 붙어있다. 이건 머시라. 혹 간 밤에 실수라도 해서 해지를 한 것일까?

관리지 화면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아니란다. 애드박스는 <노출중>이라는 것이다.
혹 전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나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더니, 딴 분들은 다 있다.
그렇다면 내것만 사라졌다는 것인데... 누가 들고 갔을까?
얼른 돌려 놓으소. 글이 이상해 지누만... 

사라진 애드박스

노출되고 있다는데, 내 애드박스는 오데로 갔을꼬? 날 더운디.....혼자 답사 나갔을꼬?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처음으로 집을 지은 해수로 따지면 226년이 되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에는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외측이라는 건물과, 담 밖으로 지은 초가인 노비들이 묵는 '호지 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고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축미를 보인다는 정읍 김동수 가옥 사랑채 

부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고택 답사를 하다가 만난 김동수 가옥.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고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곳곳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이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동수 가옥 담 밖에 여덟채가 담장을 둘러 있었다고 하는 호지집.

노비가 살던 집이라고, 글쎄 그럴까?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를 본다면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또한 이 집들의 자리 배치를 보아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맞지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은 부농의 상징이다.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보면 인근에 곡창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이 집 안에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볼 수가 있다. 그만큼 많은 재물들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집안에 대문채나 중문채에도 방들이 있어, 굳이 담 밖인 외부에 몇 채의 집을 지어, 노비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는 것도 설들력이 부족하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와, 대문채와 중문채 사이 한편에 자리한 외측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도적을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사병들을 기거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하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던 사병들이 묵었다고 볼 수 있다. 사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금지가 되어있는 시대에, 대신 노비라고 신분을 숨겼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느닷없이 문화재를 찍고 있는데,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의 질문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나더러 참 답답하다고 한다. 무엇이 녀석이 보기에 그리 답답해 보인 것일까?

“왜 문화재 블로거를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야?”
“형님도 생각해 보세요. 드라마 평이나 가수 이야기나 쓰면 편할 것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문화재 이야기를 무엇하러 쓰세요. 이 더위에 왜 고생을 하면서 이렇게 문화재를 찍어대는지 원”
“그럼 이런 거 하지 말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편히 사시라는 거요”

이렇게 오래 묵은 나무는 상처를 입고도 버티고 있다. 저 나무의 끈기를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답답하다. 정말로

하긴 그렇다. 이것이 무슨 돈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과 돈, 그리고 체력까지 고갈이 되어가면서 땀을 흘리고 있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하기는 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글을 쓴지는 오래되었다. 방안 가득한 CD와 외장하드. 그 안에는 전국을 계절 없이 찾아다니면서 찍어 놓은 자료들이 그득하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저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지 않느냐?’고 한다. 절대 아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배가 부르기는커녕 더욱 고파진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저렇게 자료를 모으느라 그동안 길에 쏟아 부은 돈이 아마도 수억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한 달 동안 땀 흘려 돈을 받기가 무섭게 길에 나가 쏟아 부었으니, 참 내가 생각해도 답답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해야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수원에 사는 아우 녀석이 스포츠 마사지를 한 번 받아보라고 한다. 생전 그런 것을 받아 본 기억도 없다. 처음에는 더운데 무엇 하러 그런 것을 하느냐고 했다가, 몸이 안 좋으니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스포츠 마사지를 하시던 분이 한 마디 하신다. ‘어떻게 이렇게 몸을 혹사를 시켰느냐’는 것이다.

"아마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쉬는 날마다 더운데도 나가서 돌아다녀서 그런가 보네요.“
“그런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아직은 쉴 때가 아니란 생각입니다. 다닐 수 있을 때 좀 더 다니려고요.”
“그러다가 큰일 납니다. 돈도 좋지만 몸 생각부터 좀 하세요”
“.... ”

딱히 할 말이 없다. 알고 보면 좀 오랫동안 정말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가 문화재를 찾아 헤매고 돌아쳤으니. 그래도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이나 돌아다녔나 싶기도 하다. 마음이 바빠서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다.

여유가 조금 생기면 하루라도 더 답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으니, 몸에다가 무슨 투자를 할 것인가? 생활이 찌든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다. 신발 하나를 사면 그것이 다 헤어져 너덜거려야, 신발을 살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젠 좀 쉬고 싶기도 하다.

아우 녀석의 볼멘소리가 듣기 싫지가 않다. 예전 같으면 별 말을 다한다고 핀잔이라도 주었을 텐데. 이젠 오히려 그런 말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보면, 나이가 먹긴 먹었나 보다. 더구나 몸이 개판이라는 말에, 조금은 걱정도 된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충성스럽게 글을 올려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이웃 블로거들의 걱정과 격려가 그동안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을. 괜히 여유까지 잃어가면서 기를 쓰고 글을 올려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형님도 그냥 드라마 줄거리나 쓰세요. 광고도 달고요”

그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리고 그런 것을 쓸 재주도 없다.

“머리 두상을 보니 한번 고집을 피우면 아무도 못 꺾겠네요.”
마사지를 하시는 분의 말씀이다. 맞습니다. 그래도 이 고집 하나로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그것마저 버리면 살아갈 의미도 없겠죠. 그래서 난 또 주섬주섬 오늘도 가방을 챙긴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경내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비

위와 같이 해인사의 창건내력을 적고 있다.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70여점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해인사 경내를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탑을 비롯하여 많은 비들이 서 있다. 그 끝에 보면 비각이 하나 보인다. 이 비각에는 <원경왕사비>라고 현판이 붙어있다.

보물 제128호인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의 왕사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는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비는 신라시대의 비와는 달리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얇고 단출한 것이 특색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인 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의 스승이기도 한 원경왕사는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인종 3년인 1125년에 조성한 이 비는,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시대의 비의 특징을 보이는 원경왕사비

이 비를 보면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비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비받침을 보면 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머리가 용을 형상화 한다. 화려한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한 초기의 작품에 비해, 원경왕사비의 귀두는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 받침인 귀부에는 귀갑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결부분 양편에는 卍자 두 개를 겹쳐 조각을 하였다. 거북이의 발 등도 힘차고 날카로운 초기의 거북이에 비해, 뭉툭하게 조각이 되었다. 귀갑문 역시 초기의 것들이 작고 섬세한 것에 비해, 크고 조금은 둔하게 보인다.



귀두의 조각 역시 단조롭다. 원경왕사비는 전체적으로 초기의 비 밭침에 비해, 많이 약소화 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는 오석으로 얇게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자리 부분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여름에 만난 원경왕사비. 그 많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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