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면, 많은 회상에 잠길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세상을 살았는가 정도는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반계서당’이다. 그곳을 오르면 절로 왜 사는가? 혹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7번지. 부안에서 곰소를 항해 30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우측 산 중턱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우동리 마을로 접어들면 길가에 '반계선생 유적지'란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로 진입해서 들어가면 '반계서당'이라는 안내판이 길에 서있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저 멀리 서해 끄트머리가 보이는 곳에 반계서당이 자리한다.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

지금의 집이 당시 선생이 살던 집은 아닐 것이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조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 한양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학문에만 열중하던 반계선생은, 효종4년인 1653년 선조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 우동리로 이주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 세상을 하직한 반계선생. 선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학문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반계선생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반계서당에 몸을 의탁한 선생은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 스물여섯 권을 이곳에서 저술하셨다.




선생의 마음과 닮아 하늘 아래 걸린 반계서당

반계서당을 찾아 길을 오른다. 마을을 지나 흙길인 산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땀이나고 숨이 가빠오지만,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반계서당'이라는 푯말이 있어 고맙다. 산길을 걸어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저만큼 물이 빠진 서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만큼 산 중턱에 반계서당이 보인다. 돌담을 쌓고 일각문을 내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주인 잃은 서당과 친구가 되었다.

일각문을 들어서기 전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선생의 발자취에 행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문을 들어서니 일각문 앞쪽으로 샘이 보인다. 샘에는 맑은 물이 차 있어 갈증도 나던 차라, 검불만 떠 있지 않다면 한 모금 마시고 싶다. 누군가는 해골의 물도 마셨다는데, 검불 몇 가닥 떠 있다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기에 이 자리에 있기가 버거운지도 모르겠다.



산 중턱에 서당을 지은 까닭을 깨우치다

서당 누마루에 앉아 땀을 닦는다. 멀리 보이는 서해가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변변한 나무도 없는 이 산 중턱에서 선생은 어떻게 그 오랜 겨울을 나신 것일까? 아마도 검불이며 삭정이를 모아다가, 겨우 방안에 온기만 들게 하셨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사신 선생의 마음이 느껴진다.

많은 천거를 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 야인이 되어 반계서당에 오른 선생은, 5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 올라 나를 돌아본다. 과연 나는 선생의 만분지 일이라도 마음을 닮을 수가 있을까? 반계서당에 올라 선생의 마음 한 조각을 담아간다. 아마도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를 기억할 때, 이곳 반계서당에서 조금은 변화가 되었을 것이란 마음 하나면 족하리라.

참 어이가 없다.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다 같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자식은 소중한 법이니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하다’고 했던가?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할까? 꼭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아마 아는 사람의 자식이 혼이 나고 있다면 다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궁금해 할 것이다. 어제 일이다. 절 안에는 문화재가 많다. 그것이 국보나 보물은 아니라고 해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보존할 가치가 있어 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당신 아이를 내가 혼내면 좋겠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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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 여행에서 생긴 사건 하나

지금은 한창 휴가철이다. 휴가철에는 사람들이 정해 놓은 곳을 오가는 길에, 절집을 들리고는 한다. 아무래도 절집에는 희한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절을 다녀 본 아이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처음으로 절을 찾는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저런 것들이 모두 신기할 것이다.

그런 여행길에 들린 절집에서 일이 생겼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으로 황당하다. 그리고 적반하장 격으로 아이를 나무란 사람을, 오히려 아이들의 부모가 혼은 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한 아이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문화재를 나무로 득득 긁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청년이 당연히 그러지 말라고 했단다. 그래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문화재를 긁고 있더라는 것. 무엇인가 보았더니 탑 틈에 무엇이 끼어있는데, 그것을 파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이가 듣지를 않자, 언성을 좀 높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가까이에서 보고 있던 부모님들이 쫓아왔고.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부모님들을 본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아이의 부모님들은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 그러더니 다짜고짜 청년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하는 말이

“당신 아이를 내가 혼내면 좋겠어?”

라고 했단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말이다. 그 자리에 없었던 차라,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청년은 말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무척 당황했었나보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민다. 남의 일에 가급적이면 참견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문화재를 나무로 긁어 말렸을 뿐이라는데 너무한 것 아닌가.


무조건 내 아이 편들기, 올바른 것일까?

주변 사람들은 보고도 아무도 청년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거들고 나섰다. 눈을 아래위로 부릅뜨고 곧 나에게 덤벼들 기세이다. 하지만 내가 만만하지가 않았나보다. 우선은 인상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간다. 거기다가 문화재를 건드려 놓았으니, 이미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고 한다.

그것이 더 열을 돋우고 말았다. 결국 절집 어른이 나오셔서, 어른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그치기는 했지만 영 기분은 말이 아니다.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이 아이를 잘 못 가르친 것을 사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고 무조건 내 아이라고 역성을 드는 부모님들. 과연 올바른 교육일까?

청년에게 물었다. 아이는 있느냐고?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단다. 그러면 아이 없다고 약이나 올리지 그랬느냐고 웃으면서 농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씁쓰레한 마음은 영 가시지를 않는다.

(창) 강쇠란 놈의 거동봐라 저 강쇠란 놈의 거동봐요. 삼십명 나뭇꾼 앞세우고 납작지게를 걸머지고 도끼는 갈아 꽁무니차고 우줄 우줄 넘어간다. 거들거리며 넘어간다. 이산을 넘고 저산 넘어 산돌아 들고 물돌아 들어 죽림 산천을 돌아들어 원근 산천을 바라보니 오색초목이 무성하다.

마주섰다고 향자목 입마추면 쪽나무요. 방구 꾸며는 뽕나무요. 일편단심에 노간주며 부처님 전에는 회양목 양반은 죽어서 괴목나무 상놈을 불러라 상나무 십리 절반에 오리목 한다리 절뚝 전나무요. 오동지신이 경자로다 원산은 첩첩 태산은 층층 기암은 주춤 낙수는 잔잔 이 골물이 출렁 저 골물이 솰솰 열에 열두골 물이 합수되어 저 건너 병풍석 마주치니 흐르나니 물결이요 뛰노나니 고기로구나. 백구편편 강상비요 낙락장송은 벽상치라


(아니리) 여봐라 하 이 변강쇠란 놈이 나무를 나가 나무는 못하고 사면팔방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선 큰 장승을 패다 불을 땠더니 아 이 장승이 또 무슨 죄로 남의 집 아궁이 귀신이 되겠느냐 말이지.

변강쇠타령에서 장승이 강쇠에게 굴욕을 당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강쇠는 잘 마른 장승만 패다가 불을 놓았다고. 전국에 장승들이 비상이 걸렸다. 노들 대방장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더니, 장승들이 각각 강쇠녀석의 몸에 병균을 하나씩 심었겠다. 결국 강쇠란 놈은 오만잡동사니 병이 다 들어 죽고 만다.

장승은 성기숭배사상에서 기인했을까?

장승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것일까? 가장 오랜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의 ‘비명(碑銘)’에 적혀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9년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당시 장승의 기능은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장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기록은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석표’이며,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생,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보인다. <용재총화>와 <해동가요> 등의 옛 문헌에도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장승은 어떻게 세우게 되었을까? 가장 많은 학설은 ‘남근숭배’와 사찰의 경계표시에서 나왔다는 ‘장생고표지설’ 등이다. 또한 솟대나 선돌, 서낭 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속기원설‘도 있다. 그러나 장승이 언제 무슨 연유로 최초로 세워졌는가에 대한 것은 정확하지가 않다.

장승은 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장승, 행로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마을의 입구에 서 있는 축귀장승, 성문이나 병영, 해창(海倉)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영은사지 석장승을 찾아가다

함양 백전면 백운리에는 석장승이 서 있다. 이 장승이 서 있는 곳은 예전 신라시대 영은조사가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영은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6일 밤새도록 심하게 토사를 한 덕에 답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비가 억수로 쏟아 붓는데도, 답사를 떠난 것이다. 백운면에 들어서 마을 주민에게 장승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단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요즘 내비게이션은 웬만한 문화재는 다 안내를 해준다. 그러나 정작 영은사지 석장승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빗길에서 물어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겨우 장승을 찾아냈다. 백운암으로 오르는 산길 입구 양편에 두 기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딴 곳의 장승과는 다르다. 양편에 서 있는 장승의 형태와 크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두 장승이 같은 목적을 갖고 제작이 되었다는 것은 복판에 음각된 ‘우호대장군’과 ‘좌호대장군’이란 글씨 때문이다. 이 장승은 각종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호법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강쇠도 도망갈 험상궂은 모습

산으로 오르는 좌측의 장승은 키가 작다. 복판에 글씨를 보니, 밑 부분이 땅에 많이 묻힌 듯하다. 원형에 가까운 돌을 위를 잘라 관처럼 만들고, 이마에는 굵은 주름을 새겼다. 눈은 양쪽으로 치켜져 올랐으며, 코는 주먹코이다. 입은 아랫입술이 두터우며 이빨이 듬성듬성 나있다. 복판에는 좌호대장군을 음각했는데 ‘좌호’만 보인다.

길 우측에 있는 석장승은 네모난 돌의 윗부분을 뾰족하게 조성하였다. 흡사 고깔을 뒤집어 쓴 듯한 형상이다. 눈썹은 굵게 표현했으며, 눈은 왕방울 눈이다. 코는 좌우로 퍼졌으며, 입은 두툼하고 이빨이 굵게 옥수수 알처럼 조각이 되었다. 복판에는 우호대장군이라 음각을 하였다. 이 영은사지 석장승은 좌호대장군의 오른쪽 아래에 영조 41년인 1765년을 표시하는, ‘건륭 30년 을유 윤2월’이라고 적혀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찾아간 영은사지 석장승. 입가에는 수염이 여러 가닥 있어 더욱 험상궂게 보인다. 아마도 이 영은사지 장승을 변강쇠가 만났다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빗속에 서 있는 장승을 뒤로하며.

오늘 낮 문자를 한통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문자의 내용은 이렇다.

“퍼너스피그어스여”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암호도 아니고, 내가 탐정도 아닌데 이런 문자를 왜 한 것일까? 들여다보고 또 보아도 참으로 아리송한 내용이다.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다. 종이에 크게 써 보았다. 그렇다고 해답이 나올 리도 없다. 문자를 한 지인이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지라, 혼자 궁리에 또 궁리를 해본다. 그래도 답답하기는 매한 가지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리를 하느라 종이를 들고 의자에 길게 기대어 고민을 해본다. 그러다가 전화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다가, 그만 종이를 놓쳐버렸다. 종이가 뒤집어졌는데 희미하게 비치는 글씨가 이상하다.


얼라, 이게 무슨 말이여. ‘오시요...’라는 글씨만 같다. 유리창에 종이를 뒤집어 갖다 대어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유리에 비친 종이에 적힌 글씨는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이런 말이다

“보고시프니오시오”

뒤집힌 종이에 나타난 글자. 세상에 이럴 수가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긴 비 끝에 우울할까보아서, 웃으라고 보냈단다. 그러면서 머리가 무지 좋다는 칭찬이다. 머리가 좋긴 실수로 종이를 떨어트린 것뿐인데. 하마터면 이 글 갖고 밤새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

상연대, 해발 1279m의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다. 오죽하면 윗 상자(=上)를 써서 상연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8월 7일, 몸이 말이 아니다. 모처럼 맞는 휴일인데 비는 어지간히 쏟아진다. 아마도 이런 빗속에서 답사를 나갔다고 하면,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아우 부부가 그래도 함께 동행을 하겠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다. 못 이기는 척 나가고도 싶지만, 도저히 답사를 할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한 곳이라도 글을 쓸 곳을 찾아 나섰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는데, 가까운 곳을 찾아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비가 쏟아지는 날 찾아간 상연대에서 바라다 본 정경 

빗길에 찾아간 상연대, 자칫 뒤돌아 설 뻔

지리산을 넘을 대쯤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 답사는 무리인 듯하다. 그래도 다만 한 곳이라도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함양으로 접어들어 상연대를 찾아 길을 접어든다. 도로변의 숲길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숲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상연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상연대는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소재한다. 백전면 소재지를 지나면 백운리 대방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길이 양편으로 갈린다. 왼쪽 길로 가면 묵계암과 상연대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운암이 자리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올라가니 여기저기 길이 갈라진다. 어디로 가야할까?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상연대

우선은 이름이 상연대라고 했으니, 산 위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한참이나 오르니 묵계암이 나타난다. 묵계암을 지나쳐 상연대를 오르는 숲길이 아름답다. 내려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는데, 아우가 말린다. 한 번 서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차는 힘이 들어 헉헉대며 쉬지 않고 산길을 오른다. 길에 가득한 낙엽이 미끄러워 운전을 하면서도 힘이 드는가 보다.

한참이나 산으로 올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에는, 묵계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차를 몰고 올라가도 10여분이 걸리는 가파른 길이다. 걸어서 10분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올랐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깎아지른 비탈 위에 담장이 보인다. 그 밑에 주차장이 있다. 차 서너 대는 댈만한 공간이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까지 세차게 분다. 돌계단을 오르니 바람에 날아갈 듯하다. 그 위에 상연대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짐을 상연대로 나르기 위한 지게와 리프트

겨우 오른 상연대, 그러나 단청공사 중

주차장 한 편에 지게가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짐을 지게에 지고 오르는가 보다. 축대 위에는 해우소 곁에 터진 담장사이로 오르는 리프트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풀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사용한지가 오래인 듯하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백운산 정상 밑에 자리한 곳이라, 계곡을 치고 올라오는 바람의 세기가 장난이 아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전날 음식을 잘못 먹어, 밤새 한 토사에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겨우 우산에 이끌리다시피 상연대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무슨 일인가? 온통 공사장이다. 단청공사 중이란다. 힘이 빠진 몸으로 이곳까지 겨우 올랐건만, 이런 낭패가 있나. 비바람이 세차서 사진조차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상연대로 오르는 계단. 비바람이 거세 우산도 쓸 수가 없었다

구름도 비켜가는 상연대

상연대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말기인 경애왕 1년 924년에 세운 암자이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기도를 하던 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신라 말의 구산선문 중 한 곳인 실상선문이 이곳으로 옮겨와 마지막 선문의 보루라고 전한다.

천여 년 동안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했다는 상연대.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3년경에 재건을 했다고 한다. 비는 더욱 거세진다. 바람소리까지 윙윙거릴 정도이니 더 이상은 서 있을 수가 없다. 법당 안은 구경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빗속에 멀리 산들이 줄지어 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단청 공사중인 상연대와, 상연대에서 내려다 본 주차장

날이 좋았더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 것만 같다. 구름도 비켜간다는 상연대.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백운산 정상 밑에 서 있는 상연대는, 그렇게 비바람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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