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행궁과 그 북쪽에 정조 사후에 건립한 화령전으로 구분이 되어있으며,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행궁이야기를 시작하며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조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이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에 이어 행궁과 화령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이곳에서 읽어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날 찾아간 행궁과 화령전. 먼저 화령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고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외국에는 자신들의 문화콘텐츠를 이용해 많은 이득을 창출하고 있다. 문화콘텐츠는 무한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의 경우 자신들의 역사적인 문화재 등을 갖고, 그곳에서 이야기꺼리를 도출해 연극이나 영화로 제작,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24반 무예 시범. 화성 행궁 앞. 수원화성운영재단 자료


우리나라는 역사가 오래된 나라이다. 세계 어느 곳에 견주어도 자랑할 만한 유구한 문화와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러한 문화재를 이용한 문화콘텐츠의 활용은, 우리가 끊임없이 연구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나 자신들의 문화를 갖고 있다. 아주 작은 책 한 권으로도 세계적인 명소로 발 돋음 한 곳도 있다.

화성과 화성문화재는 대단한 자원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이다. 화성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축성한 성이라고 한다. 그 성을 보러 수원을 찾는 사람들도 해마다 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화성의 유명세만큼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늘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만든다. 화성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화성일부를 돌아보고, 행궁에 들린다.

행궁에서는 주말이면 신풍루 앞에서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또한 3월부터는 매일 무예24기를 볼 수 있으며, 장용영 수위의식 등도 볼 수가 있다. 또한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정조대왕의 능행차 연시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행사들이 과연 문화컨텐츠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언이 서질 않는다. 우리나라에 문화컨텐츠산업이 새로이 부각하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이다. 문화산업은 2003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연평균 21.1%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사진은 단편소설 '드라큐라'의 저자 <브램 스토커-다음 검색에서 인용한 사진)

이러한 성장률은 2001년~2002년 상반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6.1%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문화산업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용한 문화산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각종 문화콘텐츠는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안동하회마을에서 열리는 탈 축제, 진주 연등축제, 3일간 열리는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일원을 연결하는 뽕할머니 바닷길 축제, 그리고 강릉의 단오제 등이다.

이 축제들은 이제 문화콘텐츠로 자리를 확실히 잡고 있으면서, 지역 수입원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축제들을 보면 모든 것이 연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성과 화성문화재의 볼거리는 연계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을 감안해 더 질 좋은 상품을 창출해 내지 않는다면,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화성의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흡혈귀 드라큐라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이름일 뿐

‘흡혈귀 드라큐라’는 소설가 브램 스토커의 단편소설의 책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그 흡혈귀 드라큐라는 수많은 소재로 발전하면서 TV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아니라, 좀 더 매력적이고 섹시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좌측 사진은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드라큐라 포스터 - 다음 검색 사진 인용)

중국 항주의 ‘송성가무쇼’는 송나라 때의 전설과 역사를 표현한 공연으로, 이제는 세계 3대 공연 중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쇼의 영어 제목은 ‘The Romance of the Song Dynasty’이다. 약 천 년 전 송조의 고도 항쪼우를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 자연 그리고 애뜻한 사랑 이야기와 치열했던 전쟁 등을 4개의 단막극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宋城千古情>이란 이 가무쇼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관객을 압도한다. 450명의 출연진이 한번에 3,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형극장에서, 일 년 내 공연하는데도 연일 좌석이 만석이라고 한다.

중국 광쩌우의 극 '송성천고정'의 포스터 - 홈페이지 사진 인용


이런 점을 볼 때 화성과 행궁을 모티브로 삼아 이야기 줄거리를 엮어 상품을 만든다고 하면,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판에 박은 공연보다는 좀 더 질 좋은 많은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지역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 이 글은 '수원인터넷뉴스'에 실린 칼럼입니다

또 다른 피해는 생기지 않을까 걱정


겨울 철새들이 마을로 찾아들고 있다. 먹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마을로 찾아드는 철새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철새들은 주로 빈 논으로 떼를 지어 날아와, 떨어진 곡식의 낱알 등을 먹는 것으로 보인다.

▲ 떼를 지어 농가로 찾아드는 겨울 철새들이 논에 앉아 먹이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을로 날아드는 철새들이 해마다 그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농민들은 앞으로 이렇게 찾아드는 철새들로 인해 또 다른 피해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 또 다른 피해가 없을지 신경이 쓰인다고

수원인터넷뉴스(http://www.swinews.com/)

새해 복 많이들 받으시고 날마다 좋은 날만 되시길 기원합니다. 가끔 한 번씩은 들리렵니다. 늘 행복하세요. 흑룡해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고 합니다. 늘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시길...
한 마디로 충격이였습니다. 20여 년간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나름 꽤 많이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주 고달사지에서 만난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탑을 보는 순간, 내 20년간의 답사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적기 위해 오랫만에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시간에 쫒긴 것이 화근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꼼꼼히 답사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정말 마음을 놓고 문화재를 만나고, 글을 쓸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번지 혜목산 고달사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고달사지 절터 안에 있는 석조 유물들 가운데, 탑비의 귀부, 이수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몸돌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귀꽃을 이중으로 새긴 지붕돌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부인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약간 위로 향하고 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끝에는 꽃장식인 귀꽃을 큼지막하게 새겨 넣어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 위에도 지붕돌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인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탑신은 4면에는 문 모양을 새겨 넣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구름 위에 올려놓은 사천왕상은 힘이 있게 조각이 되어, 탑 안에 있는 복장물을 지키는 듯하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 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기단부의 조각이 뛰어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인 앙화가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중대석에는 윗부분에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한 조각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들이. 그 사이에 가득 새겨 넣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위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다.



기단부에 들어있는 귀부, 무지의 극치인 나

그동안 전국을 돌면서 숱한 문화재와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한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조금은 높아진 듯도 하다. 스스로도 문화재에 대해 ‘수박 겉핥기’는 조금 지났다고 생각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우리 문화재에 미친 사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종대사탑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한 면에 세 마리의 용머리가 보이는데, 중간에 용머리가 크고 한편으로 돌려져 있다. 벌써 몇 번인가 본 원종대사탑이다. 한 번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만큼 부끄럽다. 그 가운데 목을 비튼 용두는 바로 귀부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 용머리 밑으로는 거북의 등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편으로는 앞발이 힘차게 표현이 되어있다. 한 마디로 놀라움이다. 왜 아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바로 귀부의 앞부분이 조각이 되어있다. 탑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곳에는 귀부의 뒷부분인 꼬리와 귀갑을 선명하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이다. 탑의 기단부에 귀부를 넣어 놓은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 몇 번을 보았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니. 그동안 나름대로 문화재를 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다시 살펴야겠다. 20년간의 답사가 이렇게 부끄럽게 무지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더 늦지는 않았으니.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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