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궁이다. 행궁의 문인 신풍루를 들어가면 좌우로 군영이 있고, 우측 군영을 들어가는 협문 앞에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속을 다 비워버린 수령 600년의 이 느티나무는, 행궁을 세우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높이 30m에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이다.

이 나무는 화성 성역 이전부터 서 있던 나무로, 수원을 지키는 신령한 나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영목(靈木)’ 또는 ‘규목(槻木)’ 혹은 ‘신목(神木)’이라고 부르며, 이 나무를 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뭇가지라도 하나 건드리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정자인 미로한정과 수령 600년인 지난 느티나무인 영목(아래)

사람들의 염원을 가득 달고 있는 느티나무

사람들은 항상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이미 수령이 600년 이상이 되었지만, 큰 가지는 고사에서 또 다시 가지를 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1982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화재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수원시에서는 2003년 5월에 대대적인 나무살리기로 수술을 감행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월에 행궁을 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이 나무에 소원지를 걸어놓는다. 누구는 가족의 건강을, 또 누구는 사업의 번창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합격을 빌기도 했다. 결혼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를 축적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무에 손을 대고 간절히 빌면,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나무이다. 아마 이산 정조도 이 나무에다 손을 대고 강력한 왕권을 이루기를 빌지는 않았을까?

늙어서 쉴만한 정자,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의 뒤편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작은 정자가 육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미로한정’이란 뜻은 나중에 늙어 한적하게 쉴만한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단 칸으로 지은 정자이다.



미로한정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뒤편에 나 있는 득한문을 통해서 접근을 할 수가 있다. 득한문을 나서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면, 우측에는 초병들이 지키고 있는 내포사가 있고, 그보다 약간 높은 곳 남쪽방향에 자리한다. 단 한 칸으로 된 정자는 그렇게 홀로 한가롭게 서 있다. 이 정자를 돌아보면, 정조 이산이 화성행궁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노후를 생각한 정조의 뜻이 담긴 정자

미로한정의 뒤편으로는 팔달산으로 오를 수 있는 작은 협문이 담장에 나 있다. 그 위로 비탈이 진 길을 오르면, 바로 서장대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 자리에 미로한정을 지은 정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자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정조는 노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궁에 있는 정자들은 화려하다. 그러나 이 미로한정은 앞쪽을 댓돌을 놓아 트고, 남은 부분은 모두 난간을 둘렀다. 난간도 화려하지가 않다. 마루를 깐 한 칸의 작은 정자. 그 협소한 모습에서 정조 이산의 마음을 읽어내려 힘쓴다. 아마도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올라, 홀로 상념에라도 잠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어야할 강한 왕권에 대한 깊은 마음을 이곳에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미로한정은 그런 정조가 자신만의 공간으로 마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훤히 트인 앞을 내다볼 수가 있고, 팔달산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복원 된 미로한정에 사용 된 옛 주춧돌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끝내 이루지 못한 정조의 깊은 뜻 때문인지. 1월 29일 찾은 미로한정. 주변으로는 찬 바람을 맞으며, 철모르는 풀들이 벌써 땅을 밀고 올라오고 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왕권강화 정책의 상징인 화성행궁

현재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성행궁은, 그 일부만이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화성행궁은 화성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 이외에도 한양의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 때는 과천행궁과 사근참행궁을 건립하였고, 정조 18년 '시흥로'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 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인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안산행궁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이나 시흥, 안양과 안산, 사근참 등 속읍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다.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을 돌아보다

화성행궁에는 현재 어떠한 건물이 있으며, 그 전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복원이 된 행궁은 정조 당시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 행궁의 곳곳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냥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인 1795년에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정조 18년인 1789년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가 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 되었다.

내포사에 오르다

이 봉수당 뒤로는 팔달산이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에 작은 1평 남짓한 전각이 한 채 서 있다. 그저 행궁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이곳은 눈여겨보지를 않는다. 내포사(內鋪舍), 이 작은 전각은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에 알리는 신호를 하는 곳이다. 화성에 포루(鋪樓)가 있다면, 행궁 안에는 포사(鋪舍)가 있다.



화성 안에는 원래 서남포사, 증포사, 내포사 등 세 곳에 포사가 있었다. 이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뒤편 높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화성 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내포사 역시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었던 것을 2006년에 복원을 하였다.

소나무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내포사. 행궁 쪽으로 목어를 걸어두었다. 목어를 건 반 칸은 개방이 되었으며, 그 뒤편으로 작은 온돌방이 있다. 사시사철 이곳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궁은 화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빠른 신호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행궁 바로 뒤편에 자리를 한 듯하다.



작은 건물 하나가 얼마나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포사 위로 오르면 소나무 사이로 행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 행궁을 돌아보는 걸음을 이 내포사로부터 시작을 한다. 2012년 1월 29일,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다. 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행궁의 뒤편 내포사를 아이폰으로 촬영을 하였다.

수서역 기점으로, 중앙선 이용보다 26분 단축

여주∼원주 철도를 건설하면 KTX 수서역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까지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서울 강남의 호텔에 숙박하고 당일코스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개발연구원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수서∼평창 철도연결 방안>을 통해 서울 수서에서 강원 평창까지 기존 계획보다 26분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선보다 여주~원주 철도 이용하면 26분 단축

정부는 인천공항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까지 인천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도착한 다음 중앙선으로 원주까지 가는 교통편을 제시했다. 이 노선은 인천공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선수와 대회 관계자에게는 최단거리지만, 수도권 인구 3분의 2이상이 살고 있는 한강 이남지역 주민들이 경기관람을 위해 평창으로 가기에는 매우 불편하다.

KTX 수서역을 기준으로 할 경우 분당선 왕십리역까지 가서 중앙선으로 환승한 다음 평창으로 접근하는데 86분이 걸리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여주~원주 철도를 건설하면 KTX 수서역에서 평창까지 59분 만에 이동이 가능해 정부가 제시한 방안보다 26분 단축할 수 있다.


현재 공사 중인 성남∼여주 철도는 2015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원주에서 평창을 거쳐 강릉까지 연결되는 철도는 올해 5월 착공해 2017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여기에 여주에서 원주까지 22km 구간이 추가로 연결되면 성남(판교)에서 평창까지 직행 운행 시 51분만에 도착할 수 있다. 성남∼여주 구간은 시속 160km, 여주∼원주∼평창 구간은 시속 22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서에서 이매 구간은 기존 분당선을 이용할 경우 17분이 소요되지만, GTX 수서∼동탄 구간의 판교역이 생기면 11km 구간을 시속 200km로 달려 3분 30초 만에 이동할 수 있다. 성남∼여주 철도로 환승하는 시간 5분을 고려하더라도 수서에서 평창까지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강남역에서 출발해도 판교역에서 신분당선으로도 갈아 탈 수 있기 때문에 70분이면 도착이 가능하다.

한편 6,329억 원이 소요되는 여주∼원주 철도는 현재 기획재정부에서 예비타당성조사 중에 있으며 4월 중순께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동계올림픽 개최까지 6년이 남았기 때문에 서둘러 추진하면 2017년 말까지 완공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장 주변 과도한 숙박시설 건축 필요 없어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여주∼원주 철도가 건설되면 경기장 주변에 과도하게 숙박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치제안서 기준으로 대회운영을 위한 86,000실 규모의 숙박시설은 기존 및 계획 시설로 확보할 수 있다. 관람객을 위해 추가 확보하겠다고 밝힌 숙박시설 14,000실은 서울 강남과 경기도, 이천, 여주 등에 위치한 호텔 및 콘도 76개, 11,330실의 숙박시설을 활용하면 추가적으로 건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조응래 선임연구위원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제안서에 여주∼원주 철도사업이 포함된 만큼 경기도와 강원도,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가 협력하여 중앙정부에 적극적으로 사업추진을 건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여주~원주 철도 건설로 향후 KTX 광명역,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시속 220~230km의 동서 간선철도 노선이 만들어지면 수도권과 원활한 연결체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급행운행이 가능하도록 역사 내 대피선 및 신호체계가 시급히 정비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주) 이 기사는 경기도 보도자료임

화성 행궁 옆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풍화당은 이안청과 담을 사이로 그 뒤편에 자리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팔작집으로 조성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화당이 있다. 이 풍화당은 재실이다. 정조의 제를 올리는 날이면 제관들이 와서 묵던 집이다. ‘풍화당(風化堂)’이란 사회의 풍속과 기강과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순조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전각이다. 조선조 제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 재실(풍화당),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재인이 살았던 풍화당

화성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20년 정조의 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화령전은 운한각과 이안청, 그리고 풍화당 만이 남아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인 고 이동안옹은 재인청 출신이다. 재인청은 수원을 중심으로 모인 예능인들의 집단이었다. 재인청에 회원이 많을 때는 3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거대한 예능집단이었나 보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해있지 많은 사람은 기예조차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 이동안옹이 처음에 수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바로 운한각 옆에 이안청에 기거를 하면서 운한각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당시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이가 없단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이동안 옹에게서 춤을 전수받은 고성주(남, 56세. 팔달구 지동 거주)는 “처음에는 운한각에서 춤과 소리 등을 배웠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우다가 불이 났어요. 그래서 문화재를 태운다고 쫓겨나 풍화당으로 옮겨, 그곳 마루에서 배우고는 했죠.” 라고 한다.



고 이동안 옹의 딸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보유자였던 고 정경파 선생은 이동안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자, 풍화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고 정경파 선생의 첫 제자인 박경현 무용학원 원장은, “저희들도 운한각 안에서 춤을 배우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문화재를 보존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풍화당으로 나와 기거를 했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풍화당에서 기거를 하셨어요.” 라고 한다.


단아한 5칸 건물 풍화당

풍화당은 단아하게 지어진 - 자형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고, 중앙에 세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양편에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의 양편은 판벽으로 막았다. 마루방 세 칸의 뒤편으로는 판문을 내었고, 앞으로 낸 문은 열어 올려 위로 걸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의 주추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으며, 앞에 낸 협문을 통해 제를 지내러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은 재실로 지어졌지만, 딴 곳의 재실에 비해 화려하지가 않다. 아마도 전각의 이름인 풍화당이란 뜻 때문인가도 모른다. 한 때 재인들의 풍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화당. 역사는 그렇게 아픔을 놓고 이어가는가 보다

수원은 예부터 무자(巫子)들이 많던 곳이다. 아무래도 화성이 건립된 전후로 팔달문 앞에 장이 형성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상권이 형성되었다는 소리는 그만큼 재물이 풍부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에 도성에서 쫓겨난 많은 무격(巫覡)들이 수원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월 초사흘(음력 1월 3일) 이 되면, 무자의 집에서는 일 년의 액을 막는 ‘홍수맥이’를 시작한다. ‘홍수’란 ‘횡수(橫數)’를 말하는 것이다. 즉 나쁜 일이 닥치는 운세를 ‘횡래지액(橫來之厄)’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홍수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홍수막이는 전문적인 무격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무격의 힘을 빌려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까지, 일 년 간의 나쁜 수를 막아내는 것이다. ‘홍수를 막는다.’ 라는 뜻을 지닌 홍수막이를 사람들은 ‘홍수맥이’라고 한다.


홍수막이를 정월 초사흘부터 정월 보름까지 하는 것도, 지신밟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날 시작해서 같은 날 끝나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모드 일 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우리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쉽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네 마음까지 달라진다고 해서야. 지킬 것은 지켜가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다.

줄을 이어 기다리는 사람들

홍수막이를 하는 현장은 늘 분주하다. 남들보다 먼저 축원을 해야 더 좋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심성 때문이다. 쌀말에 초를 꽂고 축원을 하는 동안,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을 한다. 자손들이 한 해 동안 탈 없이 잘 자라고, 집안에 흉사가 없도록 비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한결 같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 고성주(남. 56세)는 벌써 신내림을 받고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정초만 되면 신자들을 위한 축원을 하느라 목이 쉰다. 그래도 남들처럼 커다란 물질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연히 신을 모시고 있는 무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정월 초사흘에 시작하는 홍수막이는 보름이 되어야 끝이 난다.

대물림으로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울에서 왔다는 이모씨(여, 46세)는 “이렇게 정초에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일 년 동안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딴 곳처럼 큰 돈 안 부르고 일 년 간의 축원을 해주는 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저희는 지금 대물림 단골이에요. 아이들도 앞으로 계속 이렇게 정초가 되면 와서 축원을 받을 테죠”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집의 신자들은 모두 대물림 단골들이다. 할머니가 다니던 집을 며느리가 다닌다. 그리고 벌써 그 다음대가 물려받기 시작한은 집들도 있다. 전안(신을 모신 신당)에 반드시 앉아 징을 치면서 축원을 하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축원을 하는 고성주나, 하루 종일 자신의 순서를 가다리는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이다. 이 한 해도 오직 편안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4대째 전통방법으로 진행하는 홍수막이

고성주의 홍수막이는 벌써 4대 째 내려오는 무가(巫家)의 독특한 방법으로 진행을 한다. 할머니에 이어 고모와 고모의 신딸인 최씨, 그리고 고성주로 이어지는 무가의 전래집안이다. 지금의 단골들도 내개 3~4대를 이어오는 단골들이라, 집안 내력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집을 찾는 사람들은 혼란이 오기도 한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모두가 ‘아범’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신도들은 고성주를 나이에 관계없이 ‘아버지’라고 호칭을 한다. 모두가 신과 인간의 고리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옛날 ‘단골네’들의 유풍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딴 곳 같았으면 벌써 문화재로 지정을 하고도 남을법한 전통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홍수막이. 일 년을 편안하게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축원을 마치고 오방신장기를 뽑게 해 일년의 공수(신탁)를 준다. 아마 홍수막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이 공수대목을 일 것이다. 어느 달에 조심을 하라고 일일이 일러주고 난 후, 홍수막이를 하고 나오는 시림들의 얼굴에는 안도감 때문인지, 엷은 웃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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