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 해. 참 한 해동안 바쁘게 살았습니다. 블로그라는 것을 2005년에 처음으로 접하고 난 뒤 여러 번의 쉼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정말 바쁘게 한 해를 살았던 것 같습니다. 블로그라는 것에 빠져들면 마치 중독성이 있는 듯도 합니다. 딴 것을 하지 못해도, 뷰에 글을 발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기도 합니다.

물론 그 글은 나름대로 현장을 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하면서 일궈 낸 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쓸 수가 없을 때는 주변에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써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죽도록 써서 무엇이 남았을까요. 글이 남았습니다. 그 글 안에는 나름 땀으로 젖은 나날들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웃님들

그동안 블을 하면서 참으로 즐거웠던 것은 이웃님들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피곤한 잠을 깨워 글을 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인사를 한다는 것. 솔직히 저한 테는 과분한 일과였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생활을 해야하고,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추천을 누르고 시간이 날 때 찾아가 댓글을 달고, 그것도 힘들 때는 제 특기인 <복사신공>을 날리기도 했다는.

그런 연유로 저는 많은 분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했나 봅니다. 한 마디로 정직한 추천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독을 요구하면 먼저 그 분 블에가서 5개 정도의 글을 찬찬히 봅니다. 그리고 이웃을 만드는 것이죠. 한 마디로 사전에 충분히 검증이 된 이웃이기 때문에, 믿고 추천을 누릅니다. 하루를 쪼개고 쪼개도 부족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를 그래도 이해하여 주시고, 늘 찾아주시는 분들께 정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이웃들이 계셔 올 한해 최고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좀 쉬겠습니다.

직장을 바꾸고 보니 여간 바빠진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하루에 잠을 단 두 시간 정도 밖에 자지를 못합니다. 거기다가 글까지 발행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가 닌가 생각합니다. 한 달 반 전부터 어깨에 심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는데, 팔을 무라하게 쓴 것 같다고 합니다. 하긴 그동안의 직업 상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자판을 두드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판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취재도 해야합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구멍
이 포도청'이라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다음 뷰까지 글을 송고한다는 것은 조금은 무리일 듯 합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 쉬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생활을 하기 위해, 딴 곳에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틈틈히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 정말 여러분들로 인해 행복했습니다. 2012년 모두들 행복한 날들이시기를 기원합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이렇게 한꺼 번에 인사를 드립니다. 나중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늘 행복들 하시기 바랍니다. 내렸던 엠블런은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달아놓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것이니까요. 뷰에는 송고가 안되도 가끔은 이곳에 글을 끄적거려 놓겠습니다. 

(주) 그 동안 저로 인헤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했던 이웃님들이 계시면 이 시간 이후로 훌훌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2011년 끝날 전날에 온누리








 
















말하지 말아야 할 때에 말을 하는 것은 그 죄가 작지만

말을 해야 할 때에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죄가 크다.

未可以言而言者, 其罪小
可以言而不言者, 其罪大

홍재전서 - 정조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0) - 동북노대와 적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척,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척 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가공할 위력의 쇠뇌를 날리는 동북노대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고 한다.




더욱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시와 공격의 효과를 노린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안문 양편에 적대를 조성한 까닭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 된다. 그 장안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연세가 70세 이상 되신 분들은 괜한 눈물방울이 맺힌다. “그래도 이때가 정겨웠지. 사람 사는 것 같았잖아”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지긋이 눈을 감기도 하고, 연신 “맞아, 맞아”를 외치기도 하신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리 감탄을 연발하는 것일까?

수원시 영통구 청룡대로 265. 예전 주소로는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1088-10번지이다. 이곳에는 ‘수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수원박물관 이층에 자리 잡은 한 전시실. 이곳에는 1960년대 팔달문 근처의 장시가 재현되어 있다. 그 당시의 점포 등을 그대로 옮겨 복원을 시켜 놓은 것이다.


수원박물관 이층 전시실에 마련되어 있는 1960년대 팔달문 인근의 점포들. 당시의 점포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시켜 놓았다. 아레 사진은 시계방향으로 담배가게와 공설목욕탕(공중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밑에 어물전과 수원양념갈비의 시조인 화춘옥


담배 가게 아저씨와 극장 매표소 아가씨

예전에는 담배를 팔아 자녀들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에 어떤 담배가 있었을까? 1960년대 초반에는 나비(1960), 재건(1961), 파고다와 모란(1961), 새나라(1962), 상록수(1963), 희망과 전우(1964), 신탄진(1964), 금잔디(1975), 백조(1965), 자유종(1966), 새마을(1966), 타이거(1966), 수연(1966), 한강(1968), 여삼연(1968), 청자(1968), 금관, 해바라기, 스포츠 등 많은 담배가 있었다.

그런 많은 담배를 팔아서 아이들을 공부를 가르쳤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보다는 이문이 많았을 때였는가 보다. 당시는 담배를 팔아 나라에서 많은 수세를 했을 때니 말이다. 그 당신 팔달문 옆에는 중앙극장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의 중앙극장 간판. 1961년에 신상옥 감독의 작품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선전판이 걸려있다. 아래는 팔달문 인근에서 유명했던 예쁘다 양정점과 대창라사 


팔달문 인근에 있는 중앙극장도 아주 오래된 풍물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상영하던 영화의 종류가 1961년에 제작이 된, 주요섭의 원작소설을 신상옥 감독, 임희재 각색으로 최은희와 김진규 등이 주연을 맡았던 흑백영화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관람권을 구입하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중앙극장 앞에 줄을 서서 표를 구하는 수밖에.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풍경

예전에는 숙녀복이나 신사복 한 벌을 맞춘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예쁘다 양장점과 대창라사 등은 팔달문 옆에서 그래도 잘 나가던 가게였다. 예쁘다 양장점은 1960년대 초반 영동시장 안에 개설한 점포였다. 주인 박창원씨는 남문의 양재학원을 졸업하고 단층건물을 세를 내어 양장점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양장점에서는 소화국민학교와 영복여고의 교복을 디자인 하였으며, 1980년대 까지 있다가 문을 닫았다. 예전에는 목욕탕을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일 년에 몇 번 밖에는 목욕탕을 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물을 데워 대충 닦는 것이 고작이다. 그럴 즈음인 1954년 10월 27일, 팔달로 2가 45번지에 문을 연 공설목욕탕과 이발소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꺼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수원 양념갈비의 원조 화춘옥

전시실 한편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화춘옥’. 바로 유명한 수원의 대표음식이 된 ‘수원양념갈비’의 시조이다. 1940년대부터 1979년까지 영동시장 안에 자리했던 화춘옥은, 창업주 이귀성씨의 대를 이어 아들 이영근씨가 운영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화춘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들렸다가 갈비 맛에 반해 소문이 났고, 그 뒤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집이 되었다.


위 사진은 시계방향으로 화춘옥에서 창업당시에 사용하던 실제 주전자. 그리고 전파상의 모습과 대창라사. 그 앞 흐릿한 가로등 밑에 과일을 팔고 있는 상인이 보인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주전자는 창업주 이귀성씨 당대에 사용하였던 것을 기증을 받아 전시를 해놓았다. 건너편으로는 생선가게, 싸전, 그릇집, 전파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1960년대 팔달문 주변에 실제로 있었던 점포들을 재현해 놓은 시장통. 아마도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은 이 모습을 그냥 넘기지 못할 것이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옛 풍물에서 느끼는 정은 남다른 것. 어르신들이 이곳을 들려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누구나 아련한 기억들을 갖고 살기 때문이다. 추운 날이 조금 풀리는 날, 수원박물관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찾아보는 것 또한 효도란 생각이다. 효도란 꿈 많은 시절의 기억을 선물하는 것이 아닐까?

 

(주) 수원박물관의 1960년대 장시는 조명으로 새벽부터 밤까지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위 사진들은 밤의 가게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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