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권선구 탑동 508-6에 소재한 특수학교인 자혜학교(학교장 김우). 자혜학교의 2011학년도 졸업식이 2012년 2월 9일(목) 오전 10시 30분부터 화정다목적관에서 열렸다. 자혜학교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가, 1966년 사단법인 자행회를 설립하고 난 뒤 1973년에 정신지체아를 위한 특수사립학교로 세운 학교이다.

자혜학교는 1969년 4월 정신박약아 지도실 개설, 1971년 3월 자행학원 개원, 1972년 12월 제1대 이춘섭 교장 취임, 1973년 3월 자혜학교 개교, 1976년 7월 화정다목적관 준공, 1981년 11월 중학교 병설 인가, 1986년 11월 고등학교 병설 인가, 1997년 12월 유치원 병설 인가를 받았으며, 2005년 7월 제6대 현 교장인 김우 교장이 취임을 하였다.



2006년 9월 생명의 숲 학교 숲 시범학교로 지정이 되었고, 동년 12월에는 희망 경기교육 구현 우수학교로 선정이 되었다. 2007년 3월에는 전공과를 개설하였으며, 2010년 5월에는 직업교육관과 이방자 여사의 기념관인 가혜기념관을 준공하였다.

올 해 45명이 졸업장을 받아

2011학년도 졸업은 유치부가 14회, 초등학교가 32회, 중학교 28회, 고등학교 23회, 전공부는 4회에 이른다. 올해의 졸업생은 유치부 1명, 초등학교 7명, 중학교 8명, 고등학교 10명, 전공과 19 등 모두 45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자혜학교 졸업식장과(위) 졸업식 전에 축하연주를 하는 선생님들로 구성된 '가혜앙상블'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의 상을 대리 시상을 한 수원교육지원청 김국희 교육장은 축사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여러분들은 천사와 같다. 최고의 축복을 받아야 할 여러분들과 그동안 노고를 한 않은 선생님들께 축하를 보낸다.”고 했다.


졸업장 수여식과 시상식(위) 회고를 하는 김우 자혜학교장(아래)


이어 시상식에 참석한 염태영 수원시장은 김문수 경기 도지사상과 수원시장상을 시상을 한 후 일일이 학생들을 안아주며 기념촬영을 마치고 나서

“여러분들은 남들보다 두 배의 축하를 받아 마땅하다”며 “오늘이 있기까지 함께 노력을 해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에게도 축하를 보낸다.”고 했다.

시상식을 마치고 축사를 하는 수원교육지원청 김국희 교육장


“오늘처럼 가슴이 벅찬 날은 없었다.”

자녀의 졸업을 축하하러 왔다는 이아무개(여, 46세)는 “오늘같이 기쁜 날이 없을 것 같다. 남들은 이 기쁨을 모를 것이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해, 속상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 이렇게 졸업을 하고 상까지 받는 아이를 보니 대견스럽다.”고 했으며,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에 축하를 하러 왔다는 정아무개(여, 33세)는 “이렇게 축복을 받는 졸업식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졸업을 하는 아이들 모두가 다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기도.


졸업식에 참석을 한 염태영 수원시장이 수상을 한 학생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졸업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 축하를 해주었으며, 경기도 도지사상은 고등부의 곽하선 학생이 수상을 했고, 경기도 교육감상은 고등부 김승우 학생이 수상을 했다. 또한 수원교육지원청 교육장상은 초등부의 최우진 학생이, 수원시장상은 초등부 여광현, 중등부 이도현, 고등부 안혜림, 전공과 안익찬 등이 수상을 했다.(학생들의 얼굴은 초상권 관계로 모자이크 처리를 하였습니다)

농진청 ‘잡곡 웰빙레시피’ 펴내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에서는 ‘우리 잡곡으로 만드는 웰빙레시피’(대표저자 고지연)을 펴냈다.

이 책은 예전부터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던 많은 잡곡들이, 이제는 다양한 건강기능성 식품으로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해서 발간을 했다고 한다. 요즈음 서구화된 많은 음식들을 사람들이 즐겨 찾으면서, 서구화된 식생활에서 오는 생활습관병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많이 먹는 잡곡은 그저 밥을 할 때 혼반용 정도로만 인식이 되어왔기 때문에, 잡곡을 이용하여 만든 전통음식 문화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이런 식문화의 변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각한 건강까지 위협을 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예전부터 전해내려 오거나, 새로이 개발을 한 조리법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레시피는 어른들 뿐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함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여섯 부분으로 구분해 소개

‘우리잡곡으로 만드는 웰빙레시피’는 모두 여섯 부분으로 구분을 했다. <든든한 아침>에서는, 잡곡죽 약곡죽, 바쁜 아침에 좋은 잡곡선식, 수험생에게 더 좋은 수수두부를 소개한다. <건강한 한끼>에서는 기력을 돌려드립니다 기밥, 피칼국수, 잡곡부침개, 메밀수제비, 메밀국수와 메밀묵채, 율무누룽지탕 등에 대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이 더 찾는 잡곡간식>에서는 팥카라멜, 수수팥떡, 잡곡 쿠키, 수수부꾸미, 수수머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선물하기 좋은 잡곡과자>편에는 잡곡꽃양갱, 잡곡강정을 만드는 레시피가 소개되어 있다. <식후 차 한잔>편에는 라면 먹은 후에 팥차, 고소 구수 힘나는 율무차와 당뇨에 좋은 쓴메밀차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잡곡의 영양성분과 성분들의 효능, 잡곡의 건강기능성 등, 잡곡에 함유되어 있는 각종 몸에 이로운 성분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인에게 맞는 ‘표준 잡곡비율’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표저자 고지연은 농학박사로 1994년 농촌진흥청에 들어 온 이후, 농업환경과 잡곡의 이용성 증진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 밀양에 있는 국립식량과학원 기능성작물부 기능성잡곡과에 근무 중이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90번길 19, 옛 구읍리에는 사적 제403호인 반월성이 있다. 반월산성은 총 길이 1,080m 이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이 반월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 에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눈길을 밟으며 반월성에 오르다

2월 5일 아직 산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모리산성을 돌아보고 난 뒤, 이어서 찾아간 반원성. 하루에 두 곳의 산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눈길에 오른 산행이라 다리도 아프지만, 그레도 인근에 있으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여름에는 차가 성지까지 올라간다고 하는데, 눈길에 위험할까봐 그런지 입구를 막아 놓았다. 할 수없이 걸어 오르는 수밖에. 길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미끄럽다. 언덕길을 올라 반원성의 남쪽 성곽 쪽으로 다가갔다. 수령 40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서부터 천천히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부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반월성은 성벽을 높게 쌓고, 일부구간은 안과 밖을 함께 성벽을 쌓아두기도 했다. 서쪽에는 문지인 듯한 곳 옆에 치성을 쌓았다. 이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상당하다. 성 위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왕방산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포천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에서 내려오는 길목, 고구려의 전진기지

성 위에서 보면 성 밑으로 난 길이 훤히 보인다. 철원으로 가는 길에는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보아, 반월성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에서 성벽 위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보니, 좁은 문루가 있었던 곳이 보인다. 암문이 있었던 곳일까?



조금 더 가니 건물터가 보이고 동편으로 난 문지가 있다. 반월성은 문을 그냥 바닥에 놓은 것이 아니라, 돌을 쌓고 그 위에 문을 내었다. 1m 가 넘는 축대 위에 문을 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문지 안으로는 건물터가 있고, 조금 더 가니 삐죽 내민 치성이 보인다. 반월성은 상당히 견고한 성곽이었을 것이다.



해발 283.5m의 청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테뫼식 석축산성인 반월산성. 고구려는 이곳을 남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신라는 북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천지역의 주성(主城0으로 역할을 했다. 이곳을 발굴 당시 <마흘수해공구단>이란 명문이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흘군’이 바로 포천지역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월성이란 마치 성이 반월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성 중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성이었다는 반월성. 고구려가 쌓은 이성은 통일신라 시기까지 사용을 하다가, 고려 때는 폐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반월성. 한 바퀴 돌아본 반월성은 상당히 요충지에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매우 견고하게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돌아본 반월성. 아마도 완전히 복원을 마친다면,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창단 된지 70년이 지난 동춘 서커스단에는 할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들을 젖혀두고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공연들이 있다. 바로 안전망도 없이, 고공에서 천으로 된 줄을 잡고 기예를 선보이는 사람이다.

2월 5일,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고모리 저수지 공터. 한 옆에는 고공크레인 한 대가 서 있다. 무엇에 사용하려 크레인까지 동원을 했을까 궁금했는데, 한 소녀가 나오더니 붉은 천을 고리에 걸고 타고 오른다. 그리고 그 천을 잡고 곡예를 펼치는 것이다. 단지 천 하나만을 잡고 곡예를 하는 소녀.





맨발의 소녀, 안전망도 없어

크레인에 매달려 온각 재주를 보이는 소녀는, 겨울인데 양말도 신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가닥으로 된 붉은 천을 잡고, 발과 몸을 감아 그 위에서 온갖 재주를 보인다. 갑자기 툭 떨어지는 듯도 하고, 양팔을 벌려 몸을 일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박수를 친다.





10여분 정도를 고공에서 재주를 보이던 소녀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저 열일곱 여덟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이다. 그런 소녀가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안전망도 없이 곡예를 하다니. 동춘 서커스라는 명성이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저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연습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절로 박수가 쳐진다.

어느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답사 다니시면 재미있겠어요. 전국 어디나 다 갈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문화재도 보고”

틀린 말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사실 답사라는 것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나처럼 ‘진한 역마살’을 갖고 있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답사로 풀어내는 것이 제격이기도 하다.

2월 5일, 포천시 소흘읍 산 64번지 노고산에 있는 포천시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성지’를 찾아 나선 길. 고모리 저수지 공지에서는 대보름 축제를 하느라 시끄럽다.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고모리산성이 어디 쯤 있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저 위”라는 대답이다. 시골 분들에게 ‘바로 저기’라는 말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을 때가 많다.



바로 저기가 눈길 한 시간을 올라

고모리산성지는 고모산, 혹은 노고산이라고 부르는, 해발 380m의 산 정상부를 에워 쌓고 있는 토축산성이다. 두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라고 하나,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성벽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전체길이는 822m라고 하지만, 남아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가파라 줄을 잡고 올라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눈길 산행은 정말 힘들다. 산 위에 오르면 소흘읍이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요충지이다.

‘바로 저기’라는 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용이하지가 않았다. 몇 번을 물어서 산으로 오르는 길. 눈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등산로라고 하지만,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산봉우리 부분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것이 정상인가 보다 생각하면 또 산이 나온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높지 않은 산을 오르는 길이 참 멀게만 느껴진다.

겨우 산 정상에 올랐다. 마침 이 산성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산 위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물도 준비하지 않고 올라간 산행. 숨이 턱에 찬다. 물 한잔을 마시고나서 성이 어디냐고 물었다. 성이라고 알려주기는 하는데,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이 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표시가 나질 않는다.



산행에서 만난 지역문화를 연구하시는 분들. 서 있는 곳이 바로 토축으로 쌓은 성곽이다

더구나 눈이 쌓여있고, 잡풀더미가 우거져 성의 흔적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나마 봄에 눈이 녹으면 일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부분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보이지가 않지만, 눈이 녹으면 일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한 성곽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백제 때 쌓은 성, 그러나 고구려가 더 오래 사용 해

원래 고모리산성은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는 세력이나, 남에서 북으로 진출하려는 세력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요충지인 셈이다. 산 정상에서 만난 이 지역의 성을 연구한다는 유대근씨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란 더욱 어렵다. 자칫 미끄러지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 고모리산성은 아마 100여명 정도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성이라기 보다는 주변을 감시하는 초병들이 묵는 성곽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백제 때 산성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을 보면 고구려의 것들입니다. 아마도 중간에 고구려에게 성을 빼앗겨, 고구려가 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라고 한다.

눈길 1시간여를 걸어올라 찾아간 고모리산성. 비록 성곽은 유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산성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짐승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를 때보다 몇 배는 더 고생을 하고 내려온 비탈길. 겨울의 답사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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