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곡산 줄기 부처박골에 가면, 마애보살좌상을 선각한 바위 옆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고려중기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설명이 된,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이 있다. 바위 밑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린 듯 촛불이 커져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석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웃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보아오던 마애불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우리가 흔히 즐겨있던 손오공의 이야기인 서유기가 삼존불 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삼존석불 안에 서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애삼존석불은 중앙에 본존불을 크게 돋을새김 하였다. 높이는 203cm인데 얼핏 보니 서유기의 손오공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혹은 다시 보면 저팔계와도 닮았다. 원래는 손오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코를 쪼아내서 저팔계와 비슷한 모습도 하고 있다.

마애삼존석불이 서유기를 본뜬 것은 아닐까

서유기는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이다. 오승은이 지은 책으로 승려인 현장이 천축국인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다.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602년에 태어나 6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현장을 따르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삼장법사를 따라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가면서 81차례나 모험을 한 끝에 불경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갑자기 서유기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이 마애삼존석불은 소고리 부처박골에서 산을 향하고 있다. 모두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좌상이다. 본존불과 양편이 협시불, 모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좌협시 보살은 60cm, 우협시 보살은 93cm의 크기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본존불은 손오공, 좌협시 보살은 사오정, 우협시 보살은 삼장법사를 닮았다.

마애불의 추정연대가 혹 1500년 이후는 아닌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하면 1150년 이후가 된다. 만일 이 마애삼존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한 것이라면,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한 서유기를 지은 시기와는 연대가 맞지를 않는다. 마애삼존석불의 문화재 설명문에는 막연히 고려 중기 이후로만 적고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마애삼존석불이 혹 150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지은 오승은은 15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혹 명대의 이 책을 보고, 누군가 그 서유기의 이야기를 마애불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삼존석불은 아무리 보아도 서유기를 도식화해서 만든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애삼존석불의 본존불을 보면 콧구멍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눈이나 생김새도 손오공을 닮았다.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부처의 상이 아닌 손오공이라는 생각이다. 함께 동행을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앙에 본존불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손오공'이라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나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도 왜 대뜸 손오공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삼존불 안에 손오공, 사오정, 삼장법사가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진 본존불. 고려조나 조선조의 마애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전혀 다른 조각의 형태. 그리고 토우 등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등, 이 삼존석불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도식화 되어있으며, 일반적인 불상조성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관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두광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협시보살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좌협시 보살을 보면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삼장법사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과 좌협시 보살이 삼도를 표현한데 비해, 우협시 보살은 삼도가 없다. 머리는 맨머리인데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서유기의 사오정과 같은 모습이다. 마애삼존석불을 돋을새김한 바위도 이 지역에서 보이는 바위와는 재질이 다르다.


바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있다.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의 돌과는 전혀 다른 석질인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바위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저 마애삼존불이 내 눈에는 서유기의 인물들 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동안 너무 많이 돌아다녔더니, 이젠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어가는가 보다.

인근에는 없는 석회암같이 구멍이 뚫려있는 바위. 그리고 서유기의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과 같은 인물의 표현. 이 마애삼존석불을 떠나면서도 머릿속이 혼돈스럽다. 왜 저것이 서유기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이 계속되는 것이지만.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과 휴양, 혹은 능원 등에 참배를 하기 위해, 정궁을 벗어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행궁은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왕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 다니던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이다. 기록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남군영의 건물과 신풍루에서 바라다본 남군영의 지붕(뒤편 좌측), 그리고 신풍루에서 바라다 본 북군영의 지붕(뒤편 우측. 맨 아래)


능원의 참배와 정조의 힘을 보이기 위한 곳

화성 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다. 화성 행궁은 단지 능원의 참배뿐이 아니라, 정조대왕이 양위를 하고 난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직접 살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그만큼 딴 행궁에 비해 정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궁과는 그 규모와 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한남정맥의 중조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남진하여, 광교저수지에 모이게 된다. 이 물은 다시 화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수원천으로 남진해 서해로 흘러든다.


남군영의 행각. 장용외영의 기마병들이 묵는 곳으로 방과 광(무기고, 식량창고 등), 100명의 장용외영의 기마부대가 묵었던 곳이다.


산과 물이 일체가 되어 있는, 그 기가 모이는 곳에 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지으면서, 진남루라는 행궁 정문의 이름을 ‘신풍’으로 바꾸어 달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제2의 고향으로 화성을 마음속에 둔 것이다.

정조의 위엄은 군영에 있었다.

정조대왕이 화산으로 행차를 할 때보면,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위엄을 느낄 수가 있다. 아마도 정조는 강력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 정조는 자신의 금군이었던 장용외영을 화성에 주둔시켰다는 것만 보아도, 정조가 생각한 화성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장용영은 정조의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를 혁파 한 후, 정조 9년인 1785년에 설치된 금군 조직이다.


남군영의 현판과 남군영 대청에 전시가 되어있는 당시의 갑주들


정조는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 발전시킨 군영을 조직하여,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편제를 조성했다. 이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화성에 주둔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풍루 좌우에는 군영이 자리하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좌, 우측에 자리한 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원래 이 군영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며, 정조 18년인 1794년에는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의 기마부대를, 화성과 행궁을 위주로 주둔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화성을 거점으로 한 강력한 군주상을 세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먼저 충직하고 강력한 군권만이, 강한 군주를 만들기 있었기 때문에.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가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변 무릉리. 정자 앞에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 빼앗길 뻔하다

더욱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시골의 촌부들이 지켜낸 어제시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의 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숙종임금의 어제시 현판이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놓인 것을 많은 돈을 주고 돌려받은 무릉리 요선계원들. 그들이 진정한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요선정으로 오르는 숲길 입구에 있는 작은 암자에 차를 대놓고, 주천강 옆으로 난 숲길을 오른다. 강바람인지 바람 한 점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난다. 예전에는 요선계원들이 지켜 온 어제시를 이제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지키고 있는 것인지.

화성행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누문이다. 처음에는 6칸으로 된 문을 세우고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정조는 1795년에 문의 이름을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정조는 이름을 고치고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리기도 했다.



2월 13일, 신풍루에 오르다

정조 18년인 1794년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는 누대 양편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하였다.

2월 13일(월) 화성 행궁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간 곳이지만, 신풍루는 아래에서만 사진을 찍었을 뿐, 위로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 때문이다. 화성사업소에 들려 신풍루를 촬영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신풍루로 올랐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


신풍루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123번지에 소재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인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는 신풍루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신풍루 위로 올라보니, 팔달문 밑으로 놓인 행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문밖으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도로와, 건너편 창룡문 쪽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아마도 이 행궁을 짓고 난 정조 당시에도 이곳 신풍루 앞은 이렇게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뒤로는 팔달산을 끼고, 앞으로는 넓은 도로를 볼 수 있는 곳, 이 신풍루의 누각에 올라 정조는 마음속에 담은 큰 뜻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장초석으로 바친 기둥, 장엄함의 상징

6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신풍루는 위로는 누마루를 놓고, 아래는 3개의 얼문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행궁의 정문 또한 남다른 신경을 써서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키만한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층 누각을 받치게 하였다. 안쪽으로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삼문은 판문으로 해서 달았으며, 문의 좌우에도 판벽을 둘렀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누각은 가파르다. 그만큼 누각을 높였다는 것이다. 누마루를 깐 이층에는 사방을 둘러 난간을 달아냈다.


이층 누각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남군영과 북군영의 지붕들이 보이고, 팔달산 쪽으로는 시원하게 공간을 내어 정전의 바깥 출입문인 좌익문을 만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행궁의 문인 신풍루. 아마도 이 신풍루의 이름을 직접 지은 정조는, 이 누각 위에서 강한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을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번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인 ‘농성(農城)’이 있다. 이 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이다.

전체적인 성곽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다. 토축은 비교적 가파르게 조성을 하였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쌓은 토성

이 성을 쌓은 이유는 분분하다.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이 성은 평지에 만든 소규모의 토성으로, 이런 흙으로 쌓은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우물터가 어느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임팔급이 쌓았다고 전하는 농성

농성의 남쪽 문터를 바라보고 좌측에 동상이 한 기 서 있다. 바로 이 농성을 축성했다는 임팔급의 동상이다. 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한국 임씨의 시조이신 충절공 임팔급(林八及)은 신라의 이부상서에 오르셨을 때 적병이 변방을 침입하므로, 공이 분연히 토벌하여 위난을 공정한 공훈으로 팽성군에 봉해지고, 신덕왕조에서 충절공의 시호를 받았다.

충절공은 중국 당나라에서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병무시랑 예부상서로 있을 때,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칠학사와 함께 서기 850년 전에 우리나라 평택 팽성에 오시어 이 농성을 쌓고 정주하였다.(하략)」




익산임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임팔급은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내고, 신라에 들어와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평택 용포리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그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익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에 쌓은 성으로 추정

임씨종진회에서 농성 앞에 임팔급의 동상을 건립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이란 나라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쌓는 것으로, 일개인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더욱 이 농성에서 발견된 토기편이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이 평택일대의 관방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파산성에서 ‘건덕3년’이라는 명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건덕3년이면 고려 광종 7년인 965년이다. 2004년에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비파산성에서 ‘차성(車城)’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이 농성 역시 고려 때의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농성 부근에는 조선조의 객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농성부근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곳은 고려 때의 곡창을 보호하는 성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농성(農城)’이라는 명칭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농성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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