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괴강이 흐르는 곳에 바위 암벽이 솟아오른 곳이 있다. 조선 시대의 경승지인 제월대에는 조선조 선조 때의 유근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정자와 고산정사를 지었다. 선조 29년인 1596년에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광해군 때에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를 하였다는 것.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에는 '孤山精舍 在君東八里 乙亥年 位火燒盡'이라고 적고 있다. 즉 '괴산군의 동쪽 8리에 있는 고산정사가 을해 년에 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이나, 만송정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송정을 '고산정(孤山亭)'이라 고쳐 부른 것으로 보인다.



괴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산정

고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괴산IC를 벗어나 괴산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제월리가 나온다. 그곳서 괴강을 굽어보고 있는 고산정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고산정을 오르는 산 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편에 제월대의 내력을 적은 석비가 서 있다. 눈이 덮인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눈이 쌓인 계단을 올라 괴산정 가까이 가니, 2월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자에 오르면 많은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고산정은 사방을 개방하고 낮은 난간을 둘렀다. 기단위에 주추는 원형으로 다듬어 기둥을 받쳤는데, 툇돌 하나가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위에 오르니 이원이 썼다는 고산정이라는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선조 39년인 1606년에 쓴 '湖山勝集'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강과 산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명나라 사신 웅화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쓴 '고산정사기'도 보인다.

400년 역사의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보다

고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밑을 흐르는 괴강이 아름답다. 봄철이 되면 저 물속을 다니며 올갱이를 잡는 아낙네들을 그려본다. 그 또한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까? 양편으로는 괴강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편액의 글씨를 보아도 이 고산정의 역사는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많은 사람들. 편액과 기문을 쓴 사신 주지번과 웅화도, 그리고 이 정자를 지은 유근도 모두 이 경계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곳을 찾아 든 많은 시인묵객들도 모두 주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나 역시, 오늘은 이곳의 주인이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생각이 아닐는지. 오늘 난 고산정의 주인이 되어 말없이 흐르는 괴강을 내려다본다.

'이 곳의 참나무들이 참 이상해요'

한참을 괴강을 굽어보며 혼자 상상 속으로 빠져 절경을 느끼고 있는데, 답사에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이 흥을 깬다. 주변에 선 참나무들이 아상하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고산정 주변에 있는 참나무들이 모두 구멍이 뚫려있단 이야기다. 그 말에 주변의 참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나무들이 한 곳씩 깊게 파인 홈이 있다. 이것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나 않을까?



아마 이 나무들이 여자들인가 보다. 이 제월대와 고산정의 뛰어난 경치에 반한 수많은 남정네들이 찾아왔으니, 그 남정네들을 사랑한 근동 여인들의 마음이 이리 되지나 않았을까? 괜한 말을 해놓고도 멋쩍어 키득거리고 웃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괴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럽다. 강 쪽으로 내려가 제월대를 바라보니, 위쪽 까마득하게 고산정이 보인다. 위에서 괴강을 내려다보아도 장관이요, 아래서 제월대를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산정을 짓고, 시심을 일깨운 것이 아닐까? 흰 눈이 쌓인 겨울 경치는 또 다른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만든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한 사나사에 가면, 딴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에서 인물의 영정을 모신 전각은 조사당이라고 하여, 절과 관계가 있는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런데 사나사에는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함왕성주 함규를 모셔 놓은 전각이라는 함씨각. 왜 사나사에는 이런 함씨각이 있는 것일까?

양근을 근원지로 한 양근 함씨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 인근에 소재한 함왕성은 별칭 함공성(咸公城), 양근성(楊根城), 함씨대왕성 이라고도 불렀다. 포곡식 석축 산성인 함왕성은 해발 1031m의 봉우리를 기점으로 사나사가 있는 계곡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함왕성은 현재 700m 정도의 무너진 석축이 남아있는데, 그 내성의 규모가 2km에 달한다고 하니 작은 성은 아니다. 석축의 성벽은 거의 무너졌다고 하는데, 눈이 쌓인 함왕성을 오르지를 못해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양근에는 이 함왕성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성 밖 계곡 아래 있다는 함공혈이라 부르는 바위굴에서 삼한시대에 주악이라는 함씨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근 함씨의 시조 함혁이 삼한시대에 석성을 쌓고 스스로 함왕(咸王)이라 칭했으며, 이곳을 세거지로 정한 함씨들이 이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웅거하였다가 멸망하였고, 그 자손들이 본관을 양근으로 삼았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지방에 산거한 호족들이 각지에서 스스로 한 세력을 일으켜 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양근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 중 함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스스로를 함왕이라 칭한 듯하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에게 귀속하여 후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런 연유로 함규는 개국공신이 되고, 그가 죽은 후 사나사를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을 살펴보면 1등 공신에는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있고, 2등 공신에는 유금필,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왕희순, 김훤술, 윤신달, 박윤웅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3등 공신에는 왕식, 염태, 평견, 권행, 박희술, 능식, 권신, 염상, 전락, 연주, 마난 등이, 4등 공신으로는 김홍술과 박수경이 공신록에 책봉이 되었다. 함규는 개국공신 중 2등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함공혈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눈이 많이 쌓여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역사의 흔적은 늘 색다른 이야기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수많은 난 속에 함씨각의 존재가 있어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씨각은 미타전 옆에 마련되어 있다. 1칸으로 된 함씨각 안에는 함규의 영정인 듯한 탱화가 걸려있다. 언제부터 함씨각이 있었는지는 정확지가 않다. 하지만 함규가 사후에 사나사를 원찰로 삼고 함씨각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양근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했던 함씨들이, 사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규라는 고려의 개국공신을 이곳에 모셔, 함씨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사나사에 있는 함씨각은 그렇게 색다른 이야기로 찾는 이를 즐겁게 만든다. 눈이 쌓여 발목까지 빠져들지만, 겨울 답사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사인비구의 범종은 각기 독특한 형태로 제작이 되어,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사인비구의 범종은 8개의 종이 나름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다양한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

사인비구의 동동 중에서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동종(보물 제11-1호)이다. 서운암 동종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물 제11-2호 문경 김룡사 동종과 제11-3호 홍천 수타사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딴 종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 형태로는, 보물 제11-4호인 안성 청룡사동종과 제11-8호로 지정된 강화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된 양산 통도사 동종은 팔괘를 문양으로 새겨 넣어 딴 사인비구의 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욱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겨 넣는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는 방법을 택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보물 제11-5호인 서울 화계사 동종과 보물 제11-7호인 의왕 청계사 동종 등이 있다. 이렇게 8기의 보물로 지정된 종들은 독창성을 갖고 있어 당시 범종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범종의 전통성을 따른 안성 청룡사 범종

청룡사의 동종은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4년에 제작한 안성 청룡사 동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색다르다.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에는 대나무 모양으로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용뉴에 새겨진 용은 네 개의 발로 종을 붙들고 있는 형상이며, 이마와 볼에는 뿔이 나 있다. 얼핏 보아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용뉴에 보이는 조각 하나만으로도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이는 것이 사인비구의 동종이다.


포탄 모양 종신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둘렀으며, 어깨띠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을 한 줄씩 새겨 넣었다. 밑으로는 사다리꼴 유곽 4좌가 있고, 그 사이에는 각각 연꽃 가지를 든 4기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폐가 한 쌍으로 마련됐다.

유곽은 각각 사다리꼴로 사방을 두 선으로 이루어 선 안에 꽃잎이 그려져 있고, 여기에 유두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 위폐 안에는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서울 화계사 동종에는 같은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이러한 범종의 제작기법은 17세기 중반에 정통 승장계 장인들이 주로 쓰던 기법으로 전한다. 사인비구가 30대 때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안성 청룡사 사인비구주성동종은, 지준, 태행, 도겸, 담연, 청윤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범종계열이다.

작은 종에 새겨진 불심

사인비구는 왜 이렇게 범종을 만들었을까? 물론 승장(僧匠)으로써 신라 범종계의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를 돌면서 종을 만들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나의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룡사 동종도 종루의 종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웅전 안에 보관하고 예불 시에 이 종을 이용한다.



사인비구는 이 종 하나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도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이 종을 제작하면서 그 업보가 가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승장으로서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안에는 사바세계에 사는 많은 중생들의 업장소멸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서 두드려도 맑은 소리가 울려나는 청룡사 동종. 그 안에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무형의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세속의 더럽혀진 귀를 씻고, 마음의 편안을 얻으라는 사인비구의 간절함이 깃든 것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이십사반(武藝二十四般)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조선조 정조(正祖)의 명으로 편찬되었으며, 간행 연대는 미상이다. 모두 4권 4책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는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편찬했다. 선조 31년인 1598년에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 武藝諸譜〉와, 영조 35년인 1759년에 나온 〈무예신보 武藝新譜〉를 증수하여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한 책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완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무예통지 武藝通志〉,〈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실제로 무기를 다루는 그림을 통해서 해제를 기록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무예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무술까지 기록하고 있어, 무예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24반의 무예는 본국검, 예도, 제독검, 쌍수도, 쌍검, 마상쌍검, 등패. 쾌검, 왜검교건, 월도, 마상월도, 협도, 장창, 기창, 죽장창, 기창, 당파, 낭선, 권법, 곤봉,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의 24반이 수록되어 있다.

24반 무예를 보여주는 사람들

3월 10일. 수원 화성 행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전과 오후 주말이 되면 하루에 두 차례씩 정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병기총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각종 무술을 보여주는 24반 무예의 시연이 잇기 때문이다. 행궁 앞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모여, 시연을 보면서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밤 무예를 시연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조 이산이 장용영의 군사들을 통해 강한 왕권을 추구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기 위해 140여권의 각종 서책을 인용할 만큼 다양한 무예에 대한 모든 것을 적었음을 보아도, 이 한권의 책이 대단한 무예총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4반 무예보기>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곳에서 마을주민들을 지켜 온 돌미륵. 그저 평범한 돌에 얼굴은 언제 사라졌는지, 딴 것을 올려놓았다. 아마 이 미륵이 영험하다고 소문이나 났던 것일까? 이천시 모가면에 있는 미륵댕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곳은, 이천시 두미1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200여 년 전에 두역동(豆亦洞)이라는 마을과 시미동(侍美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두 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두미리라고 불렀단다. 미륵댕이라고 부르는 두미1리에는 450년 전 난폭한 산적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그 산적으로 인해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장사가 마을에 찾아들어 이 산적을 내쫒고, 이곳에 큰 미륵을 세웠다고 한다.


450년 주민들과 함께 한 미륵

그 뒤부터 이 마을을 미륵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을에 전해지는 설화야 진위여부를 따질 것이 없지만, 마을에 미륵이 45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미륵댕이 설화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미륵댕이 숲이다. 오래 묵은 고목들이 미륵이 있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두미리의 미륵댕이 숲은 가히 절경이다. 돌미륵 앞에 떨어진 낙엽들이 장관이다. 왜 치우지 않느냐고 마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보기가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보다 미륵댕이 숲에 나무를 함부로 다치면 벌을 받는다고도 한다. 어디를 가나 전하는 신령한 나무에 관한 이야기지만, 미륵댕이 숲의 분위기는 그보다 더 신비할 듯하다.


두미리의 사람들은 이 미륵댕이 숲에 자리한 미륵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미륵은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1m 남짓한 미륵, 마을의 구심점이 되

미륵은 1m 남짓하다. 머리는 얼굴모양의 돌을 얹었는데 원래의 머리가 아닌 듯하다. 목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미륵의 몸통에는 희미하나마 윤곽이 보인다. 아마 처음에는 미륵의 형태를 가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를 얹어 균형이 잡혀있지는 않다. 앞에는 시멘트로 단을 만든 것으로 보아, 이 돌미륵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의 사방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커다란 돌을 얹어놓았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돌지붕도 산적을 내쫒은 장사가 얹어 놓은 것이 된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야 어떻든, 이 돌미륵으로 인해 마을에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마을을 지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가을날 찾은 미륵댕이.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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