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화성시로부터 보도자료 하나를 받았다. 내용은 2012년 3월 4일(일) 오전 10시부터 화성시 궁평항 특설무대에서 ‘2012 화성시 궁평항 풍어제’를 한다는 소식이다. 옛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궁평항에 기점을 둔 많은 배들이 올 한해 풍어를 기원하는 지역 축제라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침 일찍 궁평항으로 달려갔다.

썰렁한 축제장, 날씨마저 방해를 놀아

며칠 동안 봄날 같은 포근한 날이 계속되었다. 뉴스에서는 남녘에는 벌써 꽃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고, 연신 봄이 다 온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3월 4일 궁평항은 바람도 불고, 날씨마저 차다. 행사장에는 축제장답지 않게 사람들도 많지가 않다. 이 날 궁평항 풍어제는 오전 10시에 ‘신청울림’으로 시작을 해, 오후 5시 50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짜여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니 이상하다.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에서 풍어제(굿)를 한다고 하는데, 굿의 제차를 보니 경기도굿이 아닌 황해도 굿이다. 세경들이, 초감흥, 초부정, 영정거리, 땟배나가기, 타살굿 등 이런 거리 제차는 모두 황해도 굿에서 나오는 굿거리 명칭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특설무대에서는 황해도 만신들이 굿을 진행하고 있었다. 경기도 땅, 그것도 화성시의 궁평항에서 문화의 전승을 위해 마련한 풍어제에서, 얼토당토않은 황해도 굿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성은 재인청의 무부들과 신내림을 받은 무녀들에 의해, 경기도 굿의 중심지에 서 있는 곳이다.


화성은 특별한 곳이다.

딴 곳이라고 한다면, 그저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화성이라는 곳은 경기도 내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화성은 예부터 수원을 중심으로 한 재인청이 있던 곳이다. 재인청이란 굿을 하는 무부, 소리를 하는 창부, 재주를 부리는 재인, 그리고 옛 무기(舞妓)들이 교방청이 문을 닫고 난후, 그 무기들까지도 등록을 한 후에 기예를 부릴 수 있도록 한 예인집단이 있던 곳이다.

재인청이란 조선조 말기, 세습 무녀와, 화랑, 재인, 광대 등 직업적인 민간 예능인들의 예능 및 사회 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했던 조직체이다. 재인청은 광대청, 혹은 장악청이라고도 불렀으며, 그에 속한 인원이 많았을 때는 3만 여명이 넘었다고 하는 대규모 예인집단이었다. 그렇다고 이 재인청이 관 주도적인 조직이 아니었다. 이 재인청은 각 지역마다 재인청을 두었는데, 그 재인청의 우두머리를 대방이라고 하였다.


이 재인청들을 모두 관장하는 곳이 당시 화성재인청이었으며,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3대를 재인청의 도대방을 지낸 이용우 일가가 살았던 곳이 바로 현 화성시요, 그 외에 수많은 무부들이 화성을 근거지로 살아왔다. 이런 화성시에서 전통문화 보존 운운하면서, 정작 굿은 황해도 굿을 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가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갑신완문(1824)’에 팔도재인 편에 보면

「팔도 재인들은 병자년(인조 14년, 1636) 이후로 칙명을 가져오는 사신의 행차를 위해 좌우 산대를 거행한다. 재인 중에는 도산주라 불리는 소임을 가진 자가 있는데 각도와 읍에서 재인들이 도산주를 취하여 올려 보낸다. 이들은 각각에게 맞는 마땅한 준비로, 행사를 받들게 한다. 갑진년(정조 9년, 1784) 이후에는 좌우 산대가 설행되지 않은 까닭에 옛 법을 개선하여 준수하도록 할 계획으로 팔도 도령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산대) 설행을 위한 대방 회의 후, 각도의 소임일 뿐이나 한 명씩 차별을 두어 정하기로 하였다.」

고 적고 있다. 지역에 전하는 재인청 이야기에 의하면 화성의 재인청에 속한 인물들이 정조의 능행차시 많은 연희를 담당하였다고 한다.(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증언) 이렇듯 화성시는 수원과 더불어 경기도 굿의 전승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화성시 궁평항에서 전통문화 운운하면서 황해도 굿으로 풍어굿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경기도에서는 경기도 굿을 해야 마땅하다.

사실 황해도 굿이 경기도에서만 굿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황해도 서해안 풍어굿’을 ‘서해안 풍어굿’으로 지정을 하고 난 후,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서해안 지역이 황해도 굿으로 진행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에 따라 굿의 제차가 다르고, 지역적인 특색을 가진 굿이 전승이 되어 온다.

황해도는 황해도 굿, 경기도는 경기도당굿과 강신무굿인 경기안택굿, 충청도와 전라북도는 독경자에 의한 앉은 굿, 전라남도 지역은 씻김굿, 남해지역은 남해안 별신굿, 동해안 지역은 동해안 별신굿, 그 지역마다 모두 지역 나름의 특징적인 굿이 전승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특징적인 굿들은 각기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한 지역의 전통문화유산을 전승,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나름의 전통적인 것을 찾아 그것을 전승시켜야 마땅하다. 요즈음 지역 축제들이 기획사라는 곳을 선정하여 행사를 맡기고 있는 가운데, 정작 지역의 문화유산은 홀대를 받고 있다.

적어도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문적인 지식을 자문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지역과는 전혀 무관한 황당한 굿거리 제차를 보면서, 또 하나의 문화가 변질이 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인다. 그것도 재인들의 중심지였던 화성시라는 곳에서.

한국민속촌 양반가 안초당과 사당

수원 남창동에서 민속촌으로 이건 복원을 한 99칸 양반집. 중부지방 양반집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이 집은, 한 마디로 입이 벌어진다고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2월 18일 찾아갔던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둘러본 집이다. 이 집의 답사기 중 다섯 번째로 안초당과 사당을 소개한다.

99칸,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인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99칸이라고 소개를 하는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 등을 둘러보았으나, 이 남창동 양반가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 남창동 가옥은, 앞으로도 이 만한 집을 만나기가 힘이 들 것이란 생각이다.


 



시집을 가기위한 수업을 하는 안초당

‘안초당’이라는 이름은 양반가의 안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지붕을 초가로 엮어 안초당이라고 부른다. 안초당은 내당을 바라보고 좌측에 낸 작은 문을 들어서면 초가로 된 집이다. 안초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작은 건물이다. 안초당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방이고, 남은 두 칸은 마루방이다.

그러나 이 한 칸은 앞뒤로 구분을 하여 두 개의 방을 드리고, 남은 두 칸을 마루를 깔았다. 이 안초당은 시집을 가기 전의 집안의 딸들이 거처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예, 자수 등을 배우면서 시집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모든 집들이 와가인데 비해, 왜 안초당을 초가로 꾸몄을까? 안초당 뒤편에는 연못을 마련하고, 마당은 비교적 너르게 배치를 하였다. 집은 겨우 세 칸 밖에는 안 되지만, 한 마디로 시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꾸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고래 등 같은 집에서 겨우 세 칸의 초가로 엮은 안초당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것만 같다.


집의 맨 위에 자리한 사당

사당은 어느 집이나 규격이 비슷하다. 대개는 정면 세 칸에 측면 한 칸으로 마련한다. 이 사당은 집의 크기와 관계없이 이런 구조로 나타난다. 양반집의 사당도 예외는 아니다. 99칸 양반집의 사당은 초당을 끼고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협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자리한다. 대개의 사당은 정침인 안방의 후원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하기에 집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신령스러운 곳을 선택한다. 양반집의 사당은 바닥을 모두 마루방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앞으로 세 짝의 문을 달아냈다. 안에는 항상 제물을 차려놓아 이곳이 제를 지내는 사당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99칸 양반집을 돌아보고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양반집을 소개했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웬만큼 큰 집도 한 번에 끝냈는데, 이 남창동 99칸 집은 그런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줄행랑이나 회랑, 안초당, 내별당, 외별당 등,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각들의 명칭도 다양하다. 그만큼 이 집의 넓이나 전각들이 대단하다.



수원 팔달산 기슭에 있었다는 중부지방 양반가. 어찌되었거나 수원으로서는 대단한 문화재 하나를 잃은 셈이다. 이 양반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재현을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명물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양반가를 돌아 나오면서 못내 아쉬웠던 것은, 이 집이 팔달산을 배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함이다.

집을 날마다 해체하는 여인이 있다. 도대체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화가 박남희(여, 49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왜 그냥 집이 아니라, 집을 모두 펼쳐서 그림 안에 집어넣었을까? 3월 3일 오후에 평촌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의 조형예술은 ‘집’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집이란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집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것을 바라보고 관심을 갖는 대상은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일상은 ‘일탈’을 도출하는 ‘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가 박남희.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귀인중학교 앞 작업실에서 만났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화가

화가 박남희는 그 동안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성보갤러리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후, 200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회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관훈갤러리에서 3회를, 2010년에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갤러리에서 현대미술 초대전을 열었다. 그동안 단체전도 열심히 했다.

1999년 전통과 현대의 만남전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것을 비롯하여, 2008년 중국에서 한일문화교류전, 2009년에는 공주 원골에서 예술과 마을 설치제, 2010년 2010 Project- C전 등 20여 회의 단체전을 열었다. 현재 서울미술협회 회원이면서 아트플래시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저는 그림을 늦게 접했어요. 어려서부터 시작을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늦게 그림을 시작했죠. 30대 초반에 시작한 그림이, 이제는 전업화가가 된 것이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는데, 46세에 졸업을 했으니 참 늦은 셈이죠.”

그런 그녀가 그림에 푹 빠진 것이다. 집을 풀어 그림으로 표현을 하는 그녀의 작업은 늘 꿈으로 가득하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사고나 감정이죠.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죠. 집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 안에 ‘꿈’을 그려 낼 수가 있는 것이죠,”

'집의 조각들'이란 개인전을 관훈크럽에서 기졌을 때의 작품 


그림속의 색채의 조화로움에 희열을 느껴

화가 박남희, 그녀의 그림 속에는 집안의 모든 것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 속의 이미지보다 오히려 색채를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색채의 조화를 그려내다가 보면, 현실의 표면적인 현상보다도 본질과 자아의 내면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미지로 규칙과 제약이 없는 일정한 질서 속에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죠. 화가는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끝없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작업 안에서 느끼는 희열이 없다면, 아마도 아무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좌절과 희열이 반복되면서, 나의 무의식이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을 가장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남희 작 <다섯 개의 구름기둥>. 그녀는 집을 평면화하여 그 안에 꿈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인 집이라는 건축이미지를 해체하여 평면화 시키고 있다. 그 안에 친숙하고 구상적 이미지인 하늘이나 식물 등의 이미지를, 평면과 입체의 이중적 공간을 다시 한 화면 속에 안착시킨다. 그것은 사물에 대하여 낯설음과 익숙함을 동시에 깨달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림은 내 영원한 동반자, 돈으로 따지고 싶지 않아

“저는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따듯한 느낌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그림을 보면서 본인의 현실적인 일탈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죠. 책장 속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계단, 또는 반복적인 패턴화 된 층계, 안과 밖이 모호한 문 등,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구성을 그런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죄스럽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다 볼수록 자꾸만 빠져드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을 느낀다. 아마도 화가 박남희의 말대로 그 그림 속에서 나의 일탈을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하느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가정이 있으니 가족들의 도움도 받고, 초대전도 해서 충당하고 있다는 대답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팔기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저는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돈이 목적이 된다면 그 안에 참다운 사고가 피어나질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예술은 신선해야 아름다운 것 아닌가요?”

되묻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저 세상 속물인 기자 하나가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렸나보다. 3~4월 경에 그룹전이 있어 요즈음은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한다는 화가 박남희. 그 전시회가 기다려지는 것은 또 다른 건조물의 펼쳐짐 때문이다.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소재한 봉선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국사인 탄문이 창건한 절이다. 법인국사는 운악산 기슭에 절을 짓고 이름을 운악사라고 하였다. 운학사는 조선조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통합이 됨에 따라 혁파되었던 절이다.

그 뒤 조선조 예종 1년인 1469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이름을 봉선사로 개명하였다. 그 뒤 명종 6년인 1551년에는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차례나 훼손되어 다시 중수를 하였다.



봉선사 대종과 괘불이 전해

봉선사는 한국전쟁 때 150칸이나 되는 전각들이 완전 소실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모두 근래에 들어 다시 중창한 것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조선 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보물 제397인 대종이 남아있다. 이 대종은 1469년에 제작한 종으로, 이렇게 큰 대종을 당시에 주조하였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2월 26일 오후, 의정부에서 봉선사로 향했다. 봉선사를 찾아가려면 광릉내 숲을 지나야만 한다. 엄청난 고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길을 지나 봉선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이다. 봉선사 일주문 앞에는 많은 차량들이 서 있고, 연신 사람들이 경내로 들어선다. 아마도 모처럼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듯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배터리가 아웃이라니

봉선사 주차장에서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길을 굳이 차를 갖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불안하다. 밖에 차를 대고 걸어도 불과 10여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아니던가?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와 하마비가 서 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선방을 촬영하다가 보니, 배터리가 떨어져 버렸다.

이럴 수가 있나, 여유분의 배터리는 차에 두고 왔는데 난감하다. 할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렇게 휴대를 한 손전화를 이용해서라도 답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16동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청풍루를 비롯해, 운하당과 관무현, 대웅전의 양편에는 관음전과 지장전이 서 있다.



대웅전의 뒤편으로는 조사전과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경실과 개건당, 방적당, 동별당, 서별실, 종루 등이 자리한다. 휴대폰으로 하나하나 촬영을 하다가 보니 영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나마 고맙게 생각을 할 수 밖에.

화마를 입고도 남아있는 대종

봉선사의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주조된 종 중 몇 개 남지 않은 조선 전기의 동종이다.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왕실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의 이 종은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져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형태이다.




종의 몸통 위부분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이 종을 제작하기 위해 대대적인 불사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시간 이상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종각으로 향했다. 그러나 종각은 출입을 통제시켜 놓아,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가 없다. 다행히 또 하나의 대종을 본떠 만든 종이 축대 위에 있어, 그곳에서 보물 대종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주말, 광릉내 숲과 함께 돌아보기 좋은 봉선사. 날도 풀렸으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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