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어느 종교가 그럴 수 있을까? 요즈음은 그저 종교란 것들이 어째 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면 사람들은 곧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는 한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고려암. 집 대문 앞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란 간판이 걸려있다. 벌써 이 집터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온 지가 40년 가까이 되었다는 고성주(남, 56세). 크지 않은 몸짓에 천생 여인네 같은 모습이다.

말을 하는 것이나, 집안에 먼지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이 넓은 집을 언제 다 쓸고 닦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18세에 신내림을 받고 지금까지 한 결 같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하고 있다. “무녀가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수양부리들 잘 건사하고, 늘 마음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비는 일 빼고는” 그래서인가 이 집의 단골들은 대개가 대물림 단골네들이다.


“아버님, 저희 아이가 잘될까요?”

나이가 동년배 인듯한 여인이 고정주에게 하는 말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곧잘 귀를 의심하게 된다. 비슷한 나이에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쓰다니. “어멈아, 걱정하지마. 올 해는 잘 될 거야. 3~4월까지는 조금 힘들겠지만, 그 달 지나면 다 풀릴 테니.” 아버님이란 호칭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이 그저 불편함이 없이 들린다. 그 또한 이 집의 내력인 듯하다.

“예전에 신부모님들이 그렇게 수양부리들을 불렀어요. 저도 그렇게 듣고 배운 것이죠. 우리 집은 대개 대물림 단골네들이라 오히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단골네들이 불편하다고 해요”

그저 곁에서 듣고 있노라면 그 나긋한 목소리 안에 대단한 카리스마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춤 잘 추고, 소리 잘하고, 굿 잘하고. 도대체 빠질 것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고성주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신내림을 받은 것일까?


맞이굿에서 신나게 창부를 놀고 있는 고성주(위) 신령을 모신 전안(아래) 전안은 밝고 먼지 하나가 바닥에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신령을 모신 전안은 어둡고 더럽다면 그 곳에 무슨 좋은 신령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병을 앓았어요. 그런 일로 인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보아야죠.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만신이셨고, 고모 또한 만신이었죠. 고모는 박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모가 데려다 키우는 바람에, 남의 성을 갖고 살기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파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를 못했어요. 한 달이면 고작 일주일이나 학교를 갈 수 있었으니, 무슨 공부인들 제대로 했겠어요.”

그런 그가 그 많은 굿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타고난 무당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타고난 끼도 다 그런 길을 가기위해 준비를 한 듯하다. 수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바쁘게 준비한 음식 하나라도 대접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18세에 받은 신내림,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속속들이 본 사람들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처음 내림을 하고 난 후 신령님들의 화분을 이천에 가서 모셔왔어요. 그런데 한 겨울인데도 뱀들이 득실거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들어가니까 어디로 슬그머니 사라지데요.”

함께 동행을 했던 사람들이 정말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하기야 고성주의 기이한 행적으로 본다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수양부리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책으로 몇 권을 엮어도 모자랄 판이다. 하기야 40년 가까운 세월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과 복을 주었으니,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필설로 어찌 다하랴.


운 맞이 굿에서 수양부리에게 운시루를 건네주는 고성주(위) 굿판에는 악사와 무녀들이 함께 동참을 한다.


“그동안 정말 많은 수양자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는 했죠. 매일 보다시피 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지노귀굿을 하면서 속으로 울기도 많이 했죠. 그럴 때마다 제가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슬퍼했죠.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축원을 해주면서, 자식들이 모두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마 전 다음 세상에도 우리 수양자식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남의 본이 되는 것이 만신의 길이라고 하는 고성주

지노귀굿을 할 때면 유난히 공을 들이는 만신 고성주. 그가 가진 품성은 평소 하는 행동을 보면 그대로 보인다. 벌써 30년 가까이 자비를 들여 경노잔치를 열었다. 고기를 삶고, 음식을 하고 술과 음료를 대접한다. 거기다가 자신이 가르친 춤꾼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한다. 구경을 하는 어르신들도 절로 흥이 난다. 한 해도 거르고 넘어간 일이 없다.

함께 굿을 하고 있는 신딸인 이정숙. 이들은 영적인 부녀관계이다.


“아버님 여기 있던 밥 통 어디갔어요?”
“고장 나서 내다 버렸는데”
“멀쩡한 것이 왜 고장이 나요?”
“위에서 떨어졌어”
“아니 그 무거운 것이 떨어졌으면 장판이 흠집이라도 났어야죠.”

이쯤 되면 그 밥통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남을 준 것이다. 문제는 그 밥통이 고가의 밥통이라는 것이다. 뒤에서 이야기를 한다.

“그럼 어떻게 해. 어멈이 나이가 먹어서 밥을 하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있는 것 주어야지”

그렇게 집에 있는 물건들을 남을 주기를 좋아한다. 물건을 하나 사겠다고 하면, 수양자들이 먼저 알고 있다. ‘얼마나 갖고 계시겠느냐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집안을 깨끗이 하고, 남을 도우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만신의 할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누누이 강조를 한다.


3월 23일 금요일.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의 집 전안(신령들을 모셔 놓은 곳)에서는 ‘운맞이 굿’이 열렸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일이 잘 풀리지를 않아 운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맞이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운이 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 집을 드나들다가 보면 이상한 일을 보게 된다. 수양자들이 굿 날짜를 안 잡아준다고 삐치기도 한다. 딴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3대를 대물림을 하는 신도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고성주에 대해서 잘 안다.

“평생 혼자 사시는 분이잖아요. 신령님과 결혼을 했다고 늘 말씀을 하시니까요. 아버님은 평생을 아마 자식들 걱정하다가 저렇게 늙으실 겁니다. 굿을 하나 가르치셔도 적당이가 없어요. 굿을 해도 나쁜 소리를 못하게 하시죠. 만신이 악담을 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무조건 좋은 소리만 하라고 하시죠.”

함께 굿판에서 굿을 하던 신딸(내림을 받은 사람을 신딸 혹은 신아들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다)인 이정숙의 말이다. 비슷한 나이면서도 정말 친 부모를 모시듯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만신 고성주의 삶의 모습이다.

“내 잘되게 도와줄게. 다 힘들다 오 해후 년에는. 그래도 너의 대주 하는 일 잘 되게 해주마. 내가 불려주시마.”

지노귀굿(천도굿)을 할 때는 더 많은 신경을 쓴다는 고성주


듣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듯하다. 7시간 정도를 지나 굿은 끝이 났다. 제단에 차려졌던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가는 수양부리의 얼굴에는, 집안에 들어설 때 얼굴에 가득했던 그늘이 보이지를 않는다. 굿을 하기 위해 차렸던 음식들을 말끔히 치우고 나서, 한 마디 한다.

“만신은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모든 시름을 다 받아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다 풀어주어야죠. 만신이 먼저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신령이 도와주나요? 요즈음 종교가 도대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파요. 아마도 신령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두려울 텐데 말이죠. 건성으로 신령 탓만 하는 것 같아요”

3월 28일. 자신의 수양부리들이 신령님들께 올리는 진적굿을 앞두고 온갖 집안치장에 한창이다. 도배를 새로 하고, 부엌에 기물도 정비했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신령을 섬기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런 마음가짐이 오늘까지 대물림 자식이라는 수양부리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같다.

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보도자료를 정리해서 올리다가 보면, 밥 때마져 놓치기 일쑤다. 이 인사의 직업이란 것이 어째 바꾸어보아도, 맨 날 밥 때 놓치기는 이골이 나있다. 하기야 ‘인터넷뉴스’라는 실시간으로 누가 더 빨리 보도를 하느냐에 따라, 그 순발력이 결정되는 것이고 보면 어쩔 수가 없다.

전 날 술을 한잔 진하게 해서인가, 입맛이 영 돌아오질 않는다. 요즈음은 쌓인 스트레스가 많다보니 참 퇴근 후 한잔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 버렸다. 의사는 술 먹지 말라고 핀잔을 주지만, 세상사 어디 핀잔 들었다고 그대로 살 수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보기엔 멀정하다. 그러나 포장을 벗기니 심한 냄새가. 사람더러 먹으라고 보낸 것일까?


배달된 김치, 이걸 먹으라고

중국집에 짬뽕을 한 그릇 시켰다. 어제 먹은 술로 인해 속을 좀 달랠 심산이다. 시킨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배달이 되었다. 하긴 이 집은 빠른 것 하나하고는 어디고 빠지지를 않는 집이다.

그런데 1회용 용기에 담아 온 김치가 영 눈에 거슬린다. 좀 묵은 것도 같고, 조금은 맛이 간 김치인 듯하다. 김치야 촛국이 되어도 잘 먹는 사람인지라, 개의치 않고 비닐을 벗겨냈다. 순간 냄새가 비위를 상하게 만든다.



김치가 다 물러빠져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그냥 죽 찢어진다. 이걸 먹으라고 보낸 것 맞을까? 아무리 점심시간이고 바쁘다고 해도, 이렇게 물러빠진 김치를 먹으라고 보내다니. 울컥 부아가 치민다.

하긴 다음부터 시켜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만 이렇게 까다로운 것일까? 김치는 우리 반찬의 근간이다. 김치 하나만 맛있어도 손님들은 감지덕지한다. 차라리 단무지나 주면 좋았을 것을. 매콤하고 맛있는 짬뽕 한 그릇이, 오늘따라 더 많이 퍼진듯하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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