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법전에서 울진으로 가다가 보면 삼거리에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라는 이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10km 정도를 들어 가다가 보면 포장이 안 된 곳도 나오고, 좁은 길이라 차가 마주치면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그렇게 찾아들어간 곳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이 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262에 속하는 이곳을 가다가 보면 우측에 MBC대하드라마 <영웅시대>의 야외 세트장이 있다. 퇴락한 이 세트장을 둘러보고 길을 재촉해 찾아 간 황장봉계표석. 자연암석에 글을 새겨 놓은 경계표시다. 그리고 보니 벌써 다녀온지가 꽤 오래되었다.

처음만난 봉계표석, 기대를 하고 찾아가

솔직히 이 황장봉계표석을 찾아갈 때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처음으로 이런 표석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반문화재와 같은 멋진 부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도, 정작 이런 부분에는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기대가 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앞에 도착해보니 계곡을 흐르는 하천가에 커다란 자연암반이 있고, 그 주위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황장봉계표석이란다.

황장봉계표석이라는 말에 난 ‘금표비(禁標碑)’ 같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 '모르면 물어보라, 그리고 찾아보라'는 나름대로의 문화재 답사에 대한 나만의 방법이 있었지만, 집 한 채 없는 곳으로 들어갔으니 물어 볼 곳도 없다. 그저 안내판을 참고하는 수밖에.

그동안 황장표석은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 입구, 영월 황장골, 인제 한계리 등에서 발견이 되었지만, 울진소광리 황장금표는 이보다 시기가 앞선다고 한다. 황장금표가 있는 바위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울진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으니, 이곳에 금표석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무지한 답사, 그래도 계속하면 눈을 떠

안내판을 몇 번이고 읽어본 다음에 바위를 찬찬히 돌아본다. 자세히는 볼 수 없는 음각을 한 글자들이 보인다. 설명에는 "황장봉계 계지명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산직명길"이라고 쓰여 있다고 하나, 글이 마모가 되어 쉽게 판독이 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오른쪽 5행 19자, 왼쪽 1행 4자로 되어 있으며, 황장목을 벌채할 수 없는 지역이 생달현(生達峴), 안일왕산(安一王山), 대리(大里), 당성(堂城)의 네 지역이며 관리 책임자는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라는 것이다

자연암반에다가 글을 새겨 넣은 봉계표석. 지금은 냇물이 흐르는 쪽에 글이 있고 그 위에 길이 있지만, 예전에는 이 냇가에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장봉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 제도는 숙종 6년인 1680년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지역으로 확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소광리황장봉계표석을 시작으로 원주, 인제, 영월 등에도 봉계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관곽으로 사용하기 위한 황장목을 확보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조치였다. 아마 당시에는 나무가 유일한 땔감이었으니 벌채가 심했을 테고, 그런 벌채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금강송 베면 다쳐', 그때나 지금이나 벌목은


이 자연암반에 새겨 넣은 19자의 봉계금표석이 참 고맙다고 느낀 것은 바로 울진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이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봉계표석으로 인해 이곳의 소나무 군락지가 보호를 받았으니 말이다. 조선조 때는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소나무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소나무 보호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수차 거론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9년인 1668년에는 백성들이 큰 소나무를 마구 베어가므로 엄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사복이 범법을 하였을 때에는, 그 주인까지 논죄 를 따진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송금사목, 송금절목, 송계절목, 금산, 송전, 봉산 등 소나무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지함으로 인해 실망을 하고, 그 뜻을 알고 난 후에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는 뿌듯함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답사의 묘미다. 황장봉계표석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날이 저물어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못 들어 간 것이 내내 서운하지만, 다음번 답사 때는 군락지까지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볼만한 마을 앱 안에 다 모여 있네.’

아침 출근길에 책 한 권을 받아들고 하루 종일 좀이 쑤신다. 이 책 제목 한 번 나와 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길따라! 맛따라! 바람따라! 시골여행”이란다. 바람을 따라 맥없이 길을 나서는 것이야, 누구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고 하는 내가 아니었든가? 그저 바람만 불어오면 영 다리가 절로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농촌진흥청(청장 박현출)의 국립농업과학원의 김상범 외 엮음으로 되어있다. 시골여행의 재미를 안내해주는 이 책은, 전국 200개 농촌마을의 관광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책의 이름도 정겹다. ‘길따라, 맛따라, 바람따라 시골여행’이란다. 이 책은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해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애플리케이션으로 모든 정보를 한 눈에

전국의 200개 마을을 소개하고 있는 시골여행은 제주도까지 찾아가볼만한 마을들이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먼저 마을의 목차에 이어서 모바일 앱 화면 및 기능설명부터 테마, 지역, 검색, 추천 등 4개 메뉴로 구성돼 사용자 편의에 따라 농촌마을을 찾아볼 수 있다. 농촌을 마을별로 소개하고, 행사와 축제, 시설, 경관, 자연환경, 농특산물, 전통자원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테마메뉴에서는 놀거리,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 쉴거리, 알거리, 체험거리 등 7가지 주제별로 마을을 검색할 수 있으며, 지역메뉴로 들어가면 10개 시·도별로 나눠 수록돼 있다. 검색메뉴에서는 주소, 마을이름, 마을자원 등을 입력하면 가려는 마을을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추천메뉴를 클릭하면 농촌진흥청이 추천하고, 행사·축제가 열리는 마을을 알 수 있다.



당장 찾아가도 될만한 안내

앱에 소개된 전국 200개 농촌마을은 농촌진흥청에서 지정한 전통테마마을 141곳과, 농촌어메니티 조사를 통해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마을 59곳이다. 시골여행 앱은 안드로이드 마켓과 애플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한편, 농촌진흥청은 사용자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앱 사용방법과 기능에 대한 설명과 200개 농촌마을을 간략히 소개한 책을 앱과 같은 이름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농촌진흥청 농업과학도서관(http://lib.rda.go.kr)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PDF 파일로 볼 수 있으며, 수량 범위 안에서 희망자에게 무료 배부한다.




농촌진흥청 농촌환경자원과 김상범 연구사는 “앞으로 국민들이 쉽고 편리하게 농촌마을을 여행할 수 있도록 유용한 농촌마을정보를 ‘시골여행 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비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 권의 책을 받아들고 설레는 마음. 아마도 봄이기에 이 책이 더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올봄 벌써 몇 곳을 찾아놓고 날자 계산을 하고 있다. ‘길따라 바람따라’ 훌쩍 떠나보려고.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는 고려 때의 절이었던 안국사지가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언제 이 절이 창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발굴조사 시 발견된 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중창을 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이 이렇게 중건과 소실, 혹은 폐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시간을 전해진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석불과 석탑 등이 남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야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이리저리 그 소중한 문화재들을 옮겨다니면 그도 힘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불안정한 모습, 그러나 고려의 석불

안국사지에는 석불입상이 있다.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고 중앙에 본존불이 서 있는 삼존불의 형태다. 2003년 발굴 조사 때 출토된 연호를 보아 고려 현종 12 ~ 21년 때인 1021~1030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서 있는 본존불은 원통형의 관 위에 보개를 씌었는데, 그 형태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보기에도 불안정하다.

양편에 선 협시보살도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한 수법을 택했다. 조각을 한 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조각기술이다. 본존불의 두 손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몸에 비해 길고 빈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가 않는다.



이러한 본존불의 형상은 이 지방에서 고려시대의 석불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형식화 되고, 제작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현재 이 석불입상은 보물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몸돌은 어딜 가고

석불입상 앞에는 보물 제10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탑은 현재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얹혀 있는 모습이다. 아마 몸돌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점이다.

원형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층 몸돌의 형태는 매우 간단히 처리를 하였다. 3면에는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고, 한 면에는 문고리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대개 4면 전체에 좌불을 새기거나 양편에는 문고리, 남은 방위에는 창살 등을 조각하는 데 비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탑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석탑은 추녀가 심하게 올라간 편이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4단씩 조각되어 있다. 석불입상의 뒤에는 배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흔히 배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에는 암각문이 두 군데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판독을 한 결과, 바위를 바라보고 왼편에는 목공전설이 오른편에는 매향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충남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안녕을 구하기 위한 자연석인 매향비

배처럼 생긴 바위에 적은 암각문을 판독을 한 결과 이 매향비문은 경오년 2월이라고 적혀있어, 1330년이나 1390년에 음각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매향비문은 돌을 다듬어 적기도 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안국사지의 매향비문은 배처럼 생긴 바위에 음각을 하였다.



 

한 곳의 사지를 둘러보는 데는 길게는 한 나절에서 짧게는 두세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러보고 나와도, 후에 또 다른 것이 나타나면 늘 후회를 하는 것이 현지답사다.

언제나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는 것도 그러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진 안국사지.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유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본다. 머리속에 그려지는 절의 모습이 확연치가 않은 것은, 주변을 너무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많은 것들을 변하게 만들지만, 그 모습이나마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텐데 말이다.

칠보공예작가 김난영의 칠보사랑

칠보란 ‘금·은·구리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이나 그 혼합물을 발라 구워서 여러 가지 무늬를 나타낸 세공’을 말한다. 보석의 대용품으로 처음 등장한 칠보는 후에 영구적인 색감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는 칠보화(七寶畵)·갑옷, 장신구, 성배, 성골함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 다양한 모습의 장식 목적으로 널리 발달되어왔다.

이 칠보에 마음을 뺏긴 사람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아름다운 행궁길‘에서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난영 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칠보를 시작한지는 7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칠보에 대해서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표현을 할 정도이다.


다양한 칠보의 아름다움

칠보의 기법은 다양하다. 가는 금속선을 디자인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금속 위에 붙이고 이 외곽선 안쪽을 유약으로 채워 소성시키는 기법인 유선칠보. 유선칠보는 식은 다음 표면을 연마하여 광을 내며, 금장신구에 많이 쓰인다. 유선칠보(有線七寶 cloisonné)· 조금칠보(彫金七寶 champlevé)는 유선칠보와 반대 기법으로, 금속물의 표면을 디자인대로 파내고 그 안에 주엽을 채운 후 소성하는 것이다.

채유칠보는 칠보색이 금속의 외곽선이나 선으로 그려진 홈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기법은 앞에서 언급된 기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기법에서는 젖은 유약을 쓰더라도 우선 건조시켜야 하는데, 이는 젖은 상태에서 유약이 흘러 서로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한 7년 정도 되었나요. 원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악세서리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칠보의 매력에 빠져들었죠. 2006년도에 처음으로 공방을 개설하였는데, 이상하게 저는 적자를 보지는 않았어요. 만들어 놓으면 많은 분들이 좋다고 사가고는 했으니까요.”

왜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것일까? 아마도 작가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좋으면 남들도 좋다는 말이 정설인 듯해요. 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었어요. 상품과 작품을 철저히 구분을 한 것이죠. 그러다가 보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 되었죠.”



철저한 프로근성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칠보공예를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작품을 만들기 시작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이렇게 칠보공예에 빠지게 된 것은 스스로도 놀랍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을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예요. 작업을 하느라고 해와 달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를 몰랐다고 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저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저 칠보공예의 화려함에 빠져 들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칠보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작업에 몰입을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1년을 했으면서도 남들의 10년같이 작업을 했다는 김난영. 벌써 자신에게서 칠보공예를 배워 나간 사람들 중에 사범이 될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 15명, 그리고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고.



“저는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칠보공예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을 해요. 작업만 하고 있으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에 밀려 오거든요. 이 칠보공예는 결국 제 인생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죠”

칠보공예 박물관을 이룩하고 싶은 꿈


김난영의 경력을 보면 재미있다.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들어갔다. 창작 21 문학 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보공예에 빠져 든 2006년부터응 온통 칠보에 관한 내용을 수를 놓고 있다. 본격적으로 공방을 차리고 칠보공예를 시작한 2007년부터의 경력이 A4용지 두 장에 빼곡하다.

“문학은 칠보공예를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글을 쓰고 표현을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칠보공예를 설명을 할 때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는 김천에 박물관을 짓는 것이 꿈이에요. 난영칠보박물관을 짓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죠. 앞으로 몇 년 후면 아마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해요”

참으로 이야기를 해도해도 끝이 없을 듯하다. 아마도 몇 년 후 칠보공예가 김난영을 보기위해 김천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결과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주요약력)

2007, 1, 17 나녕공방 개업
2007, 10, 12 금하칠보 지도자과정 수료
2007, 12 제12회 온고을 전통공예 전국대전 장려상 및 입선
2008, 12 제2회 불교문화상품 공모전 특선
2009, 2, 27 제30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입선
2009, 4, 21 불교 탬플스테이 홍보관 개관식 및 수상작 입점
2010, 7, 두 번째 김난영 칠보공예전
2011, 11, 10 남원 실상사 가을바람전
2012, 2, 24 제34회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장려상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호인 부안 서문안 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당산이란 민간신앙에서 신이라고 섬기는 신앙의 대상물이다. 서문 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도로변에 자리한다. 당산이라고 부르는 돌기둥은 마을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안과태평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서문 안 당산은 부안군청 서쪽 약 40m 지점에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던 것을, 할머니 당의 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 두 쌍의 솟대와 장승은 부안읍성의 서문 안을 보호하는 것으로 조선조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사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 서 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은 돌기둥

이 두 개의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 안 당산의 주신으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아버지 당의 받침돌에는 '알받이 구멍'이라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파여져 있다. 이 알받이 구멍은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는 곳이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또한 할머니 당산의 윗부분에 새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해,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할머니 당산을 보면 당산의 허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위에 있는 오리를 확인할 수가 없다.



길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할아버지 당이 서 있고, 그 옆에 위가 유실된 할머니 당이 서 있다. 그리고 돌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서 있다. 할아버지라고 하는 남장승은 복판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 음각했으며, 머리에는 탕건을 쓰고 수염이 있다. 눈썹은 굵게 표현을 했으며 눈은 앞으로 튀어나온 왕방울 눈이다. 코는 주먹코에 볼은 불거져 있어, 흡사 입 안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형상이다. 상원주장군은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도 부른다.

우측에 있는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할머니 석장승은 할아버지 석장승보다 많이 마모가 된 상태이며 복판에 글씨도 알아보기가 힘들다.


알받이 구멍, 그런 것이었구먼

이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인 솟대 2기를 묶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당산제를 시작해 다음날까지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부안 동문 안과 남문의 당산을 함께 모시는데, 이는 서문 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마다 지내던 마을제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 지내던 마을제는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하고, 그 공동체가 서로를 위하는 상부상조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사라져버리고 약식화 되어가는 마을제가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안에 공동체의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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