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가장 만나고 싶은 문화재들은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아무리 날이 춥다고 해도, 소나무 종류의 천연기념물들은 언제나 그 푸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춥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인가 움직임이 영 둔하다. 이런 날 가만히 집안에만 있자면 갑갑증이 인다. 가까운 곳이라도 답사를 할 작정으로 길을 나섰다. 여주에서 이포대교를 지나 이천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산수유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천 백사면의 산수유마을은 수도권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곳이다. 봄이 되면 많은 인파가 노랗게 핀 산수유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아마도 이제 머지않아 이 마을은 또 한 번 홍역을 치루어야 할 것만 같다.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백사면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수유 마을로 들어가다가 보면, 좌측 밭 가운데 키가 낮은 소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승천하고 싶은 소나무인가?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 '반룡송(蟠龍松)'은 하늘을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나무를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단다.

 

가까이 다가서 본다. 중앙에 본 가지가 있고, 그 위로 환상적인 가지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다. 180° 로 둥글게 말아가면서 퍼져나간 가지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신라 말 도선스님이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과 이천 도립리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심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해지는 반룡송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다. 반룡송은 그만큼 신비한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특히 나무의 표피가 붉은 색을 띠우고 있어서, 이 표피를 마을에서는 용비늘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 비늘을 건드리는 것도 화를 불러오는 짓이라고.

 

신비함을 가득 담아낸 수령 1,100년이 지난 소나무

 

높이 4.25m, 가슴높이 둘레는 1.83m다. 높이 2m 정도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졌다. 땅속에 묻혀 자란 또 다른 가지는 흡사 중앙에 머리를 둔, 꼬리처럼 보이기도 해 신비감을 더한다. 이 꼬리부분이 있어서 반룡송이 하늘로 승천을 해 버릴 것만 같다. 얼핏 보아도 단순한 소나무이기보다는, 무엇인가 신비한 힘을 가진 특별함이 있다.

 

 

찬 날씨도 잊어버리고 몇 번이고 주위를 돈다. 저녁 햇볕이 가지 틈 사이로 들어오니, 솔잎들이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몰 전에 반룡송을 보면 승천을 하는 용을 볼 수 있다고 했는지. 금방이라도 햇볕 사이로 승천을 할 듯한 모습이다.

 

현재 이천 9경중에서 제6경으로 꼽는 백사 도립리의 반룡송. 도선스님은 통일신라시대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다면 이 반룡송의 수령은 이미 11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숱한 세월을 이곳을 지켜 온 반룡송. 앞으로 용송으로 만년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돌아보다가 보니 여기저기 마른 나뭇잎들이 보인다. 나이가 먹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는 것인지, 아니면 생육상태가 나빠진 것인지 걱정스럽다. 반룡송을 떠나기 전,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아 승천을 할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본다.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대가집

한국민속촌 안에 들어가면 몇 채 안되는 와가 중 하나가 제9호 집이다. 남부지방의 대가로 불리는 이 집은,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 있던 대가집을 그대로 한국민속촌으로 이건을 한 집이다. 이 집은 가옥 전체에 누마루와 툇마루 등이 고르게 배치가 되어있어, 호남지방의 특유의 집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이 집의 전체적인 꾸밈은 튼 ㅁ 자 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ㄷ 자 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l 자형의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 문간채가 한편을 막고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큰 ㅁ 자가 된다. 이 집의 특징은 집이 상당히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돋보이는 집이다.

누마루의 여유, 대가 집의 특징

집안은 한꺼번에 다 소개한다는 것이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다. 특히 ‘고래등 같다’고 표현을 하게 되는 집들은 대개가 그 안에 이야기도 많은 법이다. 그러다 보면 몇 번으로 나누어야 그 집의 모습을 제대로 소개할 수가 있을 듯하다. 한국민속촌의 9호 집 역시 그러한 집 중 한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놓여있는 사랑채. 아마 이 집이 대개집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사랑채 한 채를 갖고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듯하다. 한편을 ㄱ 자로 달아내어 누마루를 놓았다. 누정과 같이 주추위에 기둥을 놓고 땅에서 떨어지듯 조성을 했다. 말은 사랑채의 누마루방이지만, 그대로 정자가 되는 그런 형태이다.

집안 여인들의 편의를 돕는 동선

누마루정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마루로 인해 모든 방에 연결이 되어진다.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방을 앞뒤로 나누어 들인 것도 특징이다. 누마루 정자 뒤편으로도 마루를 놓고, 그 안편으로 방을 드렸다. 두 개의 방을 이어놓았으며, 그 다음은 다시 마루를 놓고 두 개의 방을 또 앞뒤로 드렸다.




그리고 부엌은 안채쪽의 사랑채 뒤편에 드리고, 부엌을 드나드는 곳 역시 안채 쪽에 가깝게 붙여놓았다. 이렇게 안채에서 쉽게 사랑채의 부엌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안주인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랑채에 불을 떼거나 손들을 접대하기 쉽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여인들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짧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채를 보호하는 작은 배려도 돋보여

전남 무안에서 옮겨 온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왜 방을 앞뒤로 놓았을까? 외부에서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앞, 뒤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입구는 집의 주인이 주로 사용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뒤쪽에 자리한 방은 입구를 따로 꾸며 놓았을까? 별도로 방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렇게 안채를 바라보지 않도록 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집안 여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채에 외간 남정네가 묵더라도 안채의 여인들이 신경을 덜 쓰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에 딸린 부엌도 안채에서 가깝게 한 것이나, 부엌을 출입하는 별도의 길을 마련한 것들도 모두 여인들을 위한 동선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택 한 채를 돌아보는 즐거움. 그 집의 형태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모양새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그 집안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고택답사가 즐거운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 호남 대가집의 사랑채, 그동안 수많은 탈렌트들이 이곳에 발을 디뎠다.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이 집 민속촌으로 옮긴 덕에 별별 향수내를 다 맡는 듯하다.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복원을 위한 중장비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 차가운 금속물질이 더욱 날씨를 차갑게 느끼게 한다. 법천사는 권람, 한명희, 서거정 등이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만큼 이 법천사가 한 때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곳을 황려현이라고 사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여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 귀부의 머리. 신라말에서 고료 초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용머리이다


수많은 석재들이 쌓여있는 법천사지. 그 하나하나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석재들 틈에는, 보기만 해도 상당히 귀한 석조물들이 보인다. 벌써 몇 년째 이렇게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고려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받침돌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머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목 부분에는 또 다른 버팀석을 만들어 놓아 머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인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육각형의 무늬 안에 새겨져 있다. 왕사나 국사의 비에서 보일 수 있는 글자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국보 현묘탑. 제 자리를 떠나 더욱 안타깝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현묘탑비의 뒷면에는 1370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4.55m의 현묘탑비는 거북이의 몸에 용머리를 붙인 받침돌. 그리고 양편에 비천하는 용을 새긴 탑비와, 왕관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탑비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런 대단한 조각을 후대에 남겨줄 수 있는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정자야 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릴하고 있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그러나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들어, 정자의 아름다움을 적은 게판들이 정자 안에 빼곡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남다르다. 그만큼 정자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웠던 주변 경치를 잃은 정자는 슬프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남면 입석리. 운암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 양요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5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정자

양요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양요 최응숙이 지은 정자이다. 이곳으로 난을 피해 낙향을 한 최응숙은, 강물이 산을 휘감아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곳에 양요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양요정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는지 정자 안에 걸린 게판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정자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들. 양요는 정자를 지은 최응숙의 호로, 당시 이 양요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수많은 편액 안에 잘 남아 있다.



원래 양요정의 원 위치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쪽으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섬진강 댐의 공사로 인해 양요정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1965년 이곳으로 이전을 하였다. 양요정은 지금도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옮기기 전의 양요정은 산을 감돌아 흐르는 강과, 산 밑으로 낙수치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강과 산, 그리고 폭포와 정자. 한 마디로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대단한 절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절경 잃은 정자, 이름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양요정은 운암호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도, 산 밑으로 낙하를 하는 폭포도 사라졌다. 그런 인위적인 공사로 인해 멋진 절경을 잃어버리고만 양요정.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양요정은 여느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 가운데에 방을 두었다. 이런 형태의 정자는 남쪽 자방에서 많이 보이는 방들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자는 처음 그대로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정자 가운데 들인 방의 벽면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홀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친구들과 바둑을 즐기는 모습. 그리고 가마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행렬. 아마 양요 최응숙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난을 피해 이곳으로 낙향을 했지만, 늘 임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양요정에 올라 운암호를 내려다보면서 문득 걱정이 된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또 어떤 절경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전국의 수많은 정자들.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정자 들이, 이 양요정처럼 또 다른 슬픔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천시 창천동 현 시립도서관 앞에 자리를 하고 있는 이천향교. 그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런 멋을 지니고 있는 향교이다. 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이천향교는 조선조 태종 2년인 1402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곳이다. 망현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망현산을 아리산 혹은 위후산이라고도 부른다. 이천향교는 감무 변인달이 신축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이천이 도호부로 승격이 된 세종 26년인 1444년에는, 관헌이 교수 1인을 두고 학생은 90명이나 되는 큰 교육기관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지 600년이 지나

권근이 지은 <이천신치향교지>에 의하면 1401년인 신사년 봄에 감무로 부임한 변인달이, 안흥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직접 향교 터를 물색하고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변인달은 공무를 보면서도 틈을 내어 직접 관리감독을 하였다고 한다.

향교의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의 옆에 있어야 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처음의 형태에서 많이 축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의 뒤로 돌아가면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우측에는 <동계승서계강(東階升西階降)>이란 비석이 보인다. 즉 대성전으로 올라가려면 3단으로 구분이 되어있는 계단의 동쪽으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라는 뜻이다. 향교의 대성전을 드나들 때는 반드시 이 예의를 지켜야만 한다.



석축이 고풍스런 대성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경사진 곳에 터를 잡은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모두 3단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한단 밑으로는 동무와 서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축대를 보면, 600년이 지난 이천향교의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큰 화강암을 이용해 쌓은 축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세월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장대석으로 쌓아올린 계단이며, 축대, 그리고 기단 등이 고풍스럽다. 계단을 오르면 동무와 서무 앞에는 각각 '헌관위(獻官位)' '집사위(執事位)'라고 쓴 비석이 서있다. 즉 문묘제향을 지낼 때 헌관과 집사들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배울 수 있는 곳이 이천향교다.

시민들의 휴식처, 이천향교

이천 향교는 양편으로 물이 흐른다. 홍살문 우측으로는 향교의 담장 밑으로 물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도로를 지나 물이 흐른다. 뒤로는 산이 있고, 좌우에 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이면 시원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이곳에 모여들어 더위를 피하고는 한단다.



교육기관으로서 만이 아니고,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이천향교. 600년이 지난 그 오랜 세월 속에서, 고풍스런 옛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이천향교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