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흥천면 계신리를 '불암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바로 이곳에 마애여래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있는 남한강변을 '부처울'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은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였다. 이 마애여래입상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조각기법 등을 보면 그 이전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고려 초기의 보이는 인근 지역의 마애불보다 그 조각을 한 수법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조화라든지, 섬세한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등에서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는 것도,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암벽에 조각을 한 마애여래입상의 얼굴 주위에는 3중의 원형 두광이 있는데, 그 테두리에는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당당하고 특히 법의의 새김 등이 신라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부분적으로 약간 형식화 된 부분을 들어 고려 초기로 보고 있지만, 이 지역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의 마애불과는 달리 그 형태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아직도 지역주민들이 찾는 부처울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부처울은 강원도에서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 정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이포나루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때문에, 아마 이곳을 지나면서 이 부처울의 마애여래입상에게 편안한 강 길의 여행을 하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의 주민들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와서 빌고는 한다. 신라 말에 조성이 되었다고 보면, 천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아마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보호를 받아온 것도, 이 마애불이 서 있는 위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은 마을을 지나, 남한강가의 좁은 바위틈을 지나 내려가야 한다. 아마 예전에는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배를 대고 정성을 드렸을 것이다. 그 좁은 통로를 지나 내려가면, 깎아지른 자연 절벽에 마애여래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강 길이 아니면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위치가 이 마애불을 온전히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에 감탄하다

 

부처울 마애여래입상은 수작이다. 인근의 마애불 중에서는 그 수법이 뛰어나다. 둥근 얼굴에 큰 귀가 어깨까지 닿을 듯 내려오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불신 전체를 감싸며 U자 형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저렇게 바위에 섬세한 굴곡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카롭지 않은 모습이다. 코와 입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랜 시간 강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오는 사람들의 애쓴 노고를, 이 웃음으로 고통을 잊게 했을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을 위로 향하고 왼손을 밑으로 내렸다. 법의는 팔소매에 주름을 새겨 부드러움을 더했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였고, U자 형이 주름이 아직도 섬세하게 옷매무새를 마무리하고 있다. 뛰어난 기능을 보이고 있는 이 마애여래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법의를 마무리를 한 것도 뛰어나다. 이렇게 뛰어난 솜씨로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부처울 마애여래입상. 지금 그 마애불은 남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천년세월 내려다 본 아름다운 남한강

 

부처울 마여여래입상이 천년세월을 내려다 본 남한강. 그 남한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침이 되면 자욱이 일어나는 물안개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강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아름답다.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와 물을 박차고 까맣게 비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강은 터전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한강을 천년 세월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남한강이다. 부처울 마애불에 비손을 하기 위해, 작은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다가온 사람들이 올려다보았다. 뗏목을 타고 멀리 강원도에서 찾아 온 사람들도, 올려다보고 두 손을 모았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풍취에 취해, 배를 띄우고 시선이라도 된 양 소리 한 자락을 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 남한강이 변하고 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물길공사라는 것으로 인해 마애불이 내려다보이는 그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에 마애불을 새긴 까닭도 천년 뒤의 이런 생명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 강물 위로 슬픈 뱃소리 한 가닥 여울져 흐르는 듯하다.

 

사진 한 장만 갖고도 그 정자의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가 있다. 그저 주변 경치로만도 이 정자는 예사 정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정자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을 안겨 준 정자의 기억은 잊히지가 않는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은 수많은 정자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정자들이 많다. 어느 정자인들 산천경계를 중요시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정자들은, 바로 스스로 자연이 된다. 그 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정자가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62호 열화정(悅話亭)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 하나로도 집의 역할을 감당해 내

 

열화정은 조선 현종 11년인 1845년에 이재 이진만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이재의 손자인 원암 이방회가 당대의 석학 영재 이건창 등과 학문을 논하는 등 많은 선비들이 수학하였다고 한다. 열화정은 이 지방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구한말 때 일제에 항거해 싸웠던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 기개 높은 의인 열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열화정은 소박한 구조의 건물은 주변의 정원시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해가 설핏 넘어가기 전에 바쁜 걸음으로 찾아간 열화정. 돌계단을 올라 열화정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탁 막힌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정자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운치 있는 정자는 처음이다. 아마도 이런 정자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거리에 있었나 보다.

 

단골 영화촬영지인 열화정

 

크지도 않고, 마을의 뒤편에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열화정. 누각으로 한편을 지어 그곳에는 연정(蓮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봄이 되면 정자 앞에 작은 연못에 연꽃이라도 피어나는가? 연정인 누각의 앞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이곳에 연꽃이 많이 피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한편에는 물이 차면 빠져나가 정자 앞의 작은 계곡으로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참으로 단아하다. 한편은 벽을 안으로 넣어, 방에 군불을 지피는 사람이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서도 지은이의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정자의 마당에는 여기저기 오래 묵은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뒤편으로는 울창한 산림과 대밭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상상을 해보아도 열화정이 지니고 있는 멋스러움을 알 것 같다. 사계절 그 모습이 다 달라질 것 같은 모습에서 더욱 더 찬사를 아낄 수가 없다. 영화 <서편제>와 <태백산맥>,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 등에 이곳 열화정이 보인다. 열화정은 그만큼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지켜가고 있다. 봄철 연꽃이 작은 연못을 아름답게 수놓는 날,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산110번지, 설성산성지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된 선읍리 석불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죽곡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신흥사 주지가 현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보면, 보개석과 몸체, 그리고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좌는 예전의 것인데, 머리는 새로 만들어 놓아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얇은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한 몸 부분엔 장신구 없이 법의와 손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법의의 굴곡을 보면, 그 부드러움이 돌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다. 또한 발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의 연화문 등을 보아도, 뛰어난 조각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몸의 형태를 보면 여래입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신읍리 석불입상은 왜 두상이 사라진 것일까?

 

네 개 부분으로 나눠진 입상?

 

이 석불입상은 대좌와 몸체, 두상과 보개의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조각을 한 후, 조성을 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몸과 머리 부분을 따로 떼지는 않는다. 거대한 석불도 아니고, 전체높이가 257cm 정도의 석불을 조성하면서, 머리를 떼어 조각을 한 후 신체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발과 밑을 받치는 연화대는 넓적한 돌을 이용하였다. 발과 연화대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판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대개 얼굴과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의 사라진 머리 부분과 연결되는 목 부분을 보면, 둥글게 올라가다가 사라진 목 부분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입상을 조각하는데, 구태여 두 장의 판석에 조각을 해 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은 발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 그리고 몸과 보개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보아야

 

몸에서 머리를 올린 목 부분을 보면, 삼도를 표시한 목 부분 아래가 파손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목이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년에 이 석불입상의 조각을 찾아 내 새롭게 조성을 할 때, 목 부분이 발견이 되지 않아 새로운 돌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 부분이 따로 조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만일 목 부분을 따로 떼어 내 조각을 한 후 붙이고자 했다면, 땅 속에 묻혀있는 목의 한 부분이라도 발견이 되었을 것이다. 목 부분의 훼손이나 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석불입상의 머리 부분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조각기법

 

이 석불입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이런 조각기법이라면, 기술이 뛰어난 석공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두 손의 손가락 부분도 훼손이 되어 시멘트로 발라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석불입상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내려 복무를 감싸고 있으며, 왼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엄지와 장지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이 석불의 수인은 전법륜인과 시무외여원인의 복합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전법륜인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마주할 때, 엄지와 둘째 인지를 맞대면 법신불, 엄지와 중간 장지를 맞대면 보신불,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면 화신불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수인은 엄지와 장지를 맞댄 보신불로 보인다.

 

발가락을 돌출시킨 석불입상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석불입상의 발을 보면, 안성 석남사 마애불의 발과 동일하다. 그 조각 수법도 동일하게 표현을 하였다. 즉 아래는 연꽃대좌를 조각하고, 그 위에 법의가 발목까지 덮인 형태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목서부터 밖으로 돌출을 시켜, 열 개의 발가락을 조각한 수법도 동일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선읍리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 그것은 결코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훼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에 무관심한 것 자체가, 문화재의 훼손에 일조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목을 잃은 선읍리 석불입상. 과연 그 목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두상이, 조금은 불편한 듯하다. 좀 더 세심하게 조각을 해서 올릴 수는 없었을까?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조종암(朝宗巖).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조종암은, 어찌 보면 나라가 약한 탓에 느끼는 울분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조종암에는 바위에 글씨를 새긴 암각문과 비석, 그리고 단지 등의 유적을 합해 이르는 장소이다. 앞으로는 얼어붙은 조종천이 흐르는데, 찬바람이 옷깃으로 파고 들어온다. 조종암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조종암에 스며든 슬픈 역사

 

효종임금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 강화도로 있던 효종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에 항복을 하자, 형인 소현세자와 오달제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간이나 선양에 머물던 효종은,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한 형 소현세자가 4월에 세상을 떠나자, 5월에 돌아왔다. 효종은 그 때부터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입각해 '숭명배청(崇明排靑)'의 의식이 높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효종임금과 송시열이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효종으로서는, 그 치욕을 씻을 길이 오직 북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위에는 朝宗巖(조종암), 思無邪(사무사),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 등의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솟은 바위 위에는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굽어보는 비석이 1기 서있고, 그 밑으로는 제사를 지내던 단지가 보인다.

 

 

 

효종의 슬픔 마음이 새겨진 바위

 

조종암은 조선 숙종 10년인 1684년에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내용인 사무사를 새겨 넣었다. 또한 효종이 대신에게 내려준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글인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를 당시 가평군수인 이제두에게 보내어, 깨끗한 장소를 정해 새기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8년간이나 청에 잡혀가 있으면서, 약한 나라에 태어났음을 슬퍼했을 효종. 얼마나 그 아픔이 마음속에 깊게 자리했을까? 그러한 효종의 명에 따라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 여러 선비가 힘을 합하여 위 글귀와, 임진왜란 때 몽진을 해야 하는 고통을 당한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이란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선조의 후손인 낭선군 이우의 글로 임금을 뵙는다는 뜻인 '조종암'을 바위에 새기고 제사를 지냈다.

 

이런 북벌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담고 있는 조종암이지만, 그 내면에는 약한 나라의 슬픔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효종은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새기라 했고. 선조의 글에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 '조종'이라는 뜻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조종암

 

조종암은 단지 바위에 암각문을 새긴 곳이 아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통해 아픔을 당한 사연이 깃든 곳이다. 효종과 선조는 외침에 의한 고통을 당한 임금들이다. 이러한 마음을 함께 적어 놓은 조종암은, 약한 나라가 당해야하는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약한 나라는 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곳이다.

 

 

얼어붙은 조종천에서 부는 바람이 차다. 바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마음이 아프다. 지금이야 그저 '암각문이겠지, 역사를 기록한 한 장소이겠지'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시는 외침에 의해서 나라가 겪는 수모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조종암을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혹시 굿 보신 적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은 두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 나온다. 그 첫째는 “굿 좋죠. 우리 굿이야말로 정말 축제죠”라는 대답이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래도 우리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서 조금은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굿 TV에서 가끔은 보았는데, 무섭기도 하고요”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사람들이 있다. “굿 그거요 미신이고 귀신들이 장난질 하는 것이잖아요” 라는 대답을 하는 부류이다. 이런 사람들은 난 종교적 사대주의자라고 표현을 한다. 한 마디로 굿이 무엇인지 그 어원조차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여기서 어떤 특정 종교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굿은 아주 오래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그 굿을 통해 우리는 감사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 뜬금없이 굿 이야길 하자고

 

굿 이야길 하자고 하면 아마 삼년 열흘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만큼 한 때 우리 굿에 미쳐 살았다. 오늘 뜬금없이 굿 이야길 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굿판에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도대체 저 사슬세우기는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바로 그 특별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굿판을 혹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굿을 하는 도중에 통돼지나 족발, 혹은 소머리 등을 월두나 삼지창 등에 끼워 세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슬세우기’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떡시루 등을 걸어서 세우기도 한다. 이 사슬이 잘 서야 그 굿을 신령들이 잘 받았다고 흔히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사슬세우기는 두 가지가 있다. 이런 굿판에 진열되었던 돼지나 떡시루 등을 세우는 사슬세우기가 있고, 또 하나는 물동이 위에 무당이 직접 올라서서 뛰는 ‘용사슬 세우기’가 있다. 용사슬이란 물동이 안에 물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슬'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

 

'사슬을 세운다' 는 것은 무의식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행위를 말한다. 대감이나 장군, 혹은 별상이나 신장 등에서 사슬을 세우는데, 사슬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상당히 깊은 뜻을 내재하고 있다. 무의식에서 ‘사슬’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슬' 이란 고리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생태계 등에서도 '먹이사슬'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먹이고리’를 말하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사슬이란 의미도 이런 고리로 연결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즉 창이나 삼지창 등을 자루를 밑으로 하고, 위에 소머리나 돼지머리 우족이나 통돼지 등을 올려 중심을 잡는 행위이다.

 

이것은 두개의 연결고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슬을 세우는 것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연결을 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신에게 올리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하기에 이 사슬이 잘 서야 신령이 감응을 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바로 그런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가 사슬인 것이다.

 

무격이 직접 고리가 되는 용사슬

 

무당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을 위하는 굿인 맞이굿 등을 할 때나, 내림굿 등을 할 때는 항아리에 물을 담고 그 위를 한지로 덮어놓는다. 이 위에 오르는 것을 ‘용사슬’이라고 한다. 흔히 ‘용사슬 세운다’ 혹은 ‘용사슬 탄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 역시 사슬과 다름이 없다.

 

일반적인 사슬은 제물로 대신하지만, 용사슬은 무당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는 것이다. 즉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인 사슬을 자신이 직접 세움으로써, 자신이 주제자(主祭者)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사슬이란 단순히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중요한 뜻을 가진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 된다.

 

‘굿은 미신이다’라는 일제의 허망한 이야기가, 아직도 공공연히 종교적 폄하로 사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기만 하다. 굿을 제대로 이해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 굿을 이용해 정말로 혹세무민을 하는 사람들. 이제 제발 이런 마음 아픈 이야기들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전한 사슬이 서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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