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된 윤황 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 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 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단아함

 

윤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 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 선생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 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난 봄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답사 장소가 산으로 꼬리를 내닫고 있는 성곽이다. 유난히 봄이 되면 성곽을 즐겨 찾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또한 그 산 마루로 오르는 길에 아주 가끔은 정겨운 짐승들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찾는 산성. 우선은 평지에 쌓은 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찾는 이유는 또 있다. 평지에 쌓은 성에서 맛볼 수 없는 기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성 위로 난 길을 걷다가보면, 주변으로 달라지는 풍광에 빠져들게 된다. 그 풍광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삼년산성

 

산성을 걷는 즐거움

 

전국에 수많은 산성들이 그동안 복원이 되었다. 하기에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산성은 각각 그 산을 에워쌓고 있는 방법이 다르다. 하기에 산성을 걷다가 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왜 우리 선조들은 이런 형태의 성을 쌓았을까를 생각하다가 보면, 꽤 길이가 있는 산성임에도 언제 돌았는지 모르게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다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 땀을 산마루에 난 산성위에 올라앉아 식히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염되지 않은 산마루에서의 심호흡. 그것 하나만으로도 산에 오른 효과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가 이닐까?

 

 

위 단양 적성, 아래 고모산성

 

자연을 따라 자연이 되는 시간

 

우리 선조들은 성을 쌓을 때 자연을 이용한다. 산성을 걷다가보면 어느 한 구석 자연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 자연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산성이다. 그래서 그 산성이 곧 자연이다. 그 자연을 품고 걷다가보면, 나 스스로가 자연 안에 파묻히고 만다.

 

인위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느끼면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주변 곳곳에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성곽 틈사이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 위로는 샘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문이 생겨난다.

 

 

위 안성 죽주산성 아래 완주 위봉산성

 

그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얼마나 동화되는 삶을 살았는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산성 위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자연을 온통 뒤집어가며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 하나를 놓으면서도, 그 돌이 자연과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놓았다.

 

올 봄 산성을 걸어보자

 

올 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장관을 느끼고, 온통 꽃으로 덮이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걷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위 적성산성, 아래 홍주성

아름다운 산성 길. 가끔은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즐겁고, 산짐승 한 마리가 새로 난 풀잎을 뜯다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물 한 병 찔러 넣고 천천히 걷다가 보면, 그 산성 안에서 자연과 산성, 그리고 내가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인터뷰)수원 중부어머니폴리스 연합 임수영단장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학교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죠.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저희가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이나, 유괴 등에서 아이들을 지켜 내는 모임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4월 12일 오후, 수원시 장안구 율전로에 소재한 율전초등학교 교정에서, 학교 교내를 순찰하고 있는 임수영(여, 42세) 어머니폴리스 연합단장을 만났다. 임수영 율전초등학교 어머니폴리스단 회장은, 수원중부의 연합 어미니폴리스단의 단장으로 선임이 되었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 연합회 단장으로 선임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글쎄요. 축하를 받을 일인가요? 중책을 맡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야죠(웃음)“

 

- 일주일에 몇 번 씩이나 학교에 와서 봉사를 하는지?

저희 율전초등학교는 어머니 회원들이 많지가 않아서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 나와요. 12시 30분에 나와서 2시 정도까지 학교 안을 순찰합니다. 순찰을 하는 범위는 복도나 화장실 등, 학교 내에서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을 사전에 방비를 하자는 것이죠. 그리고 교정 안에 있는 작은 공원 등도 다니면서 유리조각이나 담배꽁초 등, 아이들에게 유해한 것은 없는지를 살펴봅니다.“

 

- 연합회는 어떻게 조직이 되어있나요?

현재 수원에는 2012년 4월 현재 세 개의 단체가 있습니다. 남부와 중부, 서부로 구분되어 있죠. 남부는 27개 학교에 1,653명의 단원이 있고, 저희 중부는 32개 학교에 1,355명의 어머니폴리스단원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에는 21개 학교에 916명이 활동을 하고 있어요. 수원시 전체에는 80개 학교에 총 3,924명이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죠.“

 

- 상당히 많은 분들이 활동을 하시는데, 활동하시는 일 때문에 일상생활에 어려움은 없으신지?

어머니폴리스단 활동을 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죠. 아침 일찍 집안 식구들이 하루 먹을 것을 준비를 해놓고 나면, 나가서 활동을 해야 하죠. 저녁이면 집안 일이나 빨래 등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살죠.“

 

- 남편분이 반대는 안하셨는지?

처음에는 일을 해도 표시가 안 나는 것이라,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많이 이해를 하세요. 한 일 년 정도는 더 해도 되겠다고요(웃음).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굳이 반대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 일주일에 두 번만 활동을 하시는 것이 아니신 듯한데?

예, 율전초등학교에서 하는 순찰 등이 두 번이고요. 일주일에 한번은 연합단에서 신청을 한 학교에 가서 함께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문화센터 등에서도 행사를 할 때 안내 등을 맡아서 장내정리를 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보면 한 주일 내내 바쁘게 보내고 있죠.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임수영 연합단장. 이야기를 하다가말고 아이들 하교시간이 되었다고 깃발을 들고 나간다. 율전초등학교 주변은 보기에도 아이들이 등, 하교를 할 때 상당히 위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폴리스단원과 함께 아이들을 일일이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에서, 자녀사랑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신호등도 없는 오거리에서 아이들은 늘 위험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런 오거리에서 오전 등굣길에는 녹색어머니회가 맡아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고, 하교길에는 폴리스어머니회가 맡아서 한단다.

 

“누구나 다 내 자녀와 같이 소중하죠. 그래서 어머니폴리스단은 학교별로 ‘마미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교나 통학로 주변 등을 순찰을 돌면서 학교폭력이아 유괴 등 대아동범죄 예방과 진압으로 아이들이 평온한 등, 하교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죠.”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임수영 연합단장.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 안에서 자료를 하나씩 꺼내서 설명을 한다.

 

“올해는 CYS-NET이란 지역사회청소년통합지원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지역사회 내에 활용 가능한 자원을 모두 연계, 협력항녀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발견, 구조, 치료를 하여 가정 및 사회로의 복귀를 시키는 사회안전망이죠. 저희 어머니폴리스단은 그 중 발견과 구조지원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 사회봉사 외에도 일일찻집 등을 운영하여 그 수익금으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한단다. 결국 내 자녀가 귀하면 남의 자녀도 귀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몸소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더 많은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상담센터 협약식이 연기되기는 했지만, 폴리스어머니봉사단과 청소년상담센터, 경목위원회 등이 협약식을 갖기로 했죠. 오늘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에 관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를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누군가 조금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죠. 저희 어머니폴리스단이 바로 그런 희생을 감당해 내자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중부어머니폴리스 연합단장으로 선임된 임수영 연합단장. 앞으로 활동을 하는데 더 많이 도와달라고 하면서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 미소가 교정에 아름답게 개화를 시작한 4월의 벚꽃을 닮았다.

김두한가옥이라고 하면 백야 김좌진장군의 아들이자, 현 탤런트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인 김두한 전 의원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김두한 가옥은 전 김두한 의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집이다. 다만 이 가옥의 소유자가 김두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명이인인 김두한 가옥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김두한 가옥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이다. 이 가옥은 원주목사와 남원목사를 지냈던 김탄행(1714 ~ 1774)의 묘를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묘막이다. 25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193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고 한다.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운 사랑채

 

김두한 가옥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여 짓는 경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러나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고, 사랑채는 다시 대문으로 대문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에 연결이 된 대문채는 잠시 사이를 두고 헛간과 방이 있는 광채와 합해, 튼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사이로 사랑채와 대문채가 연결이 되어있는 이 집은, 밖의 길에서 사랑채와 대문채가 한눈에 보인다. 사랑채는 3단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긴 장대석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나 3단으로 기단을 쌓은 것들을 보면, 당시 이 묘막을 지은 가문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집은 밑에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형의 주추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의 마루방은 앞면과 측면의 문을 모두 열어젖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의 문들이 재미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집을 바라보면서 왼쪽 1칸은 마루방으로 꾸몄고, 오른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의 문은 앞면과 측면이 판자문으로 막았다. 판자문은 4짝을 모두 함께 열어젖힐 수가 있다. 마루방의 뒤쪽으로도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이 방은 안채의 부엌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앞에 돌출이 된 마루방을 빼고, 두 칸 방 앞으로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에 올라서면 좌측으로는 마루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은 무엇에 쓰는 것일까? 이 여닫이로 된 쪽문을 열면 좁은 네모난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는 대문과 사랑채의 끝이 이어지는 아궁이가 있다. 이 문안에 있는 공간은 아궁이에서 사랑방으로 통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네모난 작은 공간은 무엇이고, 마루 끝에 보이는 쪽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공간은 대문간에 붙은 아궁이에서 음식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랑채로 옮기던 창구가 아니었을까? 안채에 붙은 부엌에서 이곳 사랑채까지 나르기는 힘이 들고, 안채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해도 사랑채가 외간남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니, 이 쪽문을 통해 네모난 공간에 음식을 놓고, 그것을 사랑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안채에 딸린 부엌, 유난히 환기장치가 많은 이유는

 

안채는 안방과 윗방이 부엌에 접하여 있고 그 옆으로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일반적인 고택의 경우 - 자형의 집이 아닐 때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의 건물로 구성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김두한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다. 다만 그 구별은 중간에 안채의 부엌을 놓아 구분을 해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가옥구조의 중간에 부엌을 놓은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김두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이 부엌이 건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부엌에는 아랫부분에 나 있는 양편으로 마주 뚫어놓은 까치구멍과, 위편에 또 하나의 커다란 까치구멍이 있다. 이렇게 많은 환기장치를 해 놓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두한 가옥은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다. 그러다가 보면 제의를 행할 때,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환기가 잘 되어야함은 기본이다. 그렇게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가옥보다 환기장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대문채와 광채를 이어주는 담장이다. 이 담장은 일반적인 담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흡사 이 담장이 어느 건물의 담벼락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담장에는 가로 세로로 나무를 질러 담벼락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실제로 이 김두한 가옥이 모든 담벼락들이 이와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담벼락으로 오인을 할 수 있다.

 

250년의 긴 세월을 자리를 잡고 있는 김두한 가옥.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여기저기 파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옛 모습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고택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옥이다.

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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