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이 천상을 움직이는 것이죠"

 

“‘세발낙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세발심지’라는 처음 듣는데요.”

 

우스갯소리로 사무실 사람들에게 세발심지가 무엇인지 아는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하기야 일반인들이 세발심지를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굿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4월 11일 의정부에 자리한 한 굿당. 내림굿을 준비하고 있는 자리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이 날 내림굿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 거주하는 정아무개(남, 42세)가 신내림을 하는 자리였다. 정아무개는 이미 신병이 깊어져, 사람들에게 아는 소리를 할 정도로 깊은 무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내림굿판에 음악을 맡아 자리에 동석한 박노갑은, 흔히 ‘어정’이라고 하는 굿판에서 피리와 호적을 담당하는 악사이다.

 

세발심지는 인간의 정성을 하늘로 올리는 것

 

한지를 가늘게 꼬아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박노갑(남, 49세. 수원시 연무동 거주) 흔히 굿판에서는 이 세발심지와 불사전, 그리고 제석고깔을 한지로 만든다. 그런 것들을 한지로 만들고 있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수양아버지(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께서 굿판에 다니는 악사가 되려면 이런 것들부터 굿판의 내력을 다 알아야한다고 늘 말씀을 하셨죠. 가위 하나로 다 만들 수 있는 굿판의 이런 기물들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신령님들을 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죠.”

 

굿판에서 세발심지는 모두 16개를 사용한다. 안당제석상에 1개, 본향상에 3개,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를 놓는다. 본향상에 3개를 놓는 이유는 부모님의 본향과 자신의 본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는 굿에서 흔히 나타나는 12신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지로 만드는 사소한 것 같은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죠. 아마 그냥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만드는 방법만 알았다고 하면, 마음속에 정성을 없을 것입니다. 수양아버지께서 그런 의미 하나하나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 작은 세발심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죠.”

 

 

 

박노갑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세발심지에 불을 붙여, 그 불이 하늘로 열기를 전해 신령들이 감응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한지로 만든 이 세발심지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3이라는 숫자는 우리민족의 숫자

 

왜 굿판에서 세발심지를 사용할까?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를 만들어 온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회장의 말이다.

 

“세발심지라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깊습니다. 두발도 서고, 네발로 만들어도 섭니다. 그러나 세발심지는 우리의 전통적인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삼족오, 삼정승, 삼불제석 등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화합입니다. 예전에 화로를 보아도 다리가 셋이 달려있습니다. 삼족형 화로는 그 다리가 하나만 없어져도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다리가 하나의 목적, 즉 서 있어야 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죠. 세발심지는 바로 그런 3이라는 숫자의 결정판입니다.”

 

결국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의 의미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또한 이 세발심지를 태움으로써 굿판에 모든 잡귀를 물리치기도 한다는 것.

 

“세발심지를 만들어 굿을 하다가 보면, 무엇인가 불을 타는 것만 보아도 이루어질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재주를 배웠다는 것이 행복하죠. 남들은 이런 사소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전통 하나를 익혀 지켜간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죠.”

 

세발심지를 만드는 남자 박노갑. 스스로 세발심지를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그 심지에 태워 신령에게 올린다고. 그것이 자신이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요즈음은 답사를 나가면 해가 일찍 떨어져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이야 많이 해가 길어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정말 답사를 다니려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다음 답사지를 가급적이면 가까이 잡는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짙은 안개로 오전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곳을 답사하고 난 시간이 벌써 5시가 넘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진다. 서둘러서 다음 답사지인 감곡면 오향리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음성군 감곡면 선돌을 찾아 나서다

 

오향리는 이천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미천을 건넌 후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있는 마을이다. 감곡에서 생극을 거쳐 음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몇 곳을 돌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오늘 찾아야 할 선돌 위치를 모른다. 한 곳에 들어가니 중학교 뒤편 논에 서 있다고 한다. 감곡중학교 뒤편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보니, 저편 논둑에 돌이 서있다. 찾아보아야 할 선돌이다.

 

거대한 선돌. 제작연대까지 밝혀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선돌.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재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선돌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3m 정도에 너비가 194cm, 폭이 60cm이다. 이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선돌바위들'이라고 부른단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인 신표와,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 등의 역할을 한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의 수호신은 아니다. 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다. 다만 돌을 절개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바위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향리 선돌이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선돌을 세운 날자가 기록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남쪽을 향한 선돌의 아랫부분 절개면에 「숭정 13년 경진 10월 22일 입석(崇禎 十三年 庚辰 十月 二十二日 立石)」이라고 얇게 음각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1640년에 이 선돌을 이곳에 세웠으니, 370년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선돌의 기능은 무엇일까?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입석의 기능은 수해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은 이곳이 도계지역이므로, 그러한 경계의 표시였을 가능성도 있다.

 

끝내 암돌은 못 찾고, 마음만 아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 선돌의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이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고, 암돌은 남성선돌에서 북쪽으로 3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선돌의 절개지가 남쪽이라면 그 반대쪽이 된다. 남성 선돌에서 바라보면 청미천 쪽 둑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안성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 남쪽 언덕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컴컴해지고 있으니 서둘러 찾아보기로 했다. 좁은 농로를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선돌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끝내 여성선돌은 찾지를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는다.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학생들이 한 떼 몰려온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적어도 학교에서 주변에 있는 문화재 정도는 한번이라도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들 이 근처에 선돌이 어디 있는지 알아?"

"선돌요. 모르는데요. 선돌이 무엇인데요?"

"저기 앞에 저 돌처럼 세워 좋은 돌인데.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몰라요."

 

어이가 없다. 도대체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학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돌, 그 정도쯤은 단 한번이라도 학생들에게 알려 줄만도 한데. 몇 번이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답답하다.

 

"이놈들 담배 피웠냐?"

"담배 피우지마라 뼈 삭는다."

 

차가오니 미처 끄지 못하고 버린 담배에서 연기가 나온다. 대답을 하는데도 담배 냄새가 난다. 교육이 점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찾고자 하는 선돌은 보이지를 않고, 학생들은 선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그런 학교생활.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선돌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 교육 현실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남들은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하면 대뜸 '좋겠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재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하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국을 수 십차례나 돌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본 문화재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를 마구 훼손한다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관심한 세태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말이다.

태평소 소리가 골목 안을 찢어놓게 울린다. 징과 바라가 그 소리에 더해진다. 빠른 박자로 두드려대는 소리에,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모여들었다. 대문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무슨 일인가하여 집안을 들여다본다. 4월 8일(일)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74-36호, 이정숙의 봄맞이 굿이 열리고 있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는 기자(祈子 : 흔히 무속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과 수양부리(자신의 신자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씩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이라고 부르는 이 맞이굿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큰 굿이기도 하다.

 

 

굿은 마을의 축제였다.

 

부천 원미구 도당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강남시장 뒤편의 주택가 골목이다. 이층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 건 오색의 천이 바람이 흔들린다. 마당에는 상이 차려져 있다. ‘천궁맞이’가 시작되었다. 천궁맞이란 하늘에 굿을 하는 것을 알리고, 모든 신령들이 굿청으로 좌정을 하라는 ‘신맞이 의식’이다.

 

이 날의 당주 이정숙이 불사제석의 신복을 걸치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거성을 한다. 좁은 집안을 감안해 골목길에도 마을 주민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과거 우리네 풍습에 어느 집에서 굿이 있다고 하면, 그 날은 온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누구나 굿을 하는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나누고, 굿판에 함께 동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도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던 것이다.

 

 

인간의 서열보다 진한 신의 서열

 

굿판에서 사람들은 굿을 하는 무녀들의 신탁이라는 ‘공수’에 울고 웃고를 반복한다. 조상거리라도 할 냥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다 알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날 이정숙의 맞이굿에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기자들은 내림굿을 해준 사람들을 ‘신의 부모’리고 하고, 내림을 받은 사람들을 ‘신의 자식’이라고 한다.

 

이 신의 부모나 신의 자식은 인간세상의 부모자식과는 또 다른, 신으로 인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와 자식이 이루어진다. 이정숙은 수원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의 ‘신딸’이다. 이날 이정숙은 자신의 맞이굿을 하면서 고성주에게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함께 거행했다.

 

무당들은 작두를 탄다. 그러나 아무나 작두를 타는 것은 아니다. 작두별상 등 작두신령이 모셔져야 작두를 탄다. 이런 작두를 타는 형태는 내림을 주관한 신의 부모가 작두를 탈 경우 ‘작두물림’이라는 절차를 통해 ‘신의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 작두물림을 하는 의식은 상당히 성스러운 행위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대물림을 해야 하는 작두신명

 

“저는 신어머니인 최씨어머니에게서 작두물림을 받았습니다. 제 신어머니는 신딸 5명에 신아들 저 하나가 있었는데, 누나들은 아무도 작두물림을 받지 못했죠. 저 하나만 작두물림을 받았어요. 제가 내림을 받고 난 뒤 한 2년 정도 있다가 작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받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는 마을에서 작두를 타는 만신이 왔다고 하면, 인근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고는 했다. 그만큼 작두를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것도 작두물림을 한 작두만신이라야, 무당으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요즈음처럼 작두를 그냥 내림을 받았다고 타는 것이 아닙니다. 작두는 꼭 신의 부모에게서 작두내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올바른 신명이 신의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죠. 우리 신딸들도 작두를 모셔놓고 있고, 그동안 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작두물림을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한 신명 줄을 가진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죠.”

 

우리네들이야 이런 영적인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찬찬히 설명을 듣다가 보니,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옛 말에는 ‘영험은 신령이 주나, 재주는 배워야 한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으면 영험은 신령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굿을 하고 굿거리 재차를 익히고, 음식을 만들고 하는 등, 이런 모든 굿에 관한 것은 신의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저는(이정숙) 아버님(고성주)에게서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나면서 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의 신의 자식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작두물림을 받으므로 해서, 이제야 비로소 이버님의 신딸이 되었다는 것을요.”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잘못하면 눈물이 날 장도로 꾸지람을 하고, 그런가하면 포용을 하는 마음이 너무 커, 오히려 누가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고성주의 신딸들은 작두물림을 받던 날 당의를 입었다. 그것은 고성주가 모시고 있는 작두별상이 남별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먼저 고성주가 작두를 갖고 논다. 그리고 작두를 신딸인 이정숙에게 넘겨주자, 작두를 갖고 마당에 마련한 작두를 탈 곳으로 나갔다.

 

작두를 잘 못 타다가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부정이 타 발을 잘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작두 위에 오를 수 있어야, 영험한 만신으로 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두공수’가 제일이라고 한다. 즉 신탁인 공수 중에는, 작두위에서 주는 공수가 제일 영험하다는 것이다.

 

작두 위에 오른 이정숙이 오방신장기를 받아들고 단골들에게 공수를 준다. 그리고 작두공수를 마친 후 작두위에서 내려섰다. 다음 날인 9일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이곳에서는 역시 고성주의 신딸인 박현주에게 ‘작두물림’이 있었다. 올 봄 맞이굿에서 두 명의 신딸에게 고성주가 작두물림 의식을 행한 것이다.

 

“이제는 이 아이들이 제 신명을 따라 작두를 탈 때가 되었죠. 대개 작두물림은 맞이굿에서 전해지는 것이 정상적인 물림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명의 신딸들이 비로소 제 신명을 이어받은 것이죠. 이런 의식은 저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박현주가 작두 위에 올라섰다. 순간 일갈을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그리고 오열을 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 작두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신도들은 눈물을 흘린다. 작두는 왜 눈물을 흘리게 만들까? 누가 그 서슬이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기를 좋아할까? 어찌 보면 신령의 사람들이라는 징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듯도 하다. 그런 작두물림을 받았으니 어찌 슬픔이 밀려오지 않을까. 이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령의 여인이 된 것이다.

“아버님의 손을 잡는 순간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저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 나는 이제 신령님에게 시집을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바람이 불지를 않았으면 작두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부천 도당동에 거주하는 고성주의 큰 신딸인 이정숙의 말이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거주하는 작은 신딸이라는 박현주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작두를 어떻게 타지’ 하면서 걱정을 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작두를 넘겨준 후에는 그런 걱정이 싹 달아났어요. 얼른 작두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틀 동안 두 명의 신딸들에게 작두물림을 해준 고성주는 이렇게 말한다.

 

“작무물림을 핼 때는 제 속은 숯검뎅이가 다 됩니다. 작두 위에 제대로 오르기는 할까라는 걱정부터, 과연 잘 불리는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죠. 작두날을 밟고 서는 것만 보아도 잘 불릴 것인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이 작두신령의 아내가 되었다. 그 작두신령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같은 신명을 가진 무한한 힘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신의 부모와 신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큰절을 하는 신딸들. 아마도 고성주의 마음은 시집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같지 않았을까?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마음이 푸근해 지는 것은 고택이나 절집 등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이다. 물론 절집보다야 고택에서 만나는 장독대, 그것도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집안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야말로, 따듯한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된다.

 

집집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윤기를 내며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있는 장독대. 지금이야 아파트들을 선호하면서 이런 정취어린 모습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옛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아파트 베란다 한편에도 윤이 나게 잘 닦은 독 두 어 개쯤은 갖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위는 경북 영덕 의병장 신돌석장군 생가지 장독 아래는 경주 김호장군의 생가지 장독


장독대를 보면 집안의 가풍을 알아

 

장독대는 집 뒤편이나, 안채의 옆에 단을 쌓고 그 위에 가지런히 독을 늘어놓는다. 장독대에는 간장을 비롯한 된장과 고추장, 김치나 장아찌 등 우리의 식생활을 윤택하게 할 식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하기에 장독대가 갖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어느 집을 찾아갔을 때 이 장독대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나면, 그 집안의 주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장독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리고 온 가족의 안위가 장독대에서 만들어진다. 아이가 아프면 장독대 앞에 상을 놓고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자성으로 비손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또한 자손들이 만 길을 떠나거나 큰일을 앞에 두고 있을 때도,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비는 일도 이 장독대에서 다 이루어졌다.

 

 

 

 

위는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 앞 장독들, 가운데는 서천 이하복 가옥의 장독대, 아래는 음성 감곡 서정우 가옥의 장독


장독은 단순히 찬거리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왜 장독대에서 그런 일들을 한 것일까? 어머니들은 왜 집안에 일이 생기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켠 후, 지성으로 비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장독대가 갖고 있는 직능 때문이다. 장독대는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독대에는 집안 식구가 먹고사는 찬거리의 맛을 내는 것도 이 장독 안에 들어있는 고추장, 된장, 간장과 각종 반찬 등이다.

 

 

 

 

위는 전남 무안 나상렬 가옥의 장독, 가운데는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장독, 아래는 함양 지곡 오담고택의 장독


하지만 이 찬거리들인 장들은 단지 반찬의 맛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들은 바로 ‘축사(逐邪)’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기에 이 장독대는 집안에서 주부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신성한 곳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는 한국인의 사고 속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정 깊은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장독대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마음과 정도 함께 사라져가는 것만 같다.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장독대.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간구하는 일이 이루어지던 소중한 곳이었던 곳. 이 봄,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던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장독대를 찾아, 길을 나서는 것도 새봄을 맞이하고 느끼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화가 왔다. 낯 모르는 번호가 뜬다. 요즈음은 세상이 하도 뒤숭숭한지라, 전화를 받기만 해도 돈이 빠져나갈 정도라고 한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요즈음은 선거철이 되다보니 이런저런 문자들이 참 많이도 들어온다. 어찌 그리 번호들을 잘 알아낸 것인지. 그렇게 대단한 나라이다. 이런 이야길하면 선수 잘 치는 사람들은 아 수원 토막살인 이야기인가보다 할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것과는 전혀 관게가 없다. 일이 있어 부천에 있다. 아침 일찍 부천으로 일을 보러 온 것이다. 일이라는 것이 사진찍고 사람만나 취제하는 일이다보니, 전화번호가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다. 그래도 영판 모르는 전화번호는 덥석 받는다는 것이 좀 그렇다.

 

'선생님께 땅을 드리려고요'. 먼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에전에 개그를 하다가 보면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런데 오늘 내가 그런 일을 당한것이다. 모르는 전화라고 해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일이고 보면, 참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받아야만 한다.

 

"예, 아무개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반갑습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실겁니다. 저는 아무개라고 합니다"

 

여기까지야 그냥 듣고 넘어갈 수가 있다. 물건을 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정도의 대화는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선생님께 땅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땅이요?"

"예, 제가 땅이 좀 많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되었으니 형제분들에게나 드리시죠"

"저희 형제들은 많이 주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래도 더 많이 주세요. 전 필요없습니다"

"아, 아깝습니다. 이 땅 정말 좋은 땅인데요"

 

이쯤되면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사기꾼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그렇다면 받아야죠. 이곳으로 서류 들고 좀 찾아오시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예, 수원시 아무개동 몇 번지 먼 신문사로 갖다 오세요" 

"탈칵(끊겼다)"      

 

참 세상에. 어째 이런 전화까지 걸려오는 세상이 되었나 모르겠다. 이렇게 허술하게 하는 놈들도 성공을 하는 것이 요즘인가 보다. 괜히 나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다. 세상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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