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참 지겹게도 쏟아 붓는다. 잠시 길을 걸었을 뿐인데,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한다. 비가 내리면 좁은 뒷골목을 다니면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일부러 맞고 다녔다. 아마 그런 어릴 때의 기억이 있어, 이상하게 뒷골목에 정이 더 가는 것만 같다.

 

사실 뒷골목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높지 않은 담이 만들어주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훈수를 막아가며 장기를 두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할머니들이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다가 보면, 어느새 손녀는 잠이 들어버린다.

 

 

 

그림들의 이야기가 있는 지동 뒷골목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화성을 바라보며 마을이 형성이 되어있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지나 게이트볼장을 끼고 걷다가보면, 골목 담장에 그림들이 보인다. ‘지동 벽화길’이란다. 이곳은 추억의 골목길 축제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길 축제'란 그야말로 골목길에서 열리는 축제를 말한다.

 

2011년 ‘지동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해 8월부터 ‘수원화성과 지동 골목길 반가운 동행’이라는 주제로, 시범골목 약 1km의 구간에 골목의 특색을 살린 벽화 그리기와 조형물들을 설치하였다. 이 지동 뒷골목의 벽화그리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이 그림들이 다 완성이 되고나면, 수원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으려는지.

 

 

 

돌계단을 내려 서 천천히 벽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벽에는 수많은 군상들을 만날 수가 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조형을 하고 화장을 한 벽들이,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한 벽에는 거울을 여기저기 붙인 곳도 있다. 지나는 행인들이 자기 키에 맞추어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인가 보다.

 

“할머니 거기 문 없는데, 어쩌시려고”

 

여기저기 작은 의자와 아름답게 그린 그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누군가 담벼락에 커다랗게 초가 집 한 채를 그려 놓았다. 아마도 그런 시골마을의 초가집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천천히 골목을 지나본다. 어릴 때 살던 서울의 집도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벽을 참 다람쥐처럼 타고 오르기도 하고, 성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가끔 이 골목을 걷는다.

 

 

지난 해 골목축제 때 모습이다

 

어느 집인가는 벽에 커다랗게 화성을 그려져 있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골목을 걷는데 웬 할머니 한분이 계단을 올라 벽 앞에 서 계시다. 그런데 벽에 문이 보이질 않는다.

 

“할머니 거긴 문이 없는데 어쩌시려고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신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귀가 어두우신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으시다. 이런 나를 지나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신이상자로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피식 웃는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어째 이런 재미있는 뒷골목 길을, 그렇게 골목에 샛바람 지나듯 휑하니 가버리는 것일까?

 

 

 

오랜만에 지나가본 길에는 그림이 더 늘었다. 어느 집 담에는 예쁜 의자도 함께 마련을 해주었다. 이런 작은 뒷골목에 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더운 날씨 탓인가 기척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걸어 온 골목길을 뒤돌아본다. 벽 앞에 선 할머니는 아직도 꼼짝 않고 그곳에 서 계시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될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 떨어진 빗줄기는 그렇게 흘러 세 곳의 물길로 합류가 된다.

 

 

양대 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 태백의 해발 935m인 삼수령 마루에 적혀있는 글이다. 삼수령의 고개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3대강이 발원하고, 민족의 척추인 태백산을 상징하는 삼수령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분출되는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영남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공업입국의 공도들을 자리하게 했다.

 

한강 역시 동북서로 물길을 만들면서 한만족의 수도를 일깨우고, 부국의 기틀인 경인지역을 일으켜 세웠다. 오십천도 동으로 흘러 동해안 시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삼수령 고개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분은 이곳에 비가내리거나 눈이 내려 녹아 물이 흐르면, 남으로는 낙동강으로 스며들고, 동북으로는 한강으로 스며들며, 동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의 발원이란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 발원지로 삼기 때문에 삼수령에 떨어지는 비가 발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지는 비가 3대 강과 천으로 스며들어 그 물과 합류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삼수정에 오르다.

 

삼수령 분기점에는 탑이 서 있다. 해발과 이곳이 오십천과 한강, 낙동강의 시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 삼수령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다.

 

 

삼수령 탑이 서있는 곁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정자가 서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정자는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삼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에 오르니 밑으로는 깊은 골이 보이고, 저 멀리 백두대간의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숨을 쉬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누구라 이곳에 올라 글 하나 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정자가 오래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올라 글 몇 수 남겼을 만한 그러한 정취다. 나라도 글을 잘 쓴다면 짧은 글 한토막이라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시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한 인사이니 어찌하랴. 능력이 없음을 탓할 수밖에.

 

 

삼수령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태백시내에서 이곳을 지나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갈 수가 있고, 이곳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만날 수가 있다. 삼수정 위에서 주변 경치를 돌아본다. 걸어서 이곳을 올랐다면 그대로 선계가 아닐까?

 

지금 이렇게 차로 오른 삼수령이 조금은 서운한 것은, 그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서인가 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삼수령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늘에서 내려선 가족들은 또 이렇게 세 곳으로 헤어져 물길을 만들려나?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수원박물관 이종학 특별전

 

내가 생전에 사운 이종학 선생을 만나 뵌지도 꽤 오래되었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독도는 우리 땅이다. 간도도 우리 땅이다. 우리는 벌겋게 두 눈을 뜨고 우리 땅을 빼앗긴 못난 민족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아마도 이 다음에 우리 자손들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선조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 이종학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10년이 흘렀다. 8월 14일 오후 3시,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서는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란 기획전의 개막식이 열렸다.

 

 

선생님은 진정한 애국자요, 사학자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수원박물관의 한동민 기획팀장은

 

“이번 기획전은 내일이 8,15 광복절이라 특별전으로 마련했습니다. 이종학 선생님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면서부터 우리 민족과 영토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신 분입니다. 저희 수원박물관에 기증하신 자료만도 2만점 정도가 됩니다. 선생님은 자비를 들여 자료수집을 하셨으면서도 관련자료를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기증을 하시고는 했습니다. 평생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독도에 관한 자료는 거의 다 독도박물관에 기증을 하셨고, 그 외에도 경기도박물관, 동학혁명기념관, 이순신기념관, 토지박물관 등에 수많은 자료를 기증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늘 한, 중, 일 삼국의 관계를 영토분쟁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국과는 간도문제를, 일본과는 독도문제를 늘 이야기를 하셨죠. 선생님은 평생 학자로 사신분이십니다. 책을 손에서 놓으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독도박물관 앞에서 영원히 독도를 지키실 것입니다”

 

 

유가족 인삿말을 하는 동안 염태영 수원시장(우)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좌)이 함께 하고 있다(사진 위) 개막식의 테이프 커팅(아래) 

 

사운 이종학 선생의 나라사랑

 

오후 3시 특별기획전이 마련된 전시실 앞 중앙로비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미망인을 비롯한 유가족들과 100여명의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이런 전시는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이종학 선생은 수원을 사랑하신 분이고, 평생 자비를 들여 나라를 굳건히 세우겠다는 뜻 하나로 사신분이다. 이런 분이 수원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이 전시는 수원시민들과 공무원들은 물론,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도 꼭 보았으면 한다. 선생님의 나라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전시중인 사운 이종학 선생이 수원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

 

사운 이종학 선생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했다. 선생의 호 ‘사운(史芸)’도 ‘역사를 김매기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늘 그렇게 역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사료를 무기삼아 뛰어들었다.

 

선생은 평생에 가장 기쁜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쁘고 통쾌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945년 조국 광복이요, 또 하나는 1990년 7월 2일 시마네현에서 관계자로부터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항복을 받고 온 일이다" 라는 것이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친필 자료정리본(위)과 1844년 발행된 신제여지전도의 부분. 프랑스인이 1835년에 만든 세게지도를 참고해서 미쯔쿠리 소고가 제작한 지도. 조선과 일본사이의 바다가 '조선해'로 표기되어있다. 사운 선생은 늘 동해가 아닌 조선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오셨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독도에 대한 끊임없는 자료수집과 연구는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 평생을 일본 스스로가 ‘대한민국 독도’를 인정하는 자료를 모았으며, 방위개념의 동해가 아닌, 고유명칭인 ‘조선해’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노력으로 1997년 ‘독도박물관’이 개관하게 된다.

 

간도도 빼앗긴 우리 땅

 

사운 이종학 선생은 살아생전에도 늘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했다. 일본에 의해 우리 땅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빼앗겼다는 것이다. 간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간 백두산 정계비를 설치하고, 입록강과 토문강에 이르는 선을 국경선으로 정함. 조선후기 조선 유민들이 이주 정착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면서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

1902년(광무 6) 대한제국 정부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 한인보호에 힘씀

1904년(광무 8)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 소환

1907년(융희 1) 일제의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설치. 간도는 한국의 영토로 규정

1909년(융희 3) 일제는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보장받는 댓가로 청나라의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인정하고 ‘간도협약’을 체결. 대한제국은 영유권 주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간도를 빼앗김.

 

 

특별전시관에는 모두 7가지로 구분을 하여 전시를 한다. 1. 프롤로그 전시개요와 이종학 연보, 2. 역사의 김매기를 시작하다. 3. 충무공 이순신과의 만남, 4. 한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 5. 우리 강역지키기(일제 대륙침략사), 6. 내 고향 수원, 7.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다. 이번 전시는 2012년 8월 1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계속되며 매월 첫째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번지에는 ‘대안공간 눈’이라는 곳이 있다. 눈을 들어가기 전에는 ‘골목집’이라는 간판을 붙인 밥집이 자리한다. 이 밥집은 막걸리 등 술을 팔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 집을 이용할 때는 주로 늦은 시간이다. 모임을 이 집에서 자주 갖기 때문이다.

 

여름 낮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찾아간 이 골목길은, 밖에서 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좁은 골목과 골목이 연결이 되는 이 길은 지난해부터 벽화를 그리고 있다. 그저 무료하고 답답한 벽에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들은, 좁은 골목길의 답답함을 가시게 해준다. 그래서 이 골목을 다니는 것이 때로는 큰 재미를 준다.

 

 

 

“이놈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

 

골목길을 들어서면 굳이 골목집을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벽에 골목집의 분위기가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안공간 눈을 지나 골목이 좌우로 갈라진다, 일부러 좁은 골목을 잠시 들려본다. 담장이와 벽화가 마주하는 좁은 골목길로 행인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어디 옛날 문화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모습이다.

 

우측의 큰길가로 나가본다. 전깃줄 위에 참새와 같이 아이들이 앉아있다. ‘이 녀석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라’ 하고 소리를 쳤더니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보니 이 녀석들 등 뒤에 날개를 달았다. 백주 대낮에 어린 천사가 내려와 지나는 행인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아마도 이 벽화를 그린 화가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 나오다가 보니, 길바닥에 ‘로맨스 길’이라고 자갈을 이용해 글을 써 놓았다. 이곳이 왜 로맨스길이 되었을까? 하긴 옛날 같으면 이 길을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남몰래 수상한 짓을 했을 것도 같다. 더구나 해질녘 땅거미가 내리 앉을 때면, 슬그머니 입맞춤이라도 해보고 싶었을 그런 골목길이다.

 

 

 

1950년대로 돌아가는 골목길

 

이 길은 아직도 1950년대를 연상케 하는 골목길이 남아있다. 아마 언젠가는 이곳도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이 길을 걸으면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낡고 습한 이런 골목이 무엇이 좋으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라는 것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좁디좁은 이 길에는 사람들의 땀 냄새가 폴폴 풍겨난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시멘트 건물에서 쏟아내는 후텁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아니다. 골목 저편 어귀에서 꺾인 담벼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이 그리도 고마운 길이다. 큰길가로 잠시 돌아 나온다. 그 곳에 엊그제 내린 비로 인해 수원천의 물소리가 시원하다. 그 물소리에 잠시 마음을 흔들어 씻은 후, 다시 골목길을 향한다.

 

 

 

조금은 주변이 달라진 듯한 길을 지나서, 옛날 장거리였을 법한 곳에 닿는다. 낡은 간판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좋아라한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한 마음이다. ‘부여집 5-3164’라는 전화번호가 보인다. 그 옆에 또 하나 ‘허가번호 제2-20○○’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아직도 1950년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거리 향토유적이라도 지정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찻길을 건너 통닭거리로 들어간다. 요즈음은 이 골목 끝에도 통닭집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뒷골목이 재미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또 다른 볼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붉은 선 안이 골목길을 돌아본 곳이다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것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래도 끈끈한 정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곳. 뒷골목을 걷는 것은, 그 곳에 또 다른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 비가 왔다고는 하지만, 8월 13일은 아직 여름이다. 한 낮의 수은주가 31도를 넘었다. 이런 날 점심을 먹고 나면 괜히 나른해진다. 그런 나른한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땀을 한 번 흘리는 것이 제일이란 생각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석공원으로 달려갔다. 땀 한번 쏟아보자고.

 

만석거는 일왕저수지, 교구정 방죽, 북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이 만석거를 축조하였다. 이 만석거로 인해 황폐했던 땅에서 쌀 만석을 더 생산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을 ‘만석거’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만석거 일대는 현재 ‘만석공원’으로 조성하여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다.

 

 

만석거를 바라보는 정자 영화정

 

저수지 조성 후 쌀 만석을 더 생산했다고 해서 ‘만석거’라는 명칭을 붙인 이 저수지를 일제는 ‘일왕저수지’로 개명을 했다. 1920년대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한다는 이유로, 우리고유의 지명을 말살시키려는 음모였다. 그렇게 생겨난 명칭이 바로 일왕저수지이다. 그러나 이곳을 아직도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만석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지금은 ‘영화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이 영화정의 원래 이름은 ‘교귀정’이었다. 이 교귀정은 시구관의 부사와 유수들이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주고받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 교귀정은 사라지고 만석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교귀정 자리에서 200m 정도 동북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영화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원래는 8칸 정도의 정자이며 북쪽으로 난 날개채 2칸은 온돌이고, 남쪽으로 난 세로로 두 칸은 포판인데, 3면과 온돌 뒤쪽은 모두 퇴를 반 칸씩 달아내 하엽난간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다. 정자 서쪽에는 대문을 내고, 남쪽으로는 작은 문을 냈는데 둘레는 네모꼴 단장이라고 소개를 한다. 1796년 병진년 행차시에 영화정이란 편액을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복원한 영화정, 만석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춰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 10월에 신축, 복원한 건물이다. 영화정의 형태는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이 되어있어 그 모습을 따랐을 것이다. 더운 날 찾아간 영화정. 한 옆으로는 하늘 높게 자란 소나무들이 서 있고, 앞 만석거에는 연잎들이 파란색을 띠고 있어 더위에 지친 마음들을 달래주고 있다.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그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에 그 정자에 앉아있던 선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정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문이고 작은문이고, 건물 안에 방문이고 모두가 다 꽁꽁 잠겨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누마루에 앉아 저수지쪽으로 낮게 조성을 한 담장너머로 보이는 만석거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가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가끔 이런 건물이나 정자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관리를 하기 싫어서 이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경치를 즐기고는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 역시 보물이다. 화성의 많은 전각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쉬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그저 잠가놓고 사방에 감시 센서를 세워놓으면 관리가 제대로 되는지 아는가 보다. 이런 사고는 참 모자람의 극치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이런 처사, 하루 속히 그런 사고가 바뀌기를 고대한다.

 

 

 

문화재란 사람들이 직접 그곳을 느끼고 더 감사를 할 때 제대로 된 보존이 이루어진다. 문마다 잠가놓고 정작 울안에 수북이 자라고 있는 풀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영화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만석공원에 볼만한 전각 하나가, 잠가놓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으로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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