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들이 널려있다. 그리고 한편이 절개한 흔적도 보인다. 이 바위들도 누군가 쪼아내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스스로 세상구경이 하고 싶어 쪼개져 구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위 솟구치는 벼랑위로 성벽이 보인다. 이곳은 왜 이렇게 높은 것일까? 바로 그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는 곳이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면, 적들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가파른 비탈이고, 거기다가 높기까지 하다. 옆으로는 숨겨진 암문이 있어, 도대체 어디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조차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런데다 성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피할 수도 없다. 바로 서노대에서 쏘아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 때문이다.

 

 

바위야 니들은 왜 그곳에 있느냐?

 

이곳은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 길도 미끄럽지만, 바위와 소나무들이 성벽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곳의 바위들은 정말 제멋대로이다. 그저 눕고 싶으면 눕고, 서고 싶으면 서 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제멋대로 생긴 채로 화성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도 바위도 그리고 사람도, 이 구간은 화성을 탐낸다. 비에 젖은 소롯길은 미끄럽다. 겨우겨우 비에 젖은 바위를 의지해 바위틈을 벗어난다. 갑자기 성벽이 급하게 아래로 내리닫는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 여장들도 함께 구르듯 한다. 나무들도 덩달아 성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화서문에 무슨 풍각쟁이라도 온 것일까?

 

 

포루의 으스스한 모습에 겁을 먹었을 것

 

급한 경사는 화서문까지 이어진다. 서장대에서 화서문까지의 길이는 630m 정도. 그 거리가 모두 내리막길이다. 조금 가면 서이치를 지난다. 굽은 소나무 한 그루, 치를 넘겨보고 있다. 화성 성 밖의 나무들은 왜 그리도 화성을 탐내는 것일까? 아마 이들도 전화(戰禍)를 피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철옹성인 화성 안으로 피신을 하고 싶음인지.

 

저만큼 서포루가 보인다. 화성의 포를 쏘아대는 5개 포루 중 한 곳이다. 성이 돌출된 치 위에 지은 구조물이다. 그런데 이 서포루의 형태는 색다르다. 딴 곳의 포루가 밑을 돌로 쌓고 그 위에 포사를 설치 한 것에 비해, 서포루는 아래부터 온통 검을 벽돌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포사 역시 딴 곳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견고한 모습이다.

 

 

저런 서포루의 모습을 본 적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아마도 그 으스스한 모습을 보고, 포를 쏘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치성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서포루를 지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배터리가 없다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화면이 사라져버렸다. 카메라마저 겁을 먹은 것일까?

 

 

세상은 참 살기 편해졌다

 

잠시 고민을 한다. 이제 화서문까지 남은 거리는 420m. 이처럼 비가 퍼붓는 날 지금까지 잘 견뎌왔는데, 배터리가 떨어지다니. 그러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법. 카메라 대신 지니고 있는 휴대폰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소형 카메라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휴대폰을 꺼내들고 걷기 시작한다.

 

서이치를 지난다. 저만큼 성벽이 휘어진 곳에, 사방이 훤하게 트여있는 서북각루가 보인다. 서북각루 역시 치성 위에 설치한 구조물이다. 서북각루도 예전에는 사방이 모두 판문으로 막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돌방까지 마련해 겨울에도 군사들이 따듯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서북각루 가까이 가니 빗길에 나그네 한 사람이 하염없이 서 있다. 아마도 저 나그네도 나처럼 이 비에 화성 길을 오를 것인지를 고민하는 듯하다. 서북각루를 지나면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화서문이 보인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세차진다.

 

9월 4일, 오늘의 발길을 멈춘다. 화서문 옆으로 지나는 차들이, 도로를 흐르는 물을 튀기고 지나간다. 화성을 겉도느라 어차피 다 젖었는데, 누구 탓해 무엇 하리오. 그러고 보니 나도 점점 화성을 닮아 가는가 보다.

항아리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안에서 신발과 동전, 지폐가 마당으로 뿌려진다. 그것은 어찌보면 이 사회를 질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항아리라는 갇혀진 공간속에서 갖고 있는 수많은 재물을 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트려 소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1일 오후 5시부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17-24에 소재한 수원시미술전시관 앞에서 펼쳐진 김석환의 행위예술이다. 이 행사는 (사)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가 주최하는 2012 수원예술인축제 기획전인 ‘소통·메시지’의 식전행사로 펼쳐졌다.

 

 

수원미술전시관 소통과 메시지 전을 열다

 

‘소통·메시지’전은 9월 11일(화)부터 17일(월)까지 열리며,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수원시민과 예술인이 함께 예술적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술, 세대, 장르를 떠나 변화의 혁신을 추구해, 멈춤이 아닌 진화와 화합으로 소통함에 그 내적사고를 둔 전시이다.

 

107명의 수원미술협회 회원들이 참가한 이번 전시의 개막식에는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수원시장을 대신하여 참가한 박흥식 문화교육국장, 수원문화재단 유완식 대표이사와 김훈동 수원예총회장 등이 참석을 하였다.

 

 

 

소통, 독 속에 피는 사랑

 

식전행사로 펼쳐진 행위예술가 김석환의 ‘소통, 독 속에 피는 사랑’은 구조물로 만든 소와 지게 위에 올린 독을 소품으로 사용을 했다. 처음에 관객들에게서 걷은 돈과 관객들의 신발을 독 안에 넣고, 김석환의 행위예술이 시작이 되었다.

 

신발은 우리가 걸어 온 흔적들을 담고 있다. 신발은 아득한 옛날부터 걷기 시작하여, 먼 훗날까지 걸어야 하는 메신저와 같은 상징물이다. 우리는 이 신발을 신고 걸으며 세대와 거리, 공간 등을 넘어 소통을 하게 된다. 이 소통은 아주 오래전부터 앞으로의 미래까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신발은 시대의 상징이다. 깨진 독 속에서 주화를 찾아 신발 안에 채우는 작업은 미래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과 같은 현장의 상징한다. 그리고 그 유물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석환은 이 행위에 대하여

 

“신발의 의미와 유물과의 만남은 많은 상상과 미학을 우리에게 던지지만, 이는 존재론에 대한 하나의 회귀로 시공간을 통시합니다. 연기는 미래와 현재를 잇는 정화된 시각적 소통을 연출하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한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권미강(여, 47세. 전국작가협회 회원)의 ‘독 속의 사랑’이라는 자작시낭송이 곁들여졌다,

 

내가 첫발을 떼었을 때

너는 온전히 내 발의 길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첫 발자국을 남겼을 때

너는 이미 나와 똑 같은 발자국으로

내 흔적을 찍었다.

대지의 숨결이

너와 내 발자국의 흔적들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진 너와 나의 발자국들

저 각양각색의 흔적들

한 켤레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우리.

 

‘허무처럼 큰 공간은 없다.’

함께 길을 떠나 얽혀진 흔적들이

검은 항아리 아가리 속으로

추억을 던져 넣은 첫 발걸음의 기억들아!

텅 빈 것 속에 텅 빈 마음을 던져 놓은 들

채워지지 않는 허무, 꽃으로 피다(이하 하략)

 

 

독 속에 있던 신발은 그 안에 돈이 담긴 채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의 꽁무니에서 흰 연기를 뿜으며 배우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저 흰 연기가 시공을 초월하는 여행을 하는 물체의 뒤편에서 추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소통이 없이 막힌 인간들에게 소리라도 치는 듯, 굉음을 내면서 말이다.

광교산 산행을 마치고 나면, 등산로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보리밥을 먹거나, 막걸리를 한 잔 하고는 한다. 갈증과 배고픔으로 인해 항상 찾게 되는 집 중에는 보리밥 집이 있다. 이 집은 광교산 등산로 입구에서는 좀 더 시내 쪽으로 떨어져 있다. 그래도 일부러 걸어 이곳까지 찾아가는 것은 남다른 음식 때문이다.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332번지에 소재하는 ‘토담집’. 우선은 그 이름부터가 마음에 든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니 성격까지 바뀐 듯하다. 예전에는 조금은 서양스런 음식을 좋아하기도 했는데, 요즈음은 비빔밥이나 국밥, 찌개 등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답사를 하게 되면서 우리 것을 즐기게 된 모양이다.

 

 

 

맛집, 각자의 기호에 맞아야

 

음식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맛을 느끼는 것이 다르다. 언젠가 맛집에 소개된 집을 우연히 찾아들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조미료를 갖고 맛을 낸 집이기 때문이다. 체질적으로 조미료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런 집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수저를 놓고 나와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맛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텁텁한 맛을 싫어할 수도 있다. 하기에 맛집을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 상당히 조심스럽다. 내가 소개하는 맛집이야 일부러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답사를 하거나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 ㅈ비에서 내오놓는 그대로를 휴대폰 등으로 촬영을 한 뿐이다.

 

 

 

 

 

이런 것을 두고 ‘맛집 소개’라고 한다면 좀 미안한 감도 없지를 않다. 가격이라고 해보아야 기껏해야 1인분에 5,000 ~ 8,000원 정도의 집들이니, 그 안에 장식이 값나가고 분위기 있는 집은 더 더욱 아니다. 이 토담집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도, 그저 선술집이나 객주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찬 한 가지 더 놓았을 뿐인데

 

광교산 입구 식당마다 보리밥을 시키면 나오는 것이 거의 동일하다. 나물과 된장국, 야채 등이다. 그런데 집집마다 한 가지씩 색다른 것을 내어놓는다. 어느 집은 두부를 주기도 하고, 어느 집은 묵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혀 색다른 것을 한 가지 주는 집들도 있다.

 

 

 

 

 

자연농원 토담집도 색다른 것을 한 가지 내준다. 바로 돼지고기볶음이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주는 고기는 밥을 먹을 때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준다. 가격은 거의 동일하다. 1인 분에 6,000원이다. 그런데 이 돼지고기가 무엇이라고, 그 고기에 그냥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광교산을 오를 때면 가끔 이 집을 찾아간다. 우선 푸짐하고 보기에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고 했던가? 그저 한 가지 더 얹어 줄 뿐인데, 무엇인가 많은 것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어 좋다. 혹 광교산을 들릴 일이 있으면 이 토담집을 찾아가 보리밥 한 그릇 먹어보길 권한다. 하지만 음식은 사람마다 먹는 법이 다르니, 꼭 사전에 싱겁게 먹는다거나, 짜게 먹는다거나 이야기를 하고 말이다.

 

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요즈음 산행을 하려면 모기와 한 판 전쟁을 벌어야 한다. 특히 우리와 같이 계곡을 많이 이용하다가 보면, 모기의 공격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 대개 산에 갈 때는 모자를 착용하고 목에 두를 것을 준비하지만, 갑자기 산행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저 팔이 떨어지도록 모기를 쫒아내야만 한다.

 

절터를 찾아 산을 오르는데, 초장부터 만만치가 않다. 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신모기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짜증스럽게 달라붙는다. 이럴 때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급히 모기를 막아내는 두건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속옷하나면 산모기 공격을 막아 내

 

이렇게 수십 마리의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덤벼들 때, 속에 입은 ‘런닝’을 이용한다. 속옷을 벗어 밑 부분이 머리로 가게 감싼다. 그리고 뒤로 묶어주면 끝이 난다. 볼품은 좀 그렇지만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뒤편 목을 다 가려주기 때문에 모기들 아무리 뒤로 달라붙어도 수가 없다. 그 두터운 속옷뭉치를 뚫지는 못할 때니까.

 

보기가 좀 거시기 하긴 하지만, 산에가서 산모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보지 않았으면 그 고통을 모른다. 이렇게라도 피하는 방법밖에...

 

거기다가 속옷 재질이 면이니, 땀 또한 흡수가 잘된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제대로 막아주는 격이니, 일거양득이다. 볼품이 없다는 것 빼고는 그런대로 좋은 방법이다. 산에 가서 모기의 공격을 받다가 보니, 나중에는 이런 기발한 방법도 생겨났다. 누구 말마따나 ‘그러고도 산을 가냐?’는데, 거기 문화재가 있으니 올라가야지.

 

 

 위 사진 두장은 흉측한 몰골을 보아 눈이 오렴되신 분들을 위해, 눈 정화 차원에서 서비스품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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