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이 갑자기 시끄럽다. 박수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도 들린다. 지나는 사람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쳐준다. 골목 안을 기웃거려 본다. 어르신들이 길가 의자에 앉아 박수를 치고 계시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보니 가면을 쓴 남자가 작은 마차를 끌고 있다. 그 위에 ‘황금마차’라고 적혀 있다.

 

도대체 황금마차가 무엇이지? 궁금하다. 내용을 알아보아야 하는데 다들 바쁘다. 노래하기에 바쁘고, 음식 나르기에 바쁘고, 박수치기에 바쁘다. 그리고 보니 한가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 이럴 때는 그저 그 안에 나도 섞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본다.

 

 

어르신들을 위한 찾아가는 황금마차

 

황금마차는 60세 이상 어르신들을 위한 예술서비스를 하는 마차이다. 9월 15일 오후 6시, 수원시 팔달구 지동 292-3 앞에는, 어르신들이 한두 분씩 모여든다. 그리고 가면을 쓴 남자가 몰고 들어오는 황금마차가 입장을 하였다. 이어서 3인조 노래동아리인 ‘주말 앤 브루스’가 신나게 노래를 불러댄다.

 

황금마차는 문화바우처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천원진, 장성진, 장영환 등의 작가가 참여하였고, 송주희와 임주현이 기획을 하였다. 수원시 팔달구에서 상대적으로 어르신들이 많은 지동과 행궁동 일대를 돌며, 모두 12회의 공연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황금마차에서 하는 일은 재미있다. 우선은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영화 상영을 한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곡한 노래로 공연을 한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삶과 마을의 이야기가, 그대로 노래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만도 재미있다. 그런데 맛있는 국수를 직접 만들어, 어르신들께 대접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것 봐, 지동으로 이사 와”

 

황금마차 프로젝트는 마차가 이동한 길, 맛있는 음식,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황금마차 회갑연의궤’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9월 15일에 그 첫 잔치를 시작한 것이다. 이 황금마차의 운영은 9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월 4회씩 총 12회가 준비되어 있다.

 

 

차가 다니는 골목길이다. 그 한편에는 황금차가 서 있고, 노래동아리들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구경을 나온 어르신들이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나무의자에 앉아 구경을 하신다. 차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비키라고 누구하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서로 비켜가면서 조용히 차를 몰고 갈 뿐이다.

 

“할머니, 재미있으세요?”

“그럼 재미있지. 우리 지동은 이런 행사가 많아”

“또 무슨 행사에 가보셨어요?”

“골목에서 하는 행사가 많아. 옥상에서도 하고”

“좋으시겠어요?”

“그럼 좋다마다. 지동으로 이사 와, 좋아 우리 마을”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지동이 살맛나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마을 분들 모두가 지동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송주희(여, 32세)는

 

“지동은 딴 곳보다 어르신들께서 많이 시십니다.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고민을 하다가 이런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죠. 황금마차는 직접 찾아가는 마차입니다. 어르신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가야죠. 이젠 그동안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신 분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까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

 

 

지동마을 골목길. 언제나 정이 넘쳐나는 곳이다. 화성과 함께 어우러진 지동에는 화성의 성돌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골목마다 넘쳐흐른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황금마차에서 즐거움을 만끽한 어르신들은,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기대가 되신다고 한다.

‘살인의 추억’이란 불명예인 영화제목으로 유명한 수원시 팔달구 지동. 오원춘 살인사건으로 인해 지동은 사람들이 회피하는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지동이 알고 보면,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날마다 변하고 있는 지동. 그 지동이 이제 새로운 마을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지동’이란 명칭은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때, 이 마을에 커다란 연못을 조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르신들은 아직도 지동이란 명칭보다, ‘못골’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을 더 정감이 간다고 한다. 이 이름 안에는 지동이 훈훈한 정이 살아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일려주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문을 열어 준 '지동제일교회' 13층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수원과 화성의 야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열린교회’가 주민들에게 준 선물

 

이 지동은 수원의 화성 밖에서 유일하게 성곽을 끼고 길게 늘어선 마을이다. 지동사람들은 날마다 이 화성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지동사람들은 화성이 단순한 성곽이 아닌, 사람의 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건물들은 낡고 우중충하다. 거기다가 살인사건 이후 사람들이 입주를 회피하다 보니, 마을 안에는 빈 점포들까지 생겨났다.

 

이런 지동의 변화에 가장 먼저 적극적인 호응을 한 것은, 지동에서 가장 높이 솟아있는 교회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지동제일교회’는 지동의 가장 높은 길인 ‘용마루길’의 입구에 서 있다. 용마루길이란 지동시장을 벗어나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가는 옛 길이다. 이 길은 남수문을 벗어나 위로 오르다가 보면, 지동제일교회에서 시작해 창룡문까지, 길게 외성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길이다.

 

 

화성에서 바라본 제일교회. 그 중앙에 솟은 높은 곳이 종루이다. 이곳을 주민들에게 개방해 갤러리와 전망대로 조성하였다.(위) 9월 15일 밤 9시에 찾아간 제일교회(아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이 교회의 종탑은 어디서 보아도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높이 솟아있기 때문이다. 지표에서 종탑 꼭대기까지의 높이가 47m나 된다. 사람들은 그런 지동제일교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교회가 가장 먼저 지동의 변화에 문을 열어 젖혔다.

 

사용하지 않고 있던 교회 종루를 개방한 것이다. 그것도 그냥 개방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을 갤러리와 전망대로 조성해 주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감히 우리가 알고 있던 교회들에게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노을 길 전망대’, 그 마음이 하늘에 가깝다.

 

전망대의 이름은 ‘노을 빛 전망대’라고 했다. 그리고 8층부터 10층까지는 갤러리로 변했다. 층마다 배색을 맞추어 칠을 하고, 그림도 걸고 사진도 걸었다. 그리고 13층까지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층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주변의 경관이 달라진다. 7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천천히 꼭대기를 오르면서 즐기는 재미. 맨 위층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아찔하다.

 

밤 9시에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의 안내를 받으며, 해발 99m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화성. 한 눈에 화성이 들어온다. “저기는 동문, 저곳은 서장대, 저곳은 행궁". 종루 꼭대기에서 약간은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돌아본 수원시와 화성의 야경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하늘이 가깝다. 잠시 주춤한다. 순간적으로 등을 쓸어본다. ‘혹 날개라도 하나 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8층에 마련한 위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 입구.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안내를 해준 기노헌 총괄팀장이다.(위) 그리고 9층에 마련된 갤러리(아래)


수원제일교회는 종탑의 7층부터 이 13층까지의 공간을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그리고 화성을 찾는 사람들 누구나가 이곳에 와서 화성 인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임시로 개관을 했지만, 내년 4월이면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완전 개방을 한단다. 거기다가 전망대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적자원의 지원까지 약속을 했다. 유지 및 보수관리도 교회에서 전담을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한 것이다. 주민들은 물론 ‘노을 빛 전망대’를 올라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열린교회’에 감사를 한다. 더구나 닫혀있는 문을 연 제일교회는 예배를 보는 신성한 공간까지, 음악회를 할 수 있도록 운영을 하고 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지역을 위해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런 마을이 바로 지동이다.

 

 

끝없는 변화로의 추구, 지동은 날마다 깨어난다.

 

날마다 변해가고 있는 지동. 이 마을은 그저 골목만 들어서도 재미있다. 골목길마다 그려진 벽화를 구경하다가 보면, 그 안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어린꼬마들의 함성도 들린다. 꽃들의 속삭임도 있고, 나무인줄로만 알고 기어오르다, 이마에 혹을 붙인 벌레의 불평도 들을 수가 있다.

 

이런 지동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내고자 한다. 지동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요즈음 전보다 더 똘똘 뭉쳤다. 그 안에 훈훈한 정이 있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내 가족이 된다. 그리고 무엇이나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다. 수원 화성의 성벽을 바라보고 사는 지동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그 안에 수원제일교회도 있었다.

화성에서 가장 견고한 구간은 바로 화서문(서문)과 장안문(북문) 사이일 것이다. 우연히 이곳의 야경을 보게 된 후 화성의 진가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럼 지금까지 자랑 질을 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분들도 계실 것. 하지만 화성이야 전 구간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화성의 견고함을 보려면 서문과 북문 사이를,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을 보려면 이곳에서 방화수류정까지 일 것이다.

 

화성을 겉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미할 수도 있다. 성 밖으로 보이는 성벽과 치성 위에 올려 진 구조물들. 그 외에 무엇이 있느냐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은 단순히 성벽과 치성위에 올린 구조물이 다가 아니다. 화성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곳 안 되는 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공심돈, 우리나라의 많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축조물이다. 1796년 3월 10일 완공한 서북공심돈. 공심돈이 완공을 한 이듬해인 1797년 3월, 서북공심돈을 둘러 본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공심돈은 그 건축물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10호로 지정이 되었다.

 

원래 화성에는 모두 세 곳의 공심돈이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그리고 남공심돈이다. 하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동, 서북공심돈만이 남아있다. 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공심돈의 형태는 특이하게 조성해, 마치 화성 안에 작은 고성(古城) 하나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높은 성벽과 견고한 전각들

 

이곳의 성벽은 견고하다, 그리고 어느 곳보다 높다. 이곳은 평지에 축성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화서문서부터 장안문 사이에 북포루와 북서포루를 마련했다. 북포루(北鋪樓)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야경으로 보는 북포루는 절로 감탄이 나온다.

 

화성의 구조물인 '포루(鋪樓)'의 설명을 보자.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은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 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 11개(사방 각 4촌)를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고 하였다.

 

 

어찌 화성을 무시할 것인가?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시설은 성 5곳에 조성한 '포루(砲樓)'이다. 화성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놓았다. 이는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춰 뒀다가 위·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포루는 3층으로 축조가 되었는데, 지대 위에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인 '혈석(穴石)' 을 전면에 2개, 좌우에 3개씩 놓았다. 야경으로 보는 북서포루는 근처에 다가서기도 힘들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아마 이런 모습을 달빛에 적이 보았다면, 그 모습만으로도 혼이 백리나 달아났을 듯.

 

 

그렇게 야경에 취해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걸음을 빨리한다는 것은 화성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저만큼 장안문이 보인다. 그러나 그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다. 이곳에서 좀 더 이 아름다운 밤경치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비가 멈춘 밤하늘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보면 화성을 본떠 조형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 쪽으로 보면, 비와 함께 탑의 형태로 조형한 구조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이 조형물은 정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그대로 모사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원래 정조의 태실과 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에 소재한다.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태실은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한 비가 놓여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모형 태실과(위) 영월에 있는 강원 유형문화재 태실 및 비(아래) 

 

태실도 수난을 당한 정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이다. 전국에는 태봉, 태재 등의 명칭이 붙은 수많은 태를 묻은 곳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현의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실의 풍습은 매우 오래된 듯하나, 조선시대 이전의 태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이산은 조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여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현재 영월에 남아있는 정조의 태실은 192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태실을 창경궁 안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를 꺼내 관리상의 이유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태실과 태실비는 광산의 개발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에 소재한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원당형 부도를 닮은 정조의 태실

 

정조의 태실은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사찰 등에서 스님들의 사리 등을 모셔 놓는 팔각 원당형 부도를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꽃무늬나 도형을 장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난간을 돌렸다. 다른 한 점은 원통형의 석함 위에 정상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놓여 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에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그사이에는 구름문양을 채웠다. 비의 몸돌은 이수와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 육년시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이라 종서로 음각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뜰에 놓인 정조대왕의 태실과 비. 수원이라는 곳은 정조대왕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태실의 조형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다. 곁으로 지나치면서도, 안내판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왜 이런 것을 여기 세워야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역사, 특히 수원과 정조대왕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 사람들은 생김새부터, 마음 씀씀이가 다 다르다. 그러니 몇 사람만 모여도 말이 많아 질 수밖에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면 속이라도 편할 것을,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왜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지 모르겠다.

 

세상살이가 어디 쉬운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는 꼭 있어야 할 사람도 있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도 있다. 요즈음은 딱 그런 사람들이 구별이 되는 듯 하다. 물론 있고 없고는 나름대로의 판단이겠지만. 

 

연리목과 같은 세상은 왜 안 돼?

 

연리목이라는 것이 있다. 연리목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와 나무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한 부분이 합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나무와 나무가 합해지면 '연리목(連理木)'이라 하고, 가지와 가지가 합해지면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다. 동일한 수목이 합해지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전혀 다른 나무가 하나로 합해지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는 소나무 연리목이 있다. 연리목은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해지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세상 인간사 모두가 그렇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같은 부류도 있고, 전혀 다른 부류도 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도 있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어디 한 군데 정도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공통점이 합해지면, 인간사의 연리목이 된다는 생각이다.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매일 헐뜯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면, 그 어디 세상사는 멋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인가? 요즈음 돌아가는 세상이 그렇다. 그저 뒤숭숭하다. 한 짓을 안했다고도 했다가, 나중에는 생각해보니 한 것 같기도 하단다. 한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는데, 한편에서는 조금은 초연하다.

 

예전 우리의 생활 속에 '목도'라는 것이 있다.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 들고 오려면 여러 사람이 줄을 묶어 양편에서 들어야 한다. 굵고 큰 나무일 때는 20명이 넘는 사람이 양편으로 갈라져, 나무에 묶은 끈을 어깨에 메고 날라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목도를 하는 사람들은 발을 똑 같이 맞추어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발이 틀리면, 제대로 나무를 옮길 수가 없다. 거기다가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소리 한 자락에서 좀 배워봐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애기 젖퉁이는 몽실몽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갈 때

큰맘 먹고 넘어가 발발 떤다.

 

덜크덩 쿵덕쿵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마실 갈까

밤마실 가기에 즐기더니

홍당목 치마가 열두챌세

 

목도꾼들이 사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무거운 나무를 어깨에 메고 내려오면서 하는 소리다. 목도소리라고 하는 이 소리는 힘이 드는 것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서 하는 소리다. 또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산에서 힘든 작업을 하는 남정네들이 부르는, 은근한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소리 안에는 그런 은근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역시 소리도 좀 야해야 제 맛이 나는가 보다. 이렇게 서로가 하나가 되는 소리를 들으면, 연리목이 생각이 난다. 생각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큰 나무를 옮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연리목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가 되는 연리목이 생각이 난다.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있는 신흥사 경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연리목이 잇다. 이 나무는 연리목 수준을 넘어선다. 줄기가 서로 합해진 것이 아니라,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200년이 넘고, 나무의 높이가 5m 가 넘는다. 그런데 어떻게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배롱나무에 솔 씨가 떨어져 자란 것 같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이렇게 상생을 하는 나무라는 것만으로도 희한하다.

 

목도소리에서 인생살이의 참 멋을 좀 배워 보시게나.

 

이 배롱나무를 닮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다, 같은 부류라고 해도 서로가 아웅 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다른 수종이 한데 자라는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같은 수종이라도 함께 연리목이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신흥사의 배롱나무와 소나무 같이 살기를 바라지만.

 

울타리 꺾으면 나온다더니

행랑채 달아도 왜아니 나와

담넘어 갈 때는 큰 맘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산중의 기물은 머루다래

인간의 기물은 사랑일세

염천봉 꼭대기 호드기소리

신도안 갈보가 다 모여든다.

 

매일 아침 보는 뉴스도 지겹다. 토막살인, 근친상간, 강제추행, 강간살인... 등. 어떻게 세상에 좋은 소식은 별로 없고, 그저 눈만 뜨고 나면 이상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정작 조용해야 할 사람들만 나와서 난리를 친다. 그런 것 말고 이렇게 좋은 소리나, 연리지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목도소리 한 번들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제발 국민들을 기만하지 말고, 이렇게 조금은 야스러운 소리를 하면서, 힘없는 국민들을 위해 발 좀 맞추면 누가 머라고 하나?

 

매번 마음도 바꾸고, 말도 잘 바꾸는 사람들. 이렇게 두 나무가 함께 실듯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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