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편향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화재를 함부로 취급할 경우는 정말 짜증스럽다. 9월 7일 안성에 취재를 하는 길에 고찰 칠장사에 들렸다. 칠장사는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있는 칠현산에 소재한다.

 

칠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찰이다. 현재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본래 아미산 이었는데,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교화해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칠현산을 칠장산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의 보고 칠장사

 

칠장사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칠장사를 중창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그만큼 칠장사는 불교문화를 지켜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고찰이다.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전통건축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296호인 오불회 괘불, 보물 1256호 삼불회 괘불,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를 비롯, 보물 983호 봉업사 석불입상, 보물 1627호 인목왕후어필 7언시와 경기 지방문화재 114호인 칠장사 사천왕, 경기도 지방문화재 39호인 칠장사 철당간 등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칠장사

 

칠장사는 여느 절과는 다르다. 절 안에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사람들은 꼭 불자가 아니라고 해도 칠장사를 즐겨 찾는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는 색다르다. 벽화에 임꺽정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궁예가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이는 궁예가 칠장사에서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또한 의적 임꺽정과 7명의 도적이 가바치 스님인 병해대사의 설법에 마음을 바로잡고 의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칠장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 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칠장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볼거리와 들을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는 한다. 접에서 키우고 있는 커다란 개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무신경하다. 딴 곳이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시키는데 비해, 칠장사는 모든 곳을 개방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이 절의 특징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를 피우시며 안됩니다.”

 

이런 칠장사이다가 보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가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방을 한 전각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 것은 좋은데,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경내에서 담배는 금하고 있다. 더구나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더 더욱 화재 등에 민감한 곳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몰랐다’거나 ‘미안하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양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슬슬 부아가 치민다. 얼굴 사진이라도 찌거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저씨 거기 담뱃불 끄세요.”

 

 

 

 

말이 조금 험악해지니 그때서야 슬그머니 담배를 비벼 끄고 절 마당에 휙 집어 던진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다. 버린 꽁초를 주어 다시 가져다주었다. 경내를 나가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물론 오지랖 넓게 별 것을 다 신경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같이 문화재를 힘들여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용납이 되질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답사 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 소중한 문화재들이 자칫 화재라도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화사 사태 등으로 내내 심기가 불편한 사람인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나 제대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들이 들을 것인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쉰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은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다.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소중한 문화재

 

진각국사조탑비는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원래는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운 다음, 덮개석인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 터로 돌아가야 해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엔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고 있어 석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함부로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창성사 터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에 와서, 서 있는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의 유적발굴이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대책이 아쉬워

 

이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는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문의 글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조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에라도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곳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 그러한 소중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옮겨,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세워놓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의 또 다른 훼손이란 생각이다.

 

창성사의 발굴이 시급하듯이, 이 탑비 역시 창성사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는데, 답사를 나가 돌아다니다가 보면 제 시간에 때를 맞추어 먹는다는 거시 그리 쉬운 아니다. 생각대로 취재가 되지 않으면 거의 뒤늦은 식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면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이하랴 일을 마치고 먹어야 속이 편안한 것을.

 

9월 7일(금) 아침부터 서둘러 신문사로 나왔다. 미리 예약을 해 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혹 약속시간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낭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두른 덕분에 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나니 벌써 시간이 12시가 넘었다.

 

 

밥 한 그릇을 먹으려고 어디까지 가는 거야?

 

마침 이날 대담을 마친 육개장을 잘 하는 집이 있다고 소개를 한다. 대담에 땡볕으로 나가 사진촬영을 하다가 보면, 속이 허하기 일쑤이다. 대단한 예인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배가 고픈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맛있는 음식이라니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데 가까운 곳인 줄 알았더니 안성 시가지에서 일죽까지 가야한단다. 하루 만에 몇 곳을 돌아오려면 시간이 별로 없다. 사람도 만나야 하고 문화재도 찾아봐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먼 곳을 가야한다는 것에 마음만 조급하다. 그런데 동행을 한 하영란씨가 그 집은 아무에게나 육개장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식당에서 음식을 팔면서 ‘아무에게나 주지 읺는다’는 말에 은근히 기대가 된다. 이렇게 밥 한 그릇 먹기가 힘들어서야 원, 취재를 제대로는 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맛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밥을 먹으러 가야하나 하는 생각으로, 말은 못했지만 부아가 치민다.

 

산호 고기전문점? 그럼 고기집에 육개장이네

 

안성에서 장호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일죽 중, 고등학교 앞 육교가 있다. 그곳 바로 못 미쳐 좌측으로 들어가면 ‘산호 고기전문점’이란 커다란 간판을 단 집이 보인다. 안성시 일죽면 송천리 464번지. 마당에는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몇 대 주치되어 있다. 대개 식당은 들어서만 보아도 그 집의 분위기 파악이 되곤 한다. 수많은 시간을 길에서 살았기 때문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대개 이런 집은 조금은 냄새를 풍기기도 하는 법인데, 이 집은 정말로 먼지 하나 없을 듯하다. 실내는 깨끗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오히려 취재하느라 뜸을 흘려, 땀 냄새를 풍기는 것이 미안할 정도이다. 그래도 음식 맛을 보아야지, 깨끗하기만 하면 무얼 하겠는가?

 

종업원들이 음식을 들여온다. 그런데 이건 머야, 대개 육개장을 먹으러 가면 김치와 깍두기 등 두 세 가지 반찬이 고작이다. 그런데 반찬이 의외로 많다. 거기다가 말끔하다. 일단 밑반찬에는 합격점을 준다. 육개장이 나온다. 육개장을 먹는데 작은 접시를 하나씩 준다. 뜨거우니 덜어 먹으라는 것인가?

 

이 집 이렇게 장사하고 안 망했을까?

 

육개장을 한 번 휘저어본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엇이냐? 바닥에 깔린 것이 고기이다. 고기집이라 그런지 그릇 안에 고기가 반이다. 밥도 안성의 특미인 ‘안성맞춤쌀’을 이용한 잡곡밥을 해준다. 반찬은 감자조림, 김치, 거기다가 내가 늘 즐겨 찾는 가자미식해까지 있다. 이 반찬을 다 사온 것일까? 아님 직접 만든 것일까? 마침 이 집의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사장님 이 집은 반찬을 직접 하시나요?”

“예, 저희 집은 모든 반찬을 다 직접 합니다”

“이 가자미식해도 직접 하신 것 맞나요?”

“예 저희 안식구가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듭니다.”

 

더 이상은 물을 말이 없다. 맛있게 드시라는 사장님의 인사를 받자마자 떠 넣어본다. 이 맛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맛이다. 어릴 적 먹고살기가 근근했을 때, 모처럼 육고기가 들어오면 어머니께서 손수 끓여주시던 맛이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한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 도대체 이렇게 음식을 만들고 얼마를 받는 것일까? 동행을 한 분에게 물어보니, 이 집 육개장은 메뉴판에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 메뉴판에 육개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궁금해 재차 물었다.

 

 

“이 집 육개장이 워낙 맛이 있어서요. 고기집인데 손님들이 모두 육개장을 찾으시니까 고기를 못 팔잖아요. 그래서 메뉴판에서 내리고 잘 아는 단골 분들에게만 드려요”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푸짐하게 고기를 넣어 정성을 다한 음식을 내어준다면, 당연히 망해야 없을 것이다. 모처럼 맛본 어머니의 손맛이 나는 육개장. 아마 이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매번 육개장을 달라고 조를 것만 같다.

 

주소 : 안성시 일죽면 송천리 484

예약 : (031) 673 - 8119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지역에 구전되는 전설의 남사당패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노래 사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전해진다. 남사당패는 여사당패와 구별을 하기 위해 조직된 과거의 유랑집단의 한 유파이다. 굳이 ‘남사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남자들로 연희패가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의 근원지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일대이다. 이곳에는 칠사당, 혹은 팔사당이라고 하여서, 예전 유랑집단인 남사당패들이 한 겨울을 나곤 했던 곳이다. 유랑집단은 봄서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기예를 보여주는 대가로, 돈이나 곡물들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청룡사 인근으로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사당패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있는 ‘개다리패’였다. 안성 남사당의 풍물패는 기(旗)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이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에 안성의 남사당패들이 참여를 하여 노역자들을 위로한데서, 대원군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늘 풍물패의 위에 있었다.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바우덕이

 

당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였다. 그 자태가 남자들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노역장에 들어서면 당연히 뭇 사내들의 눈길이 바우덕이에게 꽂혔을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바우덕이가 이끄는 개다리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육덕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등도 바우덕이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태와 기예에 출중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바우덕이는 남다른 존재이다. 1987년인가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라는 소책자를 쓰기위해,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기거하면서 청룡사를 20여 회나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안타까운 것은 바우덕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였다. 다행히 바우덕이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토민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작은 서책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바우덕이, 안성을 들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짠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다시 안성을 찾다

 

한참이나 안성을 찾지 못했다. 9월 7일,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의 공연장이 있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를 찾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들렸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실내 공연장이 새로 자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는 테마공원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민속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으로 가보니 남사당패의 자랑인 칠무동 상이 서있고, 그 뒤편으로는 각 잽이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이 줄을 지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바우덕이 상을 보고 훔칫 놀랐다. 이 바우덕이의 상과 닮은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란(여, 36세. 바우덕이 풍물단 상임단원), 바로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바우덕이의 환생, 하영란

 

하영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0살에 안성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당연히 무동을 맡았다. 하영란이 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운면은 바로 남사당패들의 근거지가 있던 청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 서운초등학교에 다니던 하영란은 풍물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그 풍물패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들을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전날 끝까지 따라가 보아둔 풍물패들의 모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날부터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이 벌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우덕이의 동상과 참 많이도 닮았다. 장고를 메고 마당에 나와 장고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당시의 바우덕이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딸 둘을 둔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마치 새털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가까이 속 앓이를 하던 바우덕이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것만 같다.

 

풍물단 상임단원 하영란 대담

 

- 25년이란 오랜 시간 풍물단에 속해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생업을 위해 출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와서 나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풍물을 하는 것은 나의 일상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같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25년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공연을 할 때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렇게 시립 풍물단이 된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팬들도 생겨났죠. 그분들이 늘 ‘다시 보러 오겠다’거나 혹은 ‘정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커다란 사진을 빼다가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시고,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기도 하십니다. 그런 교감이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처음에 아버님의 반대가 심하셨을 때, 몰래 배우면서 공연 등을 하느라 애를 먹은 일이 힘들었죠.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매일 안성서부터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차 시간에 쫓겨 다녔을 때인 듯합니다. 차를 놓치면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와서 다시 안성으로 오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새벽 5시면 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요.

 

- 아이 둘을 키우면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개는 아이가 둘이면 이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애를 낳고나서 몸무게가 15kg이나 쪘는데,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2시간을 먼저 출근해 걷고 또 뛰고는 했죠. 나를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요.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해외공연도 많이 했을 텐데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일 년이면 3~4회 정도 해외공연을 하니까, 그동안 30~40회 정도 해외공연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에 헝가리 세계민속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해, 대상을 받고 월계관을 썼죠. 아마 그것이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서운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전교생이 다 합니다. 도시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할 수 없는 일이죠. 실내 연습장이 없어 무더위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이 남사당풍물 만은 꼭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해 제가 풍물을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라서 작은 공연이라도 무대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둘째를 낳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착실히 준비를 해 30년이 되는 해 개인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렀네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저희 남편(강규원, 46세. 건축 감리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연을 보고 늘 서포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고맙습니다. 30년 기념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부끄럽지 않은 바우덕이의 후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삼치를 지나면 성벽에 큰 통로가 보인다. 통로 앞에는 진달래 화장실과 화성관광안내소가 있다. 화성에서 중간에 밖으로 이렇게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이 군데군데 있다. 그곳을 지나면 오르막길이다. 서장대를 향해 가는 길. 아마도 그 위에서 호령을 하던 옛 장용영의 장수들은 목소리도 우렁찼을 것이다.

 

성벽으로 달라붙는 적군을 무찌르려면 목소리께나 커야 호령을 할 것이 아닌가. 옛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구간은 전쟁도 피해갔을 것이다. 조금 걷다보니 오르막길에 소나무의 가지들이 앞 다투어 성벽을 오른다. 아마도 화성을 쌓고 전쟁을 했다면, 이렇게 성벽을 기어오르느라 수도 없이 곤경을 치러야 했을 것만 같다.

 

 

 

젖은 풀을 헤치며 걷다

 

갑자기 길이 미끄럽다. 조금은 정리가 되었던 길이 그저 편편한 흙길로 변했다. 비는 계속 뿌려대는데, 밟을 때마다 미끄럽다. 신발 안은 이미 물에 젖어 질척인다. 풀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좌우를 살펴본다. 아무도 그곳엔 없었다. 그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알 수 없는 새의 울음소리만이 숲을 지키고 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자칫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이 돌출이 된 치 위에 전각이 보인다. 서포루, 화성에는 두 가지의 포루가 있다. 바로 '포루(鋪樓)'와 '포루(砲樓)'이다. 전자의 포루는 군사들을 보호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고, 후자의 포루는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난 말 없이 200년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병사들을 보호하고 쉴 수 있는 포루는 모두 5개소가 있다. 휴식공간이기도 한 포루는 성곽에서 돌출된 치성의 위에 올렸다. 휴식공간과 중간 지휘소 역할도 하는 화성의 포루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사면을 개방을 한 형태이고, 또 하나는 입구에 문을 내고 사면을 벽으로 둘러친 형태이다.

 

그 포루로 지나치면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비를 맞고 고고히 서 있다. 성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는 소나무는 주변의 시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곳의 성벽은 모두 200년 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축성이 된 그대로이다, 다만 성위에 여장만 새로 올렸을 뿐이다. 그 소나무는 200년 동안 화성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듯하다. 마치 역사를 알고 있다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화성의 성벽은 모두 병사들이 위장을 한 것

 

9월 4일, 빗길을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리려는지? 일일이 성돌과 대화를 하다가보면,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굳이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성벽을 쌓은 돌 하나하나를 다 어루만지지는 못해도, 눈으로 이야기는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저만큼 성벽 위로 우뚝 솟은 서장대가 보인다. 이곳이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 위에서 장용영의 대장군이 정조에게 보고를 하고는 했을 것이다. 그 가까이가면 기단만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는 벽돌로 쌓은 부분이 보인다. 검은 벽돌이 비에 젖어 더욱 윤기가 난다. 갑자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성벽을 뚫고 쏟아져 나온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쁘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저 화성의 성을 쌓은 돌은, 돌이 아닙니다.”

“이놈이 정신이 빠졌느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저 돌처럼 생긴 것들은 모두 장용영의 군사들이 위장을 한 것입니다. 성벽이 갑자기 장용영의 군사들이 되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거긴 움푹 들어간 성벽 안에 교묘히 감춘 서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군수물자를 들이거나,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서장대를 공격하는 적을 급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서암문을 지키기 위해, 가까운 곳에 서포루를 두었다. 서암문을 지나면 갑자기 성이 높아진다. 바로 위에 서장대와 서노대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 주춤했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진다. 아마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이곳에서 교전을 했다고 하면, 적은 단 한명도 살아남질 못했을 것이다. 빗속에서 앞이 잘 보이질 않는데, 뒤편에서까지 공격을 받는다면 이길 장사는 없다. 잠시 발길을 멈춘다. 서암문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해본다. 오늘따라 정말로 암문의 성벽들이 장용영의 군사들이 될 것만 같다.

 

 

또 다시 2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누군가 이곳을 돌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도 나처럼 이 성벽과 대화를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 마음 하나 주어 담아 발길을 옮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