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청각은 원래부터 청풍 한벽루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도 제천청풍문화재단지 안 한벽루의 좌측에 예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응청각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응청각이 한벽루 옆의 있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응청각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관수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일반적으로 당이라고 하면 누정의 효과를 나타내는, 관아 안의 건물 등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수당(觀水堂)은 아마 당시에도 이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관수당의 당호가 주는 의미

 

관수당이라고 전각의 뒤편에 붙인 현판으로 보아, 이 건물은 관아의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형태를 보면 누(樓), 정(亭), 대(臺), 당(堂), 제(齊), 헌(軒)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들어서 이 이름이 모두 혼용이 되어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명칭에 따라 용도가 다 다르다.

 

우선 '누'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층의 전각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정'이란 공간이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는 경우이다. 간혹 주추를 높여 밑으로 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 '대'란 관아에 속해있는 정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제'는 향교나 서원 등의 기숙을 할 수 있는 집이며, '헌'은 원래 왕실의 가족들이 묵는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외에도 '합(閤)'과 '각(閣)'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여러 사람이 집회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흔히 '서당'이란 배우는 학동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용도로 볼 때 '관수당'이란 물가에 서 있는 청풍현의 관아 중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묵을 수도 있는 정자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층을 벽으로 막은 응청각

 

응청각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아래층을 석축벽으로 막았다. 토석을 섞어 아래를 둘렀으며, 한편은 트여놓았다. 아마 그곳은 기물 등을 둘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층은 나무로 만든 목조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층의 둘레는 난간을 둘렀다. 응청각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조 초에 이황(1501 ~ 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으로 보면 응청각은 500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응청각. 이층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마루방이고, 문을 지나면 온돌로 놓여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기둥을 세우고 그 틈을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 발랐는데, 중간부분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위로 비스듬히 뚫려있다. 아마 이곳이 방에 창불을 때는 곳은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전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어진 응청각.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의아한 곳이 많은 집이다. 그래서 이런 집을 돌아볼 때는,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 즐겁지만.

 

가끔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을회관을 찾아가고는 한다. 옛소리라고 부르는 우리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우리 소리란 생활 속의 소리다. 예전에는 모든 작업이 소리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은 소리를 하면서 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조금은 가셔보고자 하는 뜻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힘든 세상살이를 소리를 하면서 잊고자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슬픈 여인의 시집살이 죽음으로 끝나

 

진주난봉가라는 소리가 있다. 이 소리는 유명하다. 모 가수도 이 소리를 불렀고, 전문소리꾼들이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꾼들에 의한 소리보다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들의 곡조 없는 탄식조의 소리가 더 일품이다. 요즈음처럼 선율이 있는 노래로는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자탄가조의 소리야말로 인생살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테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진주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고개 들어 그곳 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간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하다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셨으니 사랑방에 들어가라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 가지 안주에다

기생첩 옆에 끼고 권주가를 부르더라

 

시집살이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그 시집살이 동안 낭군은 어디에 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 간 곳이 왜 하필이면 진주였을까? 이 소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진주낭군'이란 표현을 했을까?

 

예전 진주에는 교방청이 있었다. 교방청이란 관아에 속한 무기(舞妓)들을 교육시키던 기관이다. 이 교방청에 속한 무기들은 춤, 소리, 악기뿐만 아니라 글과 그림도 배웠다고 한다. 현재 진주팔검무, 진주교방굿거리, 진주승전무 등의 춤은 모두 이 교방청에서 배울 수 있는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교방청이 진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이렇게 진주낭군이란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은 <고려사 악지>에 보이는 진주의 사록 위제만과, 진주 기생 월정화의 이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든다. 고려사 71권 악지에 보면 '월정화는 진주 기생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녀에게 매혹되어 그의 부인이 울화가 나서 죽었다. 진주 사람들이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살았을 때 서로 친하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고, 사록이 여색에 빠졌음을 풍자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사모시관에 전시된 베짜는 여인의 인형. 예전 여인들은 밤새 베를 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 가지 안주에다

기생첩 옆에 끼고 권주가를 부르더라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년 만에

이것을 본 며늘아기 아랫방에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매달아 죽었더라

이 말들은 진주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런 줄 왜 몰랐나 사랑사랑 내사랑아

화륫정은 삼년이요 본댁정은 백년인데

내 이럴 줄 내 몰랐다 사랑사랑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벌나비 되어

남녀차별 없는 곳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이렇게 진주 낭군을 기다리던 본댁은 화류계의 여성으로 인해 죽어 버렸다. 여기서 이 진주낭군이란 소리가, 위제록과 월정화로 인해 창출된 소리라는 것이 믿음이 간다. 우리 여인네들이 부르는 소리에는 남편이 바람이 나면, 그 대상이 화류계 여성이 아닌 첩을 상징하는 '시앗'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주라는 지역과 화류계 여인으로 인한 죽음이었다는 것이 진주낭군(진주난봉가)의 이야기다. 이렇게 허무하게 본댁이 죽고, 그나마 그 죽음을 보고 진주낭군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으로 소리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미 죽고 나서 후회를 한들 무엇 하리. 아마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을 면해보려고 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할머니들이 들려주시는 대반전의 소리

 

그런데 이 진주난봉가를 뒤집는 소리가 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다니. 한 마디로 소리의 극치란 생각이다. 이 소리는 진주낭군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진주난봉가처럼 사설도 많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할 말을 다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화류계 여성이 아닌 '시앗'이다. 그 시앗에 미쳐 진주낭군이 돌아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댁은 날마다 모시삼기를 하고, 베를 짜면서 날을 지새운다. 그러다가 편지를 한 장 받았다는 것이다.

 

주야공산 긴긴밤을 전지바탕 마주보고

무릎일랑 걷어제쳐 뽀둑비벼 삼은모시

서울님을 줄것인가 진주낭군 줄것인가

오동잎이 누러질때 감골낭군 줄것인가

편지왔네 편지왔네 진주낭군 편지일세

한손으로 받아들고 두손으로 펼쳐보니

시앗죽은 편지고나 옳다그년 잘죽었다

고기반찬 비리더니 소금반찬 고습구나

 

한산 모시관을 찾아가면 직접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서방인 진주낭군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그 밉상이던 시앗이 죽었다는 편지다. 그래서 고기반찬도 맛이 없던 시집살이가, 소금반찬까지도 고소해졌단다. 참 시앗이 무엇인지. 그 시앗이 죽어 시집살이가 좋아질 것이란 기대와 함께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이 정도면 우리소리의 멋이 무엇인지 알만하다.

 

세태가 변하면서 퇴폐산업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집안에 있는 여인들은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은근히 걱정을 하기도 한다. '우리 남편도 나가서 저런 짓을 할까?'라는 걱정 말이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들어보면 그 걱정하던 속이 확 풀린다. 그래서 지난 세월,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이 참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한 소리로 진주낭군의 본댁은 한풀이가 되었을 것이다. 여인들은 그런 맛에 산다. 시앗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요즈음도 시앗을 보는 간 큰 남자들이 있으려나

‘화성 겉돌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화성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줄로만 아는가 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화성의 겉(밖)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화성을 이야기할 때 주로 안으로 돌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화성을 보다가 보면, 그 밖으로의 경치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다. 또한 성이라는 축조물의 특성상 밖이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성곽만 보이는 성벽을 끼고 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성은 밖으로 돌면서 지형지물의 이용이나, 축성의 형태, 또는 주변 경관 등을 논하지 않고는 온전한 성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화성 겉돌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12회 정도로 나누어 돌아보는 화성 겉돌기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석의 흔적이 있는 화양루 밖

 

수원시 팔달구 교동 3-3에 소재한 수원중앙시립도서관을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조그만 소로 길이 하나 보인다. 팔달산 지석묘군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이 길 위에는 화성의 남쪽 능선을 지키는 용도가 있고, 그 끝에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자리한다. 숲길을 따라 오르면 여기저기 지석묘군이 있다.

 

지방유형무형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군의 주변에는 바윗덩어리들이 널려있다. 바위에는 돌을 쪼아내기 위해 구멍을 파 놓은 것들이 보인다. 화성을 축성할 때 이곳에서도 성벽을 쌓을 돌을 채석한 것이다. 화양루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의 면이 똑바로 절개된 것들이 보인다. 아마도 돌을 떼어낸 곳인 듯하다.

 

 

 

그리고 보면 이곳의 바위와 성을 쌓은 돌의 색깔이 비슷하다. 멀리까지 갈 것 없이 바로 그 밑에서 떼어난 돌로 성을 쌓았는가 보다. 화양루를 끼고 성의 서쪽을 향해 걷는다. 이 길로 성길을 따라가면 서장대를 지나 화서문을 향할 수가 있다.

 

밖에서 보는 서남암문 과연 절경일세

 

9월 4일 오후. 비는 더 세차게 퍼 붓는다. 가끔씩 바람도 불어 땀을 씻어주는 것은 좋은데, 우산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잔다. 그래도 천천히 걸음을 걸으면서 숲 냄새를 맡아본다. 비가 오는 날은 숲은 더욱 더 냄새가 강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성 밖의 소나무들을 본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제 멋대로 자랐다.

 

 

 

아마 역사의 진저리를 저리도 몸으로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용도 서편의 담이 유난히 낮다. 지금이야 이곳에 길이 생겼으니 이리 낮지만, 과거에는 이곳 밖으로 급경사였으니 굳이 성벽이 높아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빗발이 점점 거세진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어진 소나무 숲에서 짙은 숲의 향이 코를 간질인다. 이런 분위기가 못내 좋아 이 길이 늘 정겹다. 조금 더 걸어본다. 새 한 마리가 비에 젖어 나무꼭대기에서 오글거리고 있다. 어찌 보면 저 새야말로 가장 행복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개를 툴툴 털고 가장 편안하게 날아오를 수가 있을 테니까.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까닭이지

 

성곽 보수를 하느라 아래 위를 다른 돌로 쌓아올린 곳을 지나치다 보면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치(성 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삼치, 서쪽에 있는 치 중에서 세 번째 치라는 말이다. 화성을 안에서 돌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서삼치 앞에 늙은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노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옛날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다. 저 나무는 그저 성벽을 타고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꽤나 키를 키우고 있다. 앞뒤로 보이는 서삼치의 풍광에서 첫 번째의 발길을 멈춘다. 그저 지나치기가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이 있어, 내가 화성 겉돌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맛집 소개를 하라고 했더니, 매번 술집 소개만 한다.’고 누군가 핀잔을 준다. 하지만 내 생활이라는 것이 밥을 먹는 일보다는 술을 먹는 일이 더 많으니 어찌할 것인가? 사실은 나도 그럴 듯한 집에 가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분위기 있게 식사를 한 후, 그럴 듯한 맛집 기사 하나 쓰고 싶다.

 

그러니 그저 저 인사는 술에 빠져 사는가보다 하고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9월 5일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 절터인 ‘창성사지’가 찾아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그런데 늦어도 너무 늦었다. 오후 5시가 넘었으니 말이다. 산은 일찍 해가 떨어진다. 하기에 걸음을 서두르는 수밖에.

 

광교산 토끼재 오르는 길 

 

벌써 몇 번째 허탕인가?

 

상광교 종점에서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한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공기도 맑고, 계곡엔 물이 불어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광교산 안내판에 그려진 대로 토끼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올라 흙길을 걷는 발길에 차이는 돌들이 ‘왈그락’ 소리를 낸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는 길이 나타난다.

 

마침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토끼재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20분이면 충분하단다. 그런 정도라면 급할 필요가 없다. 바삐 걷던 속도를 늦추며 주변을 돌아본다. 저만큼 폭포를 닮은 양 바위 위를 흐르는 물이 소리를 질러댄다. 또 한 사람을 만난다. 다시 묻는다. 이번에는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

 

 

토끼재를 오르면서 만난 주변 경관들

 

이곳을 잘 아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길을 다시 물었다. 전혀 딴 곳으로 온 것이다. 약도만 믿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오르기로 하고, 길을 뒤돌아선다. 괜히 잘못 그려진 약도에 대한 푸념만 늘어놓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막걸리나 한잔 하지.

 

상광교 버스 종점 주변에는 음식과 술을 먹을 집들이 꽤나 있다. 그 중 한 집을 찾아들었다. 흑돌농원, 아마도 집에서 직접 농사라도 짓는가 보다.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69번지(대표 김인수)에 소재한 집이다. 많은 먹거리를 나열해 놓은 메뉴판에서 ‘도재 바비큐’ 한 접시를 시켰다. 물론 빠질 수 없는 막걸리 한 병과 같이.

 

 

 

음식 주문을 해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가정 집 정원인 듯한 곳에 차일을 치고 자리를 마련하였다.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이 서서히 마른다. 역시 산은 산인기보다. 이번에는 제법 쌀쌀해진다. 하긴 시간이 벌써 7시가 넘었으니,

 

한 장에 100원이라는 상추가 무한 리필이란다.

 

그런데 한 접시에 15,000원을 하는 안주치고는 서비스로 주는 품목이 괜찮은 편이다. 김치와 시레기 등은 그렇다 치고, 큰 대접에 한 그릇 푸짐하게 내어주는 어묵국물이 시원해 보인다. 물론 바비큐를 시켰으니 당연히 야채를 더해줄 것. 상추와 고추 등을 내어준다. 엊그제인가 이웃블로거의 글에 상추가 한 장에 100원이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문제는 한편에 붙어있는 문구이다. ‘추가반찬은 셀프’라는 글이다. 반찬이 무엇이 있나하고 가 보았더니, 상추, 마늘, 김치, 된장 시래기 등이 냉장고 안에 잘 정리가 되어있다. 이 집에서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이렇게 셀프로 야채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마침 음식을 갖고 온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 야채는 직접 농사를 지으셨나요?”

“고추는 직접 지은 것이고, 상추 등은 사다가 사용합니다.”

“요즈음 상추 값이 많이 비싼데 이렇게 무한 리필을 해도 되나요?”

“그러게요 한 상자에 9만원이라고 하네요. 아무리 비싸도 손님들을 먼저 생각 해야죠. 그래서 셀프로 마음껏 갖다 드시라고 한 것이죠.”

 

상추에 바비큐와 마늘, 김치와 된장시래기를 더해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둘이서 막걸리 3병을 마셨더니 24,000원이란다. 물론 상추와 김치 등은 몇 번을 갖다 먹었는데도 말이다. 이래서 맛집은 맛도 중요하지만, 주인의 심성이 먼저라고 하는가 보다. 광교산에 올라 길을 잘 못 들어 땀께나 흘렸지만, 그래도 마무리가 행복한 하루였다는 것. 행복은 참 사소한 일 한 가지에서 찾을 수 있는가 보다.

 

상호명 : 흑돌농원

소재지 :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69(대표 김인수)

문    의 : (031) 356-3123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가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시간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문이 없지만 예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이 있었을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서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 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을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의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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