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 자신도 아직 어떻게 취재를 하는 것이 정석인가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것이 정석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현장 취재라는 것이 취재를 하고자 하는 현장의 성격, 그리고 내용, 인물 등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기본적인 것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 것인지만 논하기로 한다.

 

우선 취재라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은, 취재를 하고 글을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준비만 철저하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하기에 취재를 하고 그것을 기시화 하려면, 이것만은 꼭 알아두었으면 한다.

 

 

1. 사전준비에 소홀하면 안 된다.

어떤 축제장이나 전시장, 혹은 공연장 등에 취재를 하고자 할 때, 혹은 답사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 가장 먼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취재를 할 대상에 대한 사전 준비이다. 사전 준비란 그 대상에 대한 것을 철저하게 먼저 파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 준비에 소홀하면,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지조차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현장의 자료를 세심하게 취하라.

행사장(축제장 이하 전시회, 발표회 등)에 가면 반드시 운영본부라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곳을 가면 그 취재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그런 것부터 먼저 취합을 해야 한다. 만일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운영본부의 담당자에게 행사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만일 문화재 등을 답사를 하고 후기를 쓴다고 하면, 문화재 앞에 있는 안내판을 꼭 촬영을 하기 바란다. 또한 문화재는 반드시 그 앞에 관리소 등이 있어, 그곳에서 자료를 얻을 수가 있다. 사람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면 그 인물에 대한 철저한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것을 준비를 하면, 수월하게 취재를 할 수 있다.

 

3. 첫 느낌을 중요하게 기억하라.

어딜 가나, 무엇을 보나, 누구를 만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느낌이다. 그 느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글이 빡빡해질 수밖에 없다. 취재대상을 보고 느낀 첫 느낌은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다듬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 좋은 기사를 쓸 수가 있다.

 

요즈음은 ‘감성기사’를 쓴다고 한다. 감성기사란 정해진 육하원칙에 의해서 글을 쓰기보다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감성기사를 쓰기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느낌이다.

 

4. 메모는 필수.

머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취재를 한 내용을 다 기억을 할 수가 없다. 하기에 기자들이 수첩을 항상 지니고, 적을 것을 갖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을 몇 자만 기록을 하여도, 나중에 기사를 쓸 때 생각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도록 현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취재를 하면서 기사가 다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기자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기에 취재를 할 때는 무조건 기록하는 버릇이 중요하다.

 

5. 꼭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현장에 나가서 취재를 할 때는 꼭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기에 단 한 사람에게라도 취재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묻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항상 나 자신의 생각으로 기사를 쓰기보다는, 보편타당적인 생각을 적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글을 쓸 때 내 개인적인 생각에 치우치다가 보면, 기사가 아닌 ‘소설’이 되고 만다. 철저하게 사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글을 쓰다가 보면, 이런 소설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사는 항상 기사다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취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사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대상을 취재하려고 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그럴 때는 가급적 많은 자료가 될 만큼 충분히 사진을 찍어 놓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는 것이 좋다. 이런 점만 충분히 준비를 한다면, 누구나 좋은 기사를 쓸 수가 있다.

사찰에 불이 났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이번에는 정읍시 내장동 590, 내장산에 소재한 내장사 대웅전에 불이나 전소가 되었다. 10월 31일 정읍시 소방당국에 의하면, 오전 2시 10분께 내장사 대웅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신고를 받은 소방당국은 14대의 소방차와 경찰 및 시청직원 등 90여명이 현장에 출동해 진화를 했으나, 두 시간 만에 전소되었다는 것.

 

이번 화재로 목조건물인 대웅전이 전소되고, 대웅전 안에 모셔졌던 탱화 3점과 불상 1점, 소북 1점이 완전히 소실이 되었다. 다행히 내장사에는 당시 사부대중 10명이 있었으나, 대웅전에서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내장사 대웅전의 과거 모습

 

백제 때의 고찰인 내장사 대웅전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 영은조사가 백제의 신앙적 원찰로 삼아, 처음에는 ‘영은사’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그 후 고려 숙종 3년인 1908년 행안선사가 전각과 당우를 중창하였고, 조선 명종 22년인 1567년에 회묵대사가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였다.

 

대웅전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영은대사가 시왕전과 함께 중수하였고, 요사를 크게 증축하였다. 이러한 대웅전은 1951년 한국동란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958년에 정읍시 입암면에 있던 보천교의 보화문 건물을, 다천스님이 그대로 옮겨 대웅전을 중건한 것이다.

 

  전소된 대웅전 - 사진제공 정읍소방서

 

화재로 전소한 대웅전, 아직 원인 규명 못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을 당한 내장사의 대웅전은, 최근에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내장사 대웅전 전소와 관련해 소방당국의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내부 CCTV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 전기난로 주변에서 불꽃 발화가 확인됐다’며 그 이상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전한다.

 

아무리 지정문화재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에 있었다고 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그런 대웅전이 완전히 소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문화재의 안전에 대해 불감증 환자가 되어야만 할까? 이렇게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단풍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내장사

 

더구나 지금은 내장산이 아름답게 단풍이 들 계절이라,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장산으로 찾아드는 절정의 시기이다. 이렇게 불에 타 전소가 된 내장사의 대웅전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 것인지. 좀 더 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따지기 이전에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때이다.

한 때는 참 지겹도록 안 좋은 소문이 나돈 지동이다. 그것도 지동에 터를 삶아 사는 주민들과는 전혀 무관한. 이제 그 지동이 마을 만들기와 벽화길 조성 등으로 인해 유명한 동네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점점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있는 지동과 지동사람들. 과연 그들의 삶은 어떠한지 돌아본다.

 

나눌 줄 아는 지동사람들

 

지동은 수원에서도 낙후된 마을이다. 하지만 이곳에 50년 이상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착하다. 서로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살기 때문인가? 지동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즐겨한다. 지동사람들은 이웃과 마음의 담을 쌓지 않는다. 그만큼 지동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냥 넘기지를 못한다. 무엇이라도 하나 나누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옥상음악회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이 윤건모 팔달구청장. 박찬복 지동장, 김상욱 수원시의원 등과 노래를 부르고 있다.(위) 지동영화제를 시작하기 전 공연(아래)


 

마을에 자원봉사를 하는데 직접 물을 끓여 차를 내오는 10통 통장님. 정성들여 모은 쌀을 불우한 이웃에게 전하는 40년 지동사람인 고성주씨. 불편을 감수하고도 자신의 옥상을 공연장으로 내놓는 13통 통장님. 그런가하면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자치위원장님. 낮이나 밤이나 골목길을 돌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유병남 할머니. 이런 분들이 지동을, 사람의 정이 가득한 마을로 만들고 있다.

 

마을 만들기도 박차를

 

좁고 또 좁은 골목, 그리고 어둡고 침침한 골목의 집안. 거기다가 낡아서 비가 새는 천정. 이런 집들이 지동에는 상당히 많다. 화성 창룡문 부터 복원된 남수문까지를 연결하는 화성을 바라보고 있는 지동마을. 이 지동이 마을만들기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노인들을 위한 프로젝트인 황금마차(위) 아름답게 조성한 벽화길(아래)


 

하지만 지동은 수많은 변화를 했다. 도로를 말끔히 정비하는가 하면, 지동영화제, 옥상음악회 등을 열기도 했다. 또한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황금마차’라는 노인들을 위하는 프로젝트를 꾸미기도 했다. 이러한 것이 날마다 달라지고 있는 지동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지동 사람들은 요즈음 많은 기대를 하고 산다. ‘내일은 또 어떤 재미있는 벌어질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아름다운 골목벽화길 조성

 

지난 해 350m, 올 해는 680m의 골목벽화가 생겨났다. 올 6월부터 현재까지 자원봉사자 1,200명이 참여를 하여, 지동 10통과 13통 일대의 골목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지동 벽화길은 사전에 전문 작가들의 치밀한 구성과 밑그림 작업을, 자원봉사자들이 그려내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부자, 혹은 부녀, 모녀, 조손 등이 참여를 했다.

 

 

 

서울여자대학 미술학과 학생들의 벽화그리기 자원봉사(위) 지동부녀회에서 마련한 비빔밥을 지동 벽화길 유순혜 작가와 박찬복 지동장, 서울여대 학생들이 조리를 하고 있다.(아래)


 

골목길 입구를 들어서면 봄이 시작이 된다. 골목을 돌 때쯤이면 여름이, 그리고 좁은 골목을 통해 길을 들어서면 가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을의 끝에는 겨울과 편지, 동화 벽 등이 선을 보인다고 한다. 지동의 벽화길의 정점은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눈앞에 펼쳐지는 수원과 화성의 야경이다.

 

지동제일교회 종탑에 마련한 전망대는 내년 봄 정식 개관을 앞두고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낡고 퇴락한 건물을 작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바꿀 예정이다. 5개년 계획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다 끝나면, 지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변화할 것으로 기대를 한다.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본 화성


 

한 때는 사람들조차 회피하던 마을 지동. 이제는 그 지동이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음 착한 지동사람들과 마을만들기 사업,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에 의한 벽화길 조성이 지동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멀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 마을 지동. 우리가 지동을 자랑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산섬, 그 이름으로 만도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가장 존경하는 이를 쓰라고 하면 언제나 ‘이순신장군’을 써 오던 나이기 때문이다. 꼭 한번은 가고 싶었던 곳. 10월 14일 한삼섬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한삼섬은 세종 1년인 1418년 삼군도제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의 대장정에 오른 출전지이기도 하다.

 

1592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으로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사적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퉁영유람선터미널을 떠나 인근으로 가는 유람선(위)과 한산섬으로 가는 도중 만나는 남해안의 섬들(아래)


 

유람선을 타고 한산섬으로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통영유람선터미널을 출발하여 뱃길로 20여분. 한산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바라다 보이는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한산대첩 기념비가 서 있는 봉우리와 거북등대를 지난다. 이곳은 물이 빠지면 암초가 많이 솟아있다고 한다. 한산대첩은 바로 그런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했다는 것.

 

선착장에 배가 닿자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기 시작한다. 주어진 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둘러볼 것은 둘러보아야지. 바다를 끼고 반원을 그리고 있는 적송이 한편으로 우거진 갈을 걷는다. 호흡을 깊게 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가슴 깊이 바닷내음을 전해준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지나 걸어서 5분. 과거 이순신장군이 사용을 했다는 우물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치면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천연기념물 제63호인 팔손이나무가 길 양편에 넓은 잎을 벌리고 손을 맞이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계단 위에 충무문이 있고, 그 안에 이순신장군의 혼이 깃든 많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의 충정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승당이다. 제승당은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간적들의 모함으로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1,491일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제승당을 바라보고 우편에는 그 유명한 장군의 시에 나오는 수루가 서 있다.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에 서 있는 팔손이나무(위)와 제승당(아래)

 

수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산만의 모습이 아름답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포화가 터졌던 곳일까? 수루를 내려오다가 보면 좌측에 충무공의 후손들로 통제사와 부사로 부임을 했던 이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240년 ~ 130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제승당의 뒤편으로는 바닷가에 서 있는 한산정이 있다. 한산정은 충무공이 장병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한산정에서 바다를 건너 과녁이 보인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서 실전거리를 적응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적지 안에 한산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수루(위)와 장군의 후손들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들(아래) 

한산정에서 바라다 본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화살을 쏘는 과녁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시합을 하여 진편에서 술과 떡을 내어 배불리 먹었음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장군의 탁월한 전술로,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장군의 영정 앞에 서다

 

한산정을 벗어나 충무사로 향한다. 외삼문인 솟을삼문을 지나면 한편에 제승당유허비가 서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타버린 것을, 1739년 제107대 통제사인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유허비를 지나 내삼문을 들어서면, 충무사가 나온다.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향을 한 개비 들어 불을 붙여 꽂고 머리를 숙인다. 왈칵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찾아오고 싶었던 곳이다.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곳에 섰다. 그저 목석이 된 듯 서 있는데 사람들이 빨리 가야한다고 부산을 떤다. 일행이 없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잠시 장군을 보고 되돌아서야 한다니.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배를 타고 한산섬을 떠나오는데 갈매기 떼들이 배를 따르며 난리를 친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느라고. 저 갈매기라면 언제나 그 곳 한산섬을 갈 수 있으련만. 언젠가는 혼자 시간을 내어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저 갈매기들처럼 자유롭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건조물을 지으면, 그곳에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있는 가신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수문장신이 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에는 용왕신이 있고, 마구간에는 우마대신이 자리한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조왕신이 있고, 물독에는 용궁각시가 있다고 한다.

 

대청에는 성주신이 있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면 삼신할미가 자리한다. 시렁위에는 조상신이 좌정하고, 안방의 벽에는 삼불제석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굴뚝에는 굴대장군이 있으며,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자리한다. 이렇게 집안에만도 수많은 가신(家神)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다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 신들은 사로 상응하면서 집안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화성에도 신이 있다.

 

가정에도 그 많은 신이 있는데, 화성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을 축성했는데 어찌 신이 없을 것인가? 화성에도 당연히 성을 지키는 신이 있다. 바로 서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에 모셔놓은 ‘화성의 신’이다. 성신사라는 명칭은 ‘성의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화성의 축성이 완료될 때쯤에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축조가 되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조는 7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정조는 성신사의 설치 후,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는 축문을 내리기까지 헸다.

 

사당의 조성이 완공된 후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1796년 9월 19일에 길일을 잡아 위폐를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성신사의 제사는 매년 봄, 가을이 시작되는 초하룻날인 행삭에 지내도록 하였다.

 

 

 

가을 빛 아름다운 성신사에 오르다

 

성신사는 일제 강점기에 훼파되었던 것을, 화성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4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신사를 복원하기 위한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2009년 10월에 중건을 마쳤다. 복원된 성신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짓고 문 좌우로는 5칸의 행각을 연결하였다.

 

10월 26일, 신풍루 앞에 서서 팔달산을 바라다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양편의 보호수가 일몰시간이 가까워서인가, 오히려 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성 행궁 옆 주차장을 벗어나 천천히 팔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물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정겹다.

 

일부러 차도를 버리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을 발밑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길을 벗어나면 좌측으로 성신사가 보인다. 아마도 일제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시기를 했는가보다. 많은 화성의 구조물들을 훼파한 것을 보면. 성신사의 솟을삼문을 들어서 정당 앞으로 가 고개를 숙인다.

 

 

 

성신사 주변을 돌아본다. 뒤편의 담벼락은 전돌을 사용한 심벽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 한편에는 제향에서 사용한 우물인 듯 육각형으로 조성한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속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팔달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제향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내년에는 날이라도 잡아 화성의 성신을 위하는 ‘성신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화성의 사라졌던 구조물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화성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될 텐데. 그때까지 화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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