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과 4일 2일 동안 전국 8도의 파워소셜러들이 수원을 찾았다. 이 행사는 '미디어 다음'이 주관하여, 수원의 아름다움과 볼거리를 알리고자 하는 행사였다. 11월 3일(토) 오후 1시 수원시청에 모인 8도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은, 제주에서 온 아이엠피터(임병도), 파르르(양경만) 등과 강원도 양양의 한사(정덕수), 부산의 거다란(김혁)과 커피믹스(김성자), 전남 여수의 임현철(임현철), 서울의 보라미랑(장유근)과 경기 용인의 캔디(최명희) 등이다.

 

그리고 수원에서는 온누리(하주성)와 수원시티넷 운영자인 김홍범 등이다. 10명은 시청을 출발하여 화성 동장대 앞 활터로 이동하여 활쏘기체험으로 1박 2일의 수원 팸투어가 시작이 되었다.

 

 

11월 3일과 4일 수원 1박 2일 파워소셜러 팸투어에서 활쏘기 체험을 하는 블로거 보라미랑님(위)과 동북공심돈 위에서 내려다 본 동장대(연무대)


 

시작부터 즐거워하는 파워소셜러들

 

활쏘기 체험을 마친 소셜러들은 <동장대>와 <동북공심돈>을 돌아본 후 화성이 이렇게 아름답고 과학적으로 꾸며진지 몰랐다면서, 화성의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e수원뉴스의 김우영 주간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촬영을 했다. 화성의 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성신사>까지 화성열차를 이용해 이동을 하면서도 연신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성신사에 들려 참례를 한 후 걸어서 <서장대>에 오른 일행은, 서장대에서 화성행궁과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과거 화성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도 한다. 성 안으로 걸어서 내려오면서 화성의 여러 가지 기능을 살펴보던 일행은, 화서문을 나서 성 밖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장안문까지 걸어 온 파워소셜러들은 차로 이동을 하여 창룡문(동문) 옆으로 이동을 했다.

 

 

성신사까지 파워소셜러들을 태우고 간 화성열차(위)와 서장대(아래 좌)와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행궁(아래 우) 화성을 관람하다가 만난 억새(아래)


 

지동 벽화길에서는 다양한 질문과 의견을 제기하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일대에 조성한 '벽화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벽화길이 조성된 팔달구의 윤건모 구청장이 마중 나와 파워소셜러 들을 반갑게 맞아주기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소셜러들답게 지동 벽화길을 들어서면서 부터는, 딴 곳의 벽화들과 대비를 하면서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도 보였다. 벽화길의 안내는 팔달구 지동주민센터의 기노현총괄팀장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으며, 소셜러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밝히기도.

 

지동 벽화길을 돌아보면서 한 집의 벽에 설치한 담장이 내려져 평상이 되자, 파워소셜러들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이런 생각을 하여 벽화길과 접목을 하였는지, 기팀장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한 소셜러는 ‘지동 벽화길은 아기자기한 것이 재미가 있다. 저런 발상을 어떻게 한 것인지 정말 놀랍다’고도.

 

벽화골목 입구에서 파워소셜러들을 맞이하는 윤건모 수원시 팔달구 구청장(우에서 두 번째)

지난 해에 조성한 벽화와 벽화 앞에 마련한 의자에서 쉬는 마을사람들

 

제2구간에 들어서 골목벽화를 돌아보던, 일행은 벽화길 조성의 총 책임자인 유순혜 작가에게 안내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한 소셜러는 더 아름다운 벽화길 조성을 위해 다양한 벽화그림과 조금은 색채가 화려한 것을 쓰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벽화 골목을 나선 일행은 지동 13통장 댁의 옥상에 올라가 팔달산으로 넘어가는 일몰을 구경하였다. 이곳은 그 유명한 '옥상음악회'를 열었던 곳인데, 소셜러들은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성을 보면서 지동은 앞으로 유명한 곳이 될 곳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동 제일교회(담임목사 이규왕) 13층에 있는 '노을빛 전망대'에 오르기 전, 파워소셜러들을 위해 제일교회에서 마련한 다과회 자리에 들려, 지동 제일교회가 왜 종탑을 전망대로 일반인들에게 개방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백종각 장로에게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는 '수원 마을만들기추진단'의 민완식 단장도 참석해 마을만들기 사업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지동 벽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담장 평상. 평소에는 접어 올리면 담장이 되고, 내리면 평상이 되기도. 아래 좌측은 파워소셜러들에게 벽화길 설명을 하는 작가(위) 아래는 지동제일교회에서 마련한 다과를 즐기는 동안 제일교회 백종각 장로가 노을빛 전망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염태영 수원시장도 파워소셜러들과 함께 해

 

팔도의 파워소셜러들이 수원을 1박 2일로 팸투어를 한다고 하자, 염태영 수원시장은 딴 곳의 일정을 접고 제일교회로 달려왔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소셜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격려를 하고, 함께 제일교회 13층 노을빛 전망대에 올라가 설명까지 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한 소셜러가 화성의 조명이 어둡다고 하자, 배석을 한 시관계자에게 ‘팔달구 관계자를 불러 이곳에서 화성의 야경을 바라보게 하고, 아름다운 화성의 선이 나타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라’고 지시하기도.

 

 

8도에서 모인 파워소셜러들에게 환영인사를 하는 염태영 수원시장과(위) 파워소셜러들과 함께 노을빛 전망대로 오르기전 설명을 듣는 염태영 수원시장 


 

7시간동안 쉬지 않고 수원을 돌아본 소셜러들은 저녁자리에 함께 참석을 한 염태영 수원시장께 다양한 질문과 함께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지금은 SNS시대이다. 파워소셜러들은 일인 미디어 시대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니, 아무쪼록 우리 수원을 즐겁게 돌아보시고 난 뒤, 좋은 기사들을 많이 써 달라” 고 주문을 하기도. 이어서

 

“수원은 정조임금의 계획된 도시이다. 우리 수원은 화성뿐이 아니라, 돌아 볼 곳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수원천을 걸어보면 생태하천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돌과 흙, 그리고 수초로 자연친화적인 하천으로 수원천을 조성하였다”고 하면서 수원천 복개를 적극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막았으며, 복개구간을 원상으로 복원한 점과 수원의 이모저모를 하나하나 파워소셜러들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2일 째 화성행궁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파워소셜러들과(위) 행궁 앞에서 펼쳐진 무예 24기 시연


 

2일 째 행궁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보다.

 

첫날 일정을 마친 파워소셜러들은 수원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수원호스텔인 사랑채에 묵었다. 2일 째인 4일(일)에는 오전 9시부터 <화성 행궁>으로 옮겨 이상숙 해설사의 안내로 행궁을 돌아본 후, 신풍루 앞에서 펼쳐지는 24기 무예를 관람하기도. 이어 <화성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파워소셜러 일행은, 1층 특별전시관에 전시중인 ‘한, 중, 일 대목장의 세계’전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수원천을 걸으며 수원천의 생태계를 살핀 파워소셜러들은, 재래시장인 지동순대골목으로 이동을 해 철판볶음과 순대국밥으로 점심을 즐겼다. 이렇게 돌아본 1박 2일의 수원에서 펼쳐진 파워소셜러 팸투어는 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겼다. 한 소셜러는 감동을 했다면서, 이렇게 전한다.

 

“수원은 1박 2일로도 부족한 곳이다. 화성 하나만 갖고도 며칠은 걸려야 할 듯하다. 거기다가 벽화골목과 노을빛 전망대, 재래시장 등 정말 즐겁게 즐기고, 맛있게 먹고,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는 곳이다. 이번 팸투어에서 수원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정말 좋은 글을 써, 많은 사람들이 수원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겠다.”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을에서 마국산 줄기가 있는 부처박골로 들어가는 길. 마을을 지나 하천을 따라 500m 정도를 지나면 동물의 분뇨를 갖고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난다. 이곳에서 500m 정도를 작은 내를 건너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문화재 관리소'란 작은 가건물이 있고, 숲길 안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떨어진 나뭇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가, 떨어진 낙엽들이 그대로 쌓여있다. 밟는 촉감이 좋아 이리저리 길을 벗어나 낙엽을 밟아본다. 마을에서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바위인줄만 알 정도로 희미한 선각처리가 된 마애불. 현재 이 마애여래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바위 주변에는 누가 쌓은 것인지 여기저기 돌탑이 쌓여져 있고, 하천도 큰 돌을 이용해 잘 정비가 되어있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떨어진 우측에는 돌로 쌓은 작은 네모난 돌집 안에 부처를 모셔놓기도 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곳을 관리를 잘 해온 듯하다. 커다란 바위는 주변에 보호책을 쳐놓았다. 불상은 높이 7m 가 넘고 동편을 바라보는 편편한 바위를 다듬어, 부조 한 후 선각처리를 하였다.

 

  
부처바위에 선각한 마애여래좌상. 얼굴 주변에는 7겹의 두광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결가부좌한 모습.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상으로 보이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난 탓일까? 육안으로도 잘 식별이 되지 않을 만큼 선이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오른손의 수인은 육안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두광은 머리주위를 일곱 겹으로 동심원을 둘러놓았고, 몸 주위에도 두 겹의 신광을 표시하였다. 얼굴이 둥글고 눈은 가늘며 입술이 엷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애로운 아미타여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왜 이곳에 들어와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이런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어떻게 이 호젓한 산중에 이런 커다란 마애불을 새겼을까? 늘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리도 간절했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들어와 이런 작품을 조성한 것일까? 쉬지 않고 질문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부처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에 고려 초기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보이는 이 마애불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인가 이곳에 들려 마애불을 찾겠다고 비료공장까지 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로 길을 돌아간 적이 있다. 이렇게 선각처리를 해서 육안으로도 확연히 볼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때 비를 맞더라도 올라올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그때 비를 맞더라도 부처바위 마애불을 보기 위해 올라왔으며, 좀 더 정확한 선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를 맞으면 선이 더 확연하게 들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보면, 늘 후회를 하는 일이 생긴다.    

 

  
누군가 마애불 가까운 곳에 돌로 집을 짓고 부처를 모셔놓았다


부처바위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 산중에 있었다. 1979년 이천문화원에서 답사를 할 때까지, 이 산중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많은 시간을 이렇게 바위벽에 앉은 채로 기다려온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이 호젓한 산중을 찾은 나그네에게 진정 인연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엷은 미소를 띠는 미소가 한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마을 만들기가 본격적인 명품마을로 태어나기 위해, 2013년도 계획예정 안을 세웠다. ‘지동마을만들기’는 타 지역과 다른, 지동만이 갖고 있는 제일교회 종각 13층에 있는 ‘노을빛 전망대’ 등을 활성화시킨다는 방침이다.

 

11월 2일 오후 5시, 지동제일교회에는 수원시 마을만달기 추진단의 민완식 단장을 비롯하여 경기문화연구회 염상균 회장, 김종합건축사무소 김상연 대표건축사, 지동주민자치센터 기노현 총괄팀장, 지동벽화를 총괄하는 유순혜 작가, 제일교회 담당자 등 10여명이 모여 한 시간 정도 토론을 가졌다.

 

 

주민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 조성 계획

 

내년도에 가장 특별한 변화는 <지동 커뮤니티 아트 사이트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 내에 장기간 방치되어 있는 건물을 구입하여, 주민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공간으로 조성하여, 창작 작가와 지역 주민들이 결합된 공동체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는 것.

 

또한 2013년 2월부터 11월까지 3년차 벽화작업을 지동 307, 309번지 선 약 300m에, ‘동심(童心), 골목에 펼치다!’라는 주제로 마련한다는 것, 이 벽화작업은 지역주민과 창작 작가, 외부 자원봉사자 등에 참여를 유도하여 다양한 벽화로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다.

 

지동의 정체성이 담긴 축제 개최

 

2012년의 지동은 영화제 및 옥상음악회 등을 열어,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2차 벽화를 올해 마무리하면, 2013년에는 지동의 정체성이 담긴 축제를 마련한다는 것. 올해 한 차례 열었던 ‘옥상음악회’를 내년에는 5월과 9월 두 차례 열게 되며, ‘한여름 밤의 클래식콘서트’를 지동 제일교회에서 열 계획이다.

 

‘추억의 골목길 축제’는 11월에 열 예정이며, 이 축제에는 사방치기 등 골목놀이 체험과 연 만들기 및 날리기, 재능기부자의 문화공연 등을 준비한다. 지동은 2013년의 축제 등은 본격적으로 홍보를 하여, 지역주민은 물론 외지의 관광객들까지 끌어들일 계획이라고 한다.

 

 

주민참여 문화예술 프로그램 운영

 

기노현 지동자치센터 총괄팀장은 2013년에는 주민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지동에 거주하는 어린이, 학생, 주민들을 상대로 되살림 발전소,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 이웃공방 등을 이용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서

“이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어린이 대상 창작프로그램 운영과, 중, 고생 대상 마을 작가 양성과정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취약가정의 청소년을 미래의 창작작가로 양성하여 사교육비를 줄인 생각입니다. 또한 어르신들의 치매예방을 위한 미슬창작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라고 밝혔다.

 

스토리텔링 형 관광 상품도 출시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4월부터 12월까지 노을빛 전망대와 갤러리, 벽화골목 3개소, 전통시장 3곳을 연결하는 마을명소와 전통시장을 연결하는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탐방코스별 티켓을 세분화하여 유료화를 추진하겠다는 것. 이러한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마을 해설사 양성, 노을빛 전망대에 망원경 설치 등 많은 준비작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완식 마을만들기 추진단장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용과 관련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고 그 자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며 1회로 계획을 세웠던 옥상음악회를 봄, 가을 2회로 늘리자고 제안을 해 즉석에서 계획을 수정하기도.

 

내년 3년차 마을만들기 사업이 마무리가 되면, 지동은 명품마을로 탈바꿈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는 단지 전망대의 기능만을 갖는 것이 라니라, 총체적인 작은 화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총체적 미술작품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을 수반하기 때문에, 예산을 얼마나 확보하는가에 따라 명품마을로 재조명될 시기가 정해질 듯하다.

'장치기' 또는 '얼레공치기', '짱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연희가 되어왔던 놀이니, 중단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장치기를 시합으로 할 때는 '장치기'라 하고, 놀이로 할 때는 '장채놀이'로 부르기도 한다.

 

1931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사보 1월 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치기는 우리 민속 중 유일하게 나타난 구기종목이기도 하다. 장치기는 놀이방법이나, 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기구 등이 간단하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짚이나 나무공이를 이용해 만든 '공'과, '장'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채만 있으면 된다. 공은 짚을 엮어서 만드는 방법을 택했으며, 장은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해 길이가 3~5자 정도에, 끝이 45도 앞으로 휘어져 10~15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모두가 즐겨하던 전통 공놀이

 

 

. 얼레공은 짚을 꼬아 둥굴게 만들고. 장은 물푸레 나무 등으로 만든다

 

 

 

장치기는 1950년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놀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넓은 논바닥에서 마을끼리 대항을 하기도 했단다. 장치기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몇 명이라도 모이면 편을 갈라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치기가 꼭 놀이로서만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장치기는 겨울에 운동량이 부족할 때, 몸을 움직여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기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또 일부 마을에서는 얼레공을 자신의 마을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을로 복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얼레공을 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풍농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도구를 갖고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놀이. 장치기는 그저 공터만 있으면 연희가 가능한 놀이다. 1932년 전국에서 남녀 32개 팀이 모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편화 된 놀이였음을 방증한다.

 

장치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장을 이용해 짚을 꼬아만든 장을 쳐낸다
 
 
장은 끝이 구부러져 얼레공을 몰아가기에 편하다. 필드하키와 흡사하다.

 

어떠한 놀이든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다. 장치기도 예외는 아니다. 장치기의 원조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격구'로 본다. 고려 태조 1년인 937년 기록에 격구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격구는 그 이전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면서 하는 마상격구를 할 때, 그 치장의 화려함이 지나쳐 한 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 7년인 1425년엔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격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정조는 격구를 24기 무예의 한 종목으로 택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안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반가의 대표적 놀이인 격구가, 언제부터 민간으로 전해져 장치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 급격히 쇠퇴한 반가의 놀이인 격구가 이때를 전후해 민간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우리 놀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양팀의 사람들이 서로 얼레공을 빼앗기 위해 채로 얼레공을 쳐내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수원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치기를 가르쳐 재현시킨 적이 있다. 경기도민속경연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까지 참가를 시키기도 했는데, 장치기는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청소년들의 놀이로 장착을 시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인 장치기는 장이라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부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보완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의 놀이다.

 

연세가 80세 이상이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장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장치기 놀이에는 별도의 골문이나 골키퍼가 있진 않다. 그저 넓은 공터 양편에 돌을 놓아 문을 만들고, 편을 갈라 얼레공을 몰고 가 그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인 장치기.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아이들의 체력을 위할 수 있는 우리 전통놀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일 년 내내, 계절에 구애를 받지 않고 들에서 뛰어놀던 장치기. 우리의 전통 공놀이인 장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예전과 같이 전국의 남녀 팀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전국공무원노조 수원지부장 김해영의 인생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생이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학생이, 두 동생을 이끌고 사회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나이 33살에 수원시청에 기능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 뒤 18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중, 고 검정고시를 보아 대학을 들어갔다. 그리고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 마디로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사과정도 4곳의 학교를 동시에 다녔다. 하지만 두 곳은 중간에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시 수원대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 김해영(남, 51세) 수원지부장의 이야기이다.

 

 

 

“어려서 뛰어 든 사회생활, 별거 다 해보았네요.”

 

1962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했다. 그 산골에서 시작된 김해영지부장의 인생이야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이야기의 시작은, 갑자기 부친이 작고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재가를 하셨는데, 계부 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4남매 중에 한 명만 남기고 동생들과 함께 집을 나오게 되었죠. 가장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계부가 중국집 주방장이라,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중국집에서 배달부터 시작을 했죠.”

 

그렇게 시작한 사회생활이다. 서울 홍대 앞에서 중국집에서의 생활서부터 시작해, 수원과 화성 등지에서 전기공사와 가스배달업, 전자제품 판매원과 모터 수리, 대형트럭 운전사, 동해시와 수원에서의 공인중개사, 그리고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전기 기사직으로 1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원시의 기능직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자격증 몇 장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았다. 하기야 20여 년 전에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낯 뜨겁습니다. 한 마디로 배우지 못했기에, 제 스스로를 몰랐던 것이죠. 이제 배우고 나니 그 때 제가 얼마나 유치하고 남들에게 비웃음을 샀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배움으로의 끝없는 도전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가 공부를 해 온 과정이 ‘미쳤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중, 고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들어갔다. 직업을 갖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마칠 수 있었단다.

 

“제가 있는 곳이 가정집의 물을 관리해 주는 곳이었어요. 3층까지는 물이 올라갈 수 있도록 수압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 중턱에 큰 저장고가 있어, 한 사람이 12시간씩 2교대로 24시간 관리를 합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저는 야간만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대학을 마칠 수가 있었고요. 다 주변의 직장선배님들과 동료 분들의 도움이 컸죠.”

 

낮에는 학업에 정진하고 밤에는 근무를 했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배움으로의 끊임없는 열망이 지탱을 하게 했다.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공부까지 한다는 것이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가 있었단다.

 

김해영지부장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해 3년 조기졸업을 했다. 또한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을 했다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에서 리더십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정보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노조활동은 천명(天命)이다.

 

수원시에 재직을 하면서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정발전연구단과 시청 공무원 중 1%에 해당하는 24명이 꾸민 혁신선도팀에서도 활동을 했다.

 

“제가 노조활동을 한 것은 2004년부터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죠. 그리고 2009년부터 지부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노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저를 있게 해 준 수원시에 무엇인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이유입니다. 저희 공무원노조 수원시 지부는 현재 회원이 1,700명 정도입니다. 2,580명 정도의 전 공무원가운데 노조에 가입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이 1,900명 정도로 보면, 90%에 가까운 시 공무원이 노조원인 셈이죠. 인구 100만을 넘은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높은 비율이죠.”

 

 

김해영지부장은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투쟁을 일삼지 않는다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노조원 조끼를 입었다고 해서 일이 해결이 된다면, 머리띠를 몇 개라도 두르겠다고. 먼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연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희 노조가 주장하는 것이 ‘공직사회의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입니다. 사실 노조라는 곳이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입니다. 시정은 노조가 관여를 할 수 있지만, 노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하기가 좋은 조직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기 그렇게 썩어 있으면서 부정부패척결을 하자고 한다면, 그 누가 따라줄 것입니까? 저희는 노조원들이 내는 회비도 상당합니다. 그것을 회원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죠. 그래서 체육대회도 열고, 건강검진도 2년에 한 번씩 받던 것을 매년 받기로 했습니다. 또 어려움에 처한 회원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일 년에 두 차례 장학금도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용’이란 소리도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것.

 

“공무원이 매달 받는 급료를 ‘봉급’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을 섬기라는 뜻이죠. 시민들의 삶을 질을 높여주라고 주는 돈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3~4천만 원씩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일벌백계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노조원인데 그런 말을 했다고 어용이라는 겁니다.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시정에 반발하는 것은 안 되죠. 봉급을 받으면 그만큼 시민들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죠. 지금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될 때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힘들게 내는 세금입니다.”

 

11월 1일 오후 5시, 수원시청 청사 한편에 자리한 노조사무실에서 만난 김해영지부장.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 수원시의 인구가 114만입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2,580명 정도입니다. 우리시와 비슷한 딴 지자체에 비해 적은 숫자죠.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죠. 그래야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건강해야 시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원시는 인구는 많은데 구가 4개뿐입니다. 이제 분구를 해서 5개 정도의 구를 가져야죠. 집행부를 도와 이것을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연신 드나들고 있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아마 그런 열정이 있어서 많은 일을 감당해 내는가 보다.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는 김해영지부장.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웃어댄다. 대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그의 책 <변화와 희망을 위한 철학에세이>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올해 51세 지천명에 이르렀다는.

 

‘천명(天命)이 있긴 있나보다. 하고자 한 게 아닌데 하고 있고, 이르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르러 있는 것을 보면, 묘하게도 맞아 떨어지는 얘기로 들린다. 10년 주기설. 사람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는, 대개 10년 주기로 찾아온다고 한다.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를 반추해보면 그리 부정할 일도 아닌 듯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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