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처럼 날씨가 쌀쌀할 때는 무엇인가 좀 따듯한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타고난 천성이 ‘살아생전 굶는 한 끼, 저승에서도 못 찾아먹는다’리고 늘 생각하는 인사인지라, 하루 세 끼 밥은 꼭꼭 찾아먹는 편입니다. 가끔 답사를 나가 제 시간을 못 맞추기는 해도,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습니다.

 

새벽까지 글을 쓰다가 보니, 아침을 해먹는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묵은지가 있으니, 따듯한 버섯찌게라도 끓여야겠다고 생각을 하죠. 저희는 생각이 나면 바로 실행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사인지라, 가릴 것 없이 시작을 했죠. 요즘 같은 날씨에 제격이라고 스스로를 칭찬을 해가면서. 암튼 아무도 못 말립니다.

 

 

1. 준비

 

준비라야 머 있습니까? 집안에 있는 재료 이용합니다. 거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침 며칠 전에 ‘e수원뉴스’ 시민기자 한분이 묵은지를 한 통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묵은지 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담아낸 듯하죠. 거기다가 강원도 깨끗한 바닷물로 간수를 해 담은 된장이 있습니다.

 

이 된장 맛을 보신 분들. ‘대한민국 최고의 장이다’라고 할 정도니까요. 거기다가 버섯과 파, 두부는 늘 냉장고 안에 조금씩 준비를 해놓고 있습니다. 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머 이 정도만 가져도 충분합니다.

 

 

먼저 버섯을 잘라놓고 파는 썰어 준비를 합니다. 물론 두부도 잘라놓습니다. 그리고 냄비에 묵은지와 된장을 아래 깝니다. 그래야 물이 끓으면 된장이 골고루 잘 퍼지니까요. 사람들은 두부를 나중에 넣습니다. 허나 저는 먼저 집어넣습니다. 그래야 두부에 간이 잘 밴다는 나름대로의 되먹지 않은 고집 때문입니다.

 

2. 조리

 

조리라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물을 끓이다가 김이 나기 시작하면 버섯과 파를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잣과 다진마늘을 조금 넣어줍니다. 잣은 씹히는 맛이 일품이고, 마늘을 천천히 넣으면 묵은지의 맛과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죠.

 

 

팔팔 끓기 시작하면, 미리 준비를 한 밥도 뜸이 들 때가 됩니다. 그럴 때쯤 밥을 먹기 위해 밑반찬을 준비합니다. 냉장고 안에는 그대로 꽤 여러 가지 반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계바늘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멸치볶음, 깻잎, 젓갈, 양파짱아치입니다. 젓갈을 좋아하는 고로 꼴두기젓, 밴댕이 젓, 그리고 게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먹기만 하면 됩니다. 항상 ‘밥은 잘 먹고 다니자’가 제 주장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걸어야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잘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생각입니다 . 아침은 유난히 신경을 써서 먹습니다. 아침이 든든해야 하루 종일 잘 돌아다니니까요. 11월 13일 오늘 아침 제가 먹은 밥상입니다.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지난 11월 1일(목)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9시부터 열린 세계순례대회의 시작은 4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김완주 전라북도 도지사, 전주시장, 김제시장, 완주군수 등의 지자체장들이 모여 총 240km인 600리를 걷는 순례대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 순례길은 각 종교의 역사적인 지역을 연계하는 길로 11일 순례포럼과 전북도청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닫는마당까지 이어졌다.

 

11월 1일(목)에는 1코스인 한옥마을~송광사구간인 26.1km를 원불교 전북교구장인 고원선 교무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소태산 대종사를 기억하며’린 부제를 달고 있다. 11월 2일(금)에는 2코스 송광사~천호구간으로 27.1km 에 달한다. 금산사 회주인 도영 큰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벽암대사를 기억하며’라고 부제를 달았다

 

가수 김태원이 스님짜장을 볶고 있다(위)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고(아래)

 

11월 3일(토)에 걷는 3코스는 천호~나바위 구간으로 24.1km 달하며 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인 이영춘신부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며’라고 했으며, 4일 째인 11월 4일(일)에는 4코스인 나바위~미륵사지까지 23.6km를 이상원 길 매니아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허 균을 기억하며’로 테마를 잡았다.

 

11월 5일(월)에는 5코스인 미륵사지~초남이 구간 25.5km 걸었으며, 원광대 나종우 교수와 지광 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주왕을 기억하며’란 부제를 달았고, 11월 6일(화)의 6코스는 초남이~금산사로 25.9km에 달한다. 이 구간은 백남운 목사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진표율사를 기억하며’이다.

 

11월 7일(수)에 걸은 7코스는 금산사~수류의 14.5km의 순례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대 교구장인 원행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처영대사를 기억하며’ 란 주제를 갖고 있다. 11월 8일(목)에는 8코스인 수류에서 모악산까지 21.2km의 걷기구간으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이었다.

 

 11월 10일 전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 모인 순례단(위) 김태원과 4대종교지도자들이 순례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아래)

 

11월 9일(금)에는 9코스 인모악산에서 전주 한옥마을까지 27.5km를 전주지역 장로교 연합회장인 박진구 목사와 천주교 전주교구장인 이병호 주교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라고 하였다. 11월 10일(토)에는 어울림 큰마당인 순례 음악회로 꾸몄는데, 승암산(혹은 치명자산) 광장에서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부활의 김태원 등도 함께한 순례길

 

10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는 그동안 걸어 온 순례길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이 날은 종교지도자들이 순례를 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의식도 함께 하였으며, ‘사람실은 스님짜장’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이 점심을 들었다.

 

 순례단의 발을 씻기는 원행스님(위)와 한 종교지도자가 김태원의 발을 씻기고 있다(아래)

 

아침 일찍 승암산 광장에는 차일을 치고, 짜장면을 볶을 솥을 걸었다. 짜장을 볶을 때는 순례대회에 참가한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기도. 부활의 김태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짜장을 볶기도 해, 기자들의 열띤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이 순례길에 참가를 했다는 이아무개(여, 42세 전주)는 이 날 행사가 정말 즐겁다고 한다.

 

“정말 이렇게 모든 종교를 망라하는 순례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전라북도는 모든 종교의 소통창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10일 동안 240km를 걸으면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오늘 이렇게 스님짜장을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늘 이런 축제 때마다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순례기간 중 4회에 걸쳐서 1,200명 정도에게 짜장봉사를 한 운천스님(남원 선원사 주지)은

 

“이리저리 다니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활의 김태원과 티베트의 장관까지 함께 동참을 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역시 봉사란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남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름다운 순례, 홀로 또 함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세계순례대회. 1만 여명이 넘는 순례객이 이 길을 걸었으며, 4대 종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감싸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순례대회의 대장정은 11월 11일 전북도청에서 가진 ‘세계순례포럼’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 자리에는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비롯해 이병호 주교, 박진구 목사, 원행 스님, 고원선 교무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안녕동)에는 사적 제206호인 융능과 건능이 자리한다. 문화재의 공식 명칭은 ‘화성 융능과 건능’이다. 융능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후에 의황제와 의황후로 책봉되었다)의 능이고, 건능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11월 10일(토),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인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함께 융건능을 찾았다. 미디어 다음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찾아간 융건능. 아마도 십 수 년 전 이곳을 들린 후에 꽤나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다. 문화재란 늘 돌아보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인사지만, 그 많은 문화재를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그저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보고는 한다.

 

 

융능 재실 안에 숨은 천연기념물

 

융건능 입구에 보면 매표소가 있다. 그 매표소는 재실의 한편 벽에 붙여 조성을 했는데, 매표소 옆으로 작은 협문이 있다. 협문은 매표원들이 출입을 하므로, 늘 열려있어 안을 돌아보기가 수월하다. 그 재실 앞마당에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개비자나무’이다.

 

사람들은 비자나무라고 하면 알지만, 개비자라고 하면 의아해 한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이다. 개비자는 개비자나무과 개비자나무속에 속하는 약 7종의 교목과 관목을 말한다. 비자나무와 흡사하게 생겼다고 하여서 개비자나무란 명칭이 붙었는데, 얼핏 보면 그 생김새가 비자나무와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

 

우리나라에는 개비자나무(C. koreana) 1종만이 북위 38°선 이남에서 자라고 있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상록교목이다. 개비자나무는 보통 키가 3m 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융건능 재실 앞마당에 서식하고 있는 이 나무는, 키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른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개비자나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가 되었으며,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상태도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다고 하며, 또한 융릉 재실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2009년 9월 16일자로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이 되었다.

 

 

문화재, 그렇게 관심이 없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돌 한개 풀 한포기도 놓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답사를 나가면 남들이 이렇게 표현을 한다. ‘미친 듯 돌아다닌다!’고.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문화재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시간에 문화재 하나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재실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곳을 들어가지를 않는다. 조금은 실망스럽다. 늘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을 하는 나이기에, 그래도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하는데도 움직이지를 않다니. 어찌 보면 내가 잘못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 융릉이 조성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 이 개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하면 벌써 수령이 220년이 넘었다. 그렇게 그 재실 앞뜰을 지키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재실 안을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 밖에다가 그 안에 천연기념물이 있다고 표시 하나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는 그 가치를 계산할 수가 없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와 장인들의 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찾은 날, 한 여인이 쉬지 않고 합장을 하고 석조여래입상의 전각을 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 빌고 있는 것인지. 하기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원이든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청풍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모양이 풍부하고 자비로운 상이다.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코는 한편이 마모가 되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되었으며, 콧방울이 무너져 내렸다. 인중이 뚜렷하고, 양 볼은 두툼하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양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이다. 그러한 석조여래입상의 주위를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도는 이유는 무엇인지.

 

"날이 많이 차네요."

"예."

"무슨 소원을 그렇게 비세요."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서요."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빌면 좋아지실 겁니다."

"예,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와서 이렇게 빌고 갈 때마다 많이 나아지는 듯해요."

"다행입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남편이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분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석불에 정성을 드린다고 정말로 나아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면, 무슨 소원인들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박한 모습에서 전해지는 정다움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목이 두툼하여 자칫 비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석조여래입상. 법의는 앙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걸치고, 안에는 내의를 받쳐 입었다. 배에서 매듭을 지어 V 자 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두발은 발가락까지 표현을 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밑에는 대좌를 밟고 있다. 전체가 일석으로 조성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누군가 단주 하나를 발 등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렇게 단주를 놓고 간 사람도, 마음속에 간절히 비는바가 있었을 것이다.

 

청풍 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자애로움이 있다. 생명이 없는 돌로 조성한 석불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의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 서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전각을 조성하고 복원을 한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굵게 표현이 되어 비대한 감마져 있다

통견으로된 법의는 v 자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누군가 발들 위에 단주를 올려놓고 갔다.

 

사연도 많은 문화재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문화재와 고택, 정자, 고분, 능원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다녔다. 벌써 그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늘 밖으로 불러낸다. 자다가도 문화재 답사라면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는 했다. 그 많은 문화재 안에는 정말 따듯한 이야기도 있었고, 가슴 시린 사연도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사연을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문화재는 일부러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느 문화재는 파손된 부분을 보수를 하면서 엉망으로 해놓아, 헛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누군가 문화재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들도 있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이번 답사 길은 제발 마음 아픈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도 문화재의 인녕과 함께, 이 여인 제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전히 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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