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에는 ‘3(三節)’이라 불리는 분들이 있다. 그 첫째는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주논개를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수향교 교리인 정경손이다. 임진왜란 때 죽음으로 장수향교를 지켜 낸 인물이다. 정경손의 기념비는 장수항교 안에 서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타루비의 순의리(殉義吏) 를 일컫는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바로 타루비의 주인공인 백씨이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이 백씨라는 인물이 당당하게 장수 삼절에 거론이 되는 것은, 그 의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타루(墮淚)’란 피눈물을 흘렸다는 뜻이니, 그 마음의 아픔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타루각 안에 서 있는 두 개의 비

 

전북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 도로변에는 타루비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장수군 어디를 가나 이렇게 문화재 안내판을 곳곳에 걸어두고 있어, 문화재를 찾기에 편안하다. 이런 것 하나를 보더라도 장수군의 문화재보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문화재 안내판 길 건너에는 담으로 둘러쌓은 안에 비각 두 개가 서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서 있는 작은 비각 안에는 백씨의 뜻을 기리는 비이고, 그 안쪽우측으로 보이는 비각에는 타루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바로 타루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다. 타루각 안에는 바라다보는 왼쪽에 장수이순의비(長水吏殉義碑)’라 적혀있다. ‘장수의 벼슬아치가 죽음으로 의를 지켰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돌을 삼단처럼 깎아 세운 후 그 위에 타루비(墮漏碑)’라 적힌 비가 서 있다. 바로 장수 3절 중 한분인 백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도대체 이 백씨라는 분은 어떤 일을 했으며, 왜 이렇게 그를 칭송하는 것일까?

 

피로 암벽에 쓴 글씨 타루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3, 장수현감이 전주감영에 가기 위하여 말을 타고 이 곳 타루비가 서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숲속에서 장끼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았고, 그 소리에 말도 놀라 날뛰었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통인이 말을 추스르기도 전에, 현감은 말과 함께 절벽 아래로 흐르는 송탄천(松灘川)’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통인은 말이 빠진 주변을 맴돌며 현감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말과 함께 빠진 현감은 다시는 물 위로 떠오르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현감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죄책감에, 통인은 울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송탄천이 흐르는 암벽에 말과 꿩을 그린 통인은 타루라는 글씨를 피로 쓴 후,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리고 124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인 순조 2년인 1802, 장수현감 최수형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곳에 타루비를 세워 물에 빠진 현감과 통인을 위로하였다. 현재 이 타루비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통인의 이름은 백씨라고만 전해진다.

 

 

암벽에 쓰인 타루애

 

타루각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밑에는 물이 고였던 흔적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예전 그 송탄천의 물이 흘렀던 곳이었는가 보다. 그 암벽에는 타루애(墮漏崖)’라는 글씨를 음각하였다. 지금 쓰인 글씨의 우측으로는 예전에 쓰인 글씨가 남아있다. 그리고 암벽에는 말과 꿩을 돋을새김 한 것처럼 조성하였다.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모시던 윗사람을 따라 목숨을 끊은 백씨. 아마도 이 시대의 귀감이 되라는 뜻으로 세운 타루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여서, 본분을 지키고자 했던 그 뜻을 논할 필요는 없다. 오늘 암벽에 새겨진 말과 꿩, 그리고 타루애라는 글씨와 타루비 안에는, 장수현의 통인 백씨의 충정이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수원시 자치분권의 날 선포 희망콘서트

 

주민이 결정권을 갖는 지방자치분권에 대한 지방정부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17일 오후 2시 수원에 소재한 IBIS 엠버서더 호텔 3층 깐느홀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 국회의원 신장용,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황한식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 상임이사, 민한기 수원시의회 부의장 등이 참석하여 수원시 자치분권의 날 선포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중앙집권, 중앙집중 현상으로는 국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 수원시 자치분권협의회 출범식을 갖는 것은 자치와 분권 운동사의 새로운 출발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공약집에서 지역발전 균형과 지방분권 정책의 페러다임을 전환해 각 지방이 각자 스타일로 발전해가면서 그 총체적인 형태의 국가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 인수위는 국민과 소통을 하지 않고, 중앙 각 부처는 자신들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고 했다.

 

 

하루 종일 생중계 된 자치분권의 날

 

이날 수원시자치분권 선포식과 출범식 및 새정부 지방분권 로드맵 토론회에 이어, 늦은 저녁 희망콘서트까지 이어지면서 자치와 분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민들의 이해를 도우며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 대미를 장식한 콘서트 현장까지 이날 선포식 현장의 전일정은 인터넷 오마이 TV'로 생중계 되었다.

 

이날 오후 7시부터 이비스 호텔 15층에서 열린 희망콘서트는 음악과 토크가 있는 잔치마당이었다. 사회를 맡은 개그우면 김미화는 재치 있는 진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왜 김미화 인가를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그런 자리였다. 당당히 자신의 재혼한 남편이라고 밝힌 호세윤밴드의 리더 호세윤과 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토크 사회도 맡아 진행을 하였다.

 

 

김미화의 역량이 돋보인 무대

 

토크에 패널로 참가를 한 개그맨 전우성은 예의 개나 소나이야기부터 시작해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토크 중간에 자리를 함께 한 염태영 수원시장은

 

지방분권형 개혁과 정치개혁은 국가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전체 예산의 80%를 갖고 있는 중앙집권체제 하에서는 지방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다. 지방분권과 지역상생만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했다.

 

40분 정도에 걸친 토크가 끝나자 김미화는 17KBO 구단주들이 최종 승인한 프로야구 제10구단의 KT-수원유치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관객 사로잡은 홍서범, 웅산의 무대

 

토크가 끝나고 난 뒤 무대정리를 마치고 나니 가수 홍서범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함께 하는 공연을 펼치기도. 홍서범은 조갑경이 아이 셋을 난 여자의 몸매가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두 사람이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른 후, 웅산의 무대로 이어졌다.

 

웅산이 무대에 오르자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객석을 메운 500여명의 관객들이 탄성을 자아내기도. 무대 앞에 자리를 한 어느 주부는 깊은 한숨을 내 쉬기도. 웅산의 노래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감탄을 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파워가 넘치는 가창력에 넋을 나간 듯. 약 두 시간에 걸친 수원시 자치분권의 날모든 행사는 9시 정도에 모두 끝이 났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함께 하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좋은 공연에 지방분권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개그우먼 김미화와 가수 웅산의 이름값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 또한 즐거움이었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이용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우측에 왕곡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고성군 죽왕면 송지호 뒤편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지금의 오봉1리의 옛날 명칭이다. 14세기경 강릉함씨, 강릉최씨가 용궁김씨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이 처음 생겨난 것은, 고려 말 함부열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후, 150여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왕곡리에는 함씨, 최씨, 진씨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살고 있다. 현대문화의 범람에도 변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을 둘러보았다.

 

 

19세기에 조성된 왕곡마을

 

왕곡마을을 찾았다. 모처럼 날씨가 푹해 답사하기에는 제격이다. 왕곡마을에는 19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북방식 전총한옥 21채가 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옛 모습을 그런데도 지켜오는 밀집된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을 둘러쌓고 있는 5개의 봉우리로 인해, 6.25 한국동란 때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20~30평 규모로 한 건물 내에 수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기와집들이 많다. 이 집들은 모두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이다. 또한 부엌의 앞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긴 추운지방의 기온을 버틸 수 있도록 꾸며진 집들이다. 왕곡마을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있으며, 주변을 산이 둘러쳐진 병풍 안에 자리한 마을이기도 하다.

 

 

담장 위에 올린 항아리 무엇이지?

 

이렇게 왕곡마을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인접하고 있는 구성리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왕곡마을을 돌다가 보면 두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첫 째는 담장에 낸 굴뚝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굴뚝이 서 있는데, 그 굴뚝을 담장에 붙여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굴뚝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들이다. 이 마을은 집집마다 굴뚝위에 항아리를 얹어 놓았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엔 우물이 없는데 마을이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예부터 이 마을은 모두 부자가 아니어도 기와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근 구성리 마을에 기와 굽는 가마가 있어서 였다고 한다.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통 한옥마을로, 14세기 경 부터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용궁 김씨 등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왕곡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0.5지점에 있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서 취락을 이루고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강릉함씨와 강릉최씨, 용궁김씨 등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인 함부열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은거한데서 연유되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이래 150여 년 간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거주 현황은 함씨(25), 최씨(11), 진씨(4)가 주를 이루고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있다. 이 마을은 14세기경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 취락을 형성하고 19세기를 전후하여 건축된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현대 문화의 변화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연경관 주택 건축 농업위주의 생활 등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래되고 있어 전통민속마을의 가치가 인정된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1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월 6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지난 410일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주변에는 산수유가 망울을 터트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돌다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이번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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