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스님’, 이참에 좀 쉬세요.

 

참으로 곁에서 보기에도 미안할 정도이다. 쉬지 않고 봉사하는 그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사랑실은 스님짜장으로 유명한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 선원사주지스님이기 보다는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하긴 일 년이면 70회에 4만 그릇이 넘는 짜장을 봉사하고 있으니, 짜장스님으로 유명할 만도 하다.

 

그렇다고 운천스님이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소외되고 조금은 굶주린 이웃들에게, 아니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짜장 한 그릇을 해 먹이는 것이 다이기 때문이다. 늘 조금은 낡은 차에 스님짜장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반죽기와 면을 뽑는 기계, 그리고 야채와 밀가루 등을 가득 싣고 다닌다.

 

 24일. 수원에 소재한 우만종합사회복지관에서 스님짜자을 드시고 계시는 어르신들

 

빡센 일정, 보기만 해도 힘들어

 

멀리서 봉사를 하면 그나마 곁에서 잔심부름이라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짜장스님이 요즘 들어 수도권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 그것만 해도 고마울 뿐이다. 스님과 더불어 아주 작은 복이라도 지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요 며칠 스님의 행적을 보면 20() 화성 신흥사에서 400명에게 짜장면 봉사. 21일은 수원장애인협회에서 100그릇을 봉사를 하기로 했지만 날씨 덕에 취소가 되었다. 장애인들이 눈, 비거 오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22() 여주 라파엘의 집 봉사, 23() 장안구청 인근 평화의 모후원 어르신들께 짜장면 봉사. 24() 수원 우만종합사회복지관에서 새터민 및 어르신들께 짜장면 봉사 등이다.

 

 하누리봉사단. 30명의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 이곳이 와서 봉사를 한다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

 

이렇게 짜장스님이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지역에 봉사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24일 우만사회복지관에는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중학생과 대학생, 그리고 한화봉사단과 가장 많은 봉사자들이 참여한 하누리봉사단(14, 단장 이완소) 등이다.

 

저희들은 회원이 한 30여명 정도 됩니다. 영통 등 수원에 거주하는 주부들 봉사단으로 한 달에 한 번 하루에 4시간 정도 봉사를 합니다. 우리 모음은 친목모임인데 산악회등을 결성해 산도 오르고 여가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저희가 한 달에 한 번 와서 봉사를 하는 곳이죠.”

 

하누리봉사단의 책임자라는 하영호(, 51)의 말이다. 방학을 맞아 친구끼리 봉사를 하러 왔다는 양규빈(1. 동성중), 조유민(1, 동수원중), 차은수(1, 동성중)도 봉사가 보람되고 즐겁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봉사자들이 가는 곳마다 있어 짜장스님이 혼자 다니면서 짜장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사이라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도 방학을 맞아 봉사를 하러 왔다고

 

불시에 일어난 사고

 

이번 봉사일정은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일을 연달아 잡혀있었다. 그리고 25() 수원의 모 주민자치센터에서 어르신 200분께 짜장봉사를 하기로 예약이 되어있었다. 스님은 먼저 그곳으로 향하고 아침에 글을 올리고 나서 길을 나섰다. 곁에 가서 그야말로 잔심부름 밖에는 해 드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았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스님이 부상을 당해 119 구급차로 병원으로 가셨어요.”

 

이게 웬 벼락인가? 부상을 당했다고 하면 면을 뽑는 기계에 다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년 가까이 스님과 함께 다니면서 면 뽑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스런 기계이기 때문이다. 병원을 물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119구급차에서 내린 스님,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응급처치를 한 모양이다.

 

 우만사회복자관에서 스님짜장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는 운천스님. 이 기계에 부상을 당했다

 

이 스님 좀 말려주세요.

 

상처는 생각 외로 컸다. 오른쪽 손의 손가락 중 세 개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 뼈까지 상했다고 한다. 엑스레이를 찍고 수술실로 들어가 두 시간 가까이 수술을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짜장스님의 말에 어이를 상실했다.

 

수술만 받고 바로 남원으로 내려가 내일 봉사를 가야하는데, 그럴 수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결정할 문제예요

 

간호사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수술을 받을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두 시간 가까이 수술을 받고 병실로 옮긴 짜장스님. 2주일 정도는 입원을 해야 한다고 간호사가 이야기를 한다.

 

일주일만 있다가 나가면 안되요. 봉사할 곳이 에약이 되어있는데

 

누가 이 스님 좀 제발 말려주세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짜장봉사를 해야 한다고 하는 운천스님의 말에 슬그머니 화가 난다.

 

스님 이 참에 좀 푹 쉬세요. 그동안 너무 많이 봉사를 해서 그냥은 쉬라고 해도 안되겠고, 아마 그렇게라도 쉬게 하고 싶었나 봅니다.”

 

억지로 이야기는 하지만 마음이 많이 아프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분들과 약속을 한 봉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마음 아파하는 이 스님.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을 것인가?

참 그동안 블로그라는 것에 정신을 빼앗겨, 밥은 먹지 못해도 블로그를 하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지가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물론 중간에 쉬기도 했지만. 이렇게 죽자사자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묻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항상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는 우리 문화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답사를 다니고, 그것을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리고 또 틈이 나면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누빈다. 하지만 꼭 문화재만을 적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들도 적어 나간다.

 

 

블로그의 힘, 그것은 블로거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블로그는 그저 내가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블로그라는 것에 대한 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그저 단순한 글을 적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블로그를 시작한 뒤 그리 오래지 않아서이다.

 

어느 단체가 행사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한 일이 있었다. 그저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을 블로그에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메인에 오르고 나서,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터졌다. 단 한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조회 수는 순식간에 이십만이 넘었고, 댓글이 2,000개나 넘게 달렸다. 그런 블로그의 힘을 만나고 나니 글을 쓴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문화재 블로거. 참 요즈음은 시쳇말로 인기 더럽게 없다. 난 인기블로거가 아니다. 그저 꾸준히 글을 쓰고, 그것을 위해 전국을 누빌 뿐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젠 문화블로거라는 이름까지 하나 덤으로 얻었다. 문화블로거! 돈 안된다. 찾아오는 이도 없다. 그래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블로그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적고 있는 문화재와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 그것이 우리 문화재와 주변의 것들을 바꾸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쓰기 싫어도 글을 적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블로그의 힘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블로그가 무슨 힘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블로그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그 힘이라는 것은 블로거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 세 가지만 알아두면 된다.

 

첫째는 전문성이다. 한 가지 전문적인 것에 꾸준히 포스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새 전문적인 블로거가 되어 있다. 그것이 힘을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둘째는 지속성이다. 그저 쉬지말고 글을 쓰라는 것이다. 그것이 쌓였을 때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힘이 생기게 된다. 물론 그 힘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블로그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겠지만, 그 힘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글을 올렸는데도 바뀌지 않을 때는, 강도를 높여가며 글을 쓴다. 그 또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셋째는 현장성이다. 물론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 현장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문적인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저 꾸준히 현장을 찾아보고,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현장은 밖이 될 수도 있고, 안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나는 전문적인 블로거로 인정을 받게되고, 그 블로그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힘이 있는 전문적인 글을 쓰는 블로거. 멋지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블로그의 힘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바꾸었는데?

 

그렇게 묻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블로그를 하면서 나 스스로도 블로그가 이렇게 큰 힘을 갖고 있음을 몰랐다. 강원도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갔는데 주변에 잡다하게 담배꽁초를 비롯한 쓰레기들이 쌓였다. 그것을 블로그에 올리고, 다음 메인에 떴다. 그 다음에 그 문화재를 찾아갔을 때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주변은 깨끗이 정돈이 되어있고, 그 문화재에 상주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자주나는 길이 있다. 그것을 글로 적었다. 그랬더니 댓글이 달렸다. 해당 관철에서 예산을 세워 바로 조치를 취하겠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 죽음의 교차로가 바뀌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지역의 의원들도 바꾸지 못한 것을, 일개 블로거의 글이 바꾼 것이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블로그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 많은 문화재들을 찾아다니면서 소개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다. 이 추운 날에도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나서는 이유. 그것은 문화재를 찾는 이유도 있겠지만, 블로그의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을끼를 찾아보기 위함이다.(사진은 내용과 무관함)

요즈음 들어 여성으로만 구성 된 타악 그룹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타악 그룹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시원찮은 모임들도 간혹 눈에 띠기 때문이다. 물론 어릴 적 국악을 전공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리에는 꽤나 민감하기 때문이다.

 

123() 오후 4. 수원시청 별관 2층에 마련된 대강당에서는 ‘2012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 경연대회가 열렸다. 그 식전 행사로 수원시 권선구 곡선동에 거주하는 주부들로 구성된 소리파워라는 여성 타악 그룹이 무대에 올랐다. 처음에는 주부들로 구성된 타악그룹이라고 하기에 그저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타악 동아리 정도로만 기대를 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소리파워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오른 소리파워 멤버들의 동작과 장단을 보다가 대강당 이층으로 올라갔다. 사진도 찍어야 하지만, 그곳에서 자세히 관람을 하고 싶어서이다. ‘소리파워라는 이름답게 힘이 넘치는 장단으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주부들로 구성된 타악 그룹이라고 하는데, 조금만 더 다듬으면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뒤처지지 않을만한 실력들이다.

 

현재 12명의 회원으로 운영을 하는 타악 그룹 소리파워는 2003년에 창단이 되었다. 올 해로 꼭 10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10년 세월동안 무단히 노력을 했음이 장단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온다. 절로 어깨춤이 나온다.

 

소리파워 용환순 단장(, 56)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미모를 지니고 있다. 이 타악그룹의 단원들의 연령이 38세에서 60세까지라고 하는데, 모두가 힘이 넘치고 젊게 보인다. 이렇게 땀이 흥건히 배어 나오도록 신명나는 장단을 두드리다 보니, 생활에도 활력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혹여 생활에서 받을 스트레스도 다 날려버릴 듯한 힘이 넘치는 두드림이니 말이다.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소리파워

 

소리파워는 일주일에 세 번 씩 모여 하루에 3시간 정도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더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작품을 받고, 사사를 하기도 한다고.

 

"수원시에서 하는 행사는 거의 참석을 해서 공연을 합니다. 한 달에 2~3회 정도 공연을 하는데 주로 10~11월에 몰려있어요. 일 년이면 30회 정도 공연을 하게 되니, 그동안 300회 정도 공연을 한 셈이네요.“

 

용환순 단장은 어디든지 불러만 주면 달려간다고. 물론 주부들로 이루어진 타악 그룹이다 보니 날마다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정해놓고 찾아가는 곳이 있다고. 청소년센터, 요양원, 복지관 등 수원시의 곳곳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라는 것.

 

 

의상도 직접 제작해 입어요.”

 

초청을 하는 곳에서 점심 값 정도 주는 사례와, 회원들이 월 회비로 걷는 돈을 이용해 의상을 제작한단다. 하지만 의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천을 떠다가 만든다는 것. 그렇게 공연복을 만들어 입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여성들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어떻게 악기 등을 운반하느냐고 물었다.

 

저희 단원 중에 손재주가 있는 분이 있어서, 천을 사다가 전부 직접 무대의상을 만들어 입어요. 그래서 큰돈은 들어가지 않죠. 그렇게 저희들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어요. 대북이나 각종 악기 등을 운반할 때는 탑차를 부르기도 하고요. 센터 등에서 도움을 주기도 해요. 그래도 일일이 악기를 저희가 다 날라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뒤따르기는 하죠.”

 

프로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러나 아마추어 타악 그룹이면서도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있는 소리파워는 그 정신도 프로에 가깝다.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한다는 것. 공연을 마치고 직접 악기를 나르고 있는 단원들. 얼굴에는 땀이 맺혀있다. 그래서 소리파워의 단원들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

 

소리파워는 수원시 평생학습동아리 경연대회에 나가 우승을 한 후, 경기도주민자치센터 동아리경연대회에서도 우승을 한 저력이 있는 타악 그룹이다. 전국경연대회에 나가서는 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용환순 단장에게 활동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르신들은 타악 연주 등을 좋아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찾아가면 일어나셔서 춤을 추시고는 해요. 그리고 잘 보았다고 다음에 꼭 다시 오라고 부탁을 하시죠. 그럴 때가 가장 행복하죠,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앞으로 단원을 좀 더 보강해, 더 수준 있는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주부 타악 그룹 소리파워’. 이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활력답게 인생의 길에서도 그렇게 힘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고대한다.


 

지난 밤에 잔뜩 흐리더니, 아침부터 겨을비가 추적거리기 시작한다. 어제 밤늦게 여주장을 보러나갔다. 장을 본 것은 아니고,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라는 재래시장에 설치한 루미나리에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갖가지 색을 자랑하는 입구부터 눈이 현란하다. 요즈음 재래시장이 변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장에서 보이는 정감이 사라지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비가 온다고 밥 안 먹간디?

 

어제 미리 연락을 취해놓고 장의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여주장으로 나갔다. '여주상권 살리기 추진위원회' 박흥수(남, 65세) 씨와 김동호씨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겨을비는 차다. 이 비가 오는데도 천막을 치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우는 사람들. 5일장이야 5일에 한번, 5일과 10일, 15일과 20일, 25일과 30일, 한 달에 여섯 번이 열리는 장이다.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5일에 한 번씩 장으로 오니, 오늘 일당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는데도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한분. 작은 파라솔 하나를 의지해 나물과 곡물 몇 가지를 놓고 자리를 지키신다.

 

 

"할머니 비가 오는데 이렇게 앉아계세요"

"장날인데 어쩌겠어. 비가 와도 기다려봐야지"

"물건은 좀 파셨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도통 손님이 없네."

"오늘 같은 날은 손님도 없을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감기 걸리시겠네요."

"뭔 소리여. 비 온다고 밥 안 먹간디?"

 

할머니는 오늘 장에 나온 차비라도 끝내 벌어 가셔야 한단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하다. 겨울비는 추적거리는데 오한이 오시는지, 몸을 으스스 떨고 계시다. 어머니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경기도에서 두 번째인 여주장 많이 변했죠'

 

약속한 장소에 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박흥수씨가 들어온다. 그동안 여주장을 취재하러 많은 언론사 사람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점포위주의 장사를 하는 문화의 거리에 여주 5일장이 선 모습.

 

"경기도에서는 성남 모란장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여주장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그 세가 많이 축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장입니다. 근동에서는 가장 크죠. 40 ~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주 인구가 별 차이가 없으니, 그 전 생각을 하면 정말 큰 장이죠"

 

여주장은 두 곳으로 나눠진다. 한 곳은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로 명명된 재래장으로, 여주농협부터 순화당 사거리까지 320m 구역이다. 이곳이 바로 밤이 되면 루미나리에 불빛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점포가 있는 분들이 '여주 상권살리기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장의 발전을 도모한다. 그리고 여주읍 하리 쪽의 5일장이 서는 곳에는 또 다른 상인연합회가 관리를 한다. 문화의 거리 상인연합회는 현재 회원이 150명 정도다.  

 

"저 어릴 적에는 아버님이 이곳에서 시계도 고치시고, 심지어는 지퍼라이터도 고쳤어요. 원래 장을 돌아다니시면서 물건을 파는 장꾼이었는데, 이 자리에 좌판을 벌이시고 물건을 팔고 수리도 하셨죠. 그 가게를 제가 물려받은 겁니다."

 

김동호씨의 말이다. 그 말에 이어 박흥수씨도 자신의 가게도 어릴 적에 보면 작은 포목 몇 필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2대에 걸쳐 여주장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박흥수씨는 장을 지키는 풍속도 바뀌어 가고 있다면서.

 

여주장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박흥수씨(좌)와 김동호씨(우)

 

"지금은 장 사람들이 선진화가 되어 가는가 봐요. 전에는 연세가 드셔도 점포를 지키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연세가 좀 드시면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시고는 장에 나오시지를 않아요.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이 자꾸만 보이시질 않으니 그도 한 걱정입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50년 전만 해도 장작도 팔고 물장수도 있던 여주장인데

 

여주장이 얼마나 변했느냐고 물었다. 50년 전만 해도 여주 장에는 나무를 해 갖고 와 파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몇 십 미터씩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장작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사서 떼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물장수가 있었는데, 여주 남한강 물을 그대로 떠다가 팔았다는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보는 남한강물을 어찌 그대로 떠다가 식용수로 사용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강물이 상당히 맑았어요. 그래서 그냥 강물을 떠다가 그 물로 밥도 하고 그랬죠. 그때 물장수들이 있었는데, 그저 밥만 먹여주면 물은 얼마든지 길어왔으니까요. 밥이라도 먹는 것이 그 당시에는 최고였죠."

 

박흥수씨는 옛 생각이 나는지 눈을 지그시 감는다. 하기야 내가 살던 서울에서도 어린 시절 개울가를 흐르는 물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놀았으니, 이곳이야 얼마나 맑았을까? 이야기를 끝내고 나무를 팔던 거리를 알려주겠다고 일어선다. 비는 아직도 추적거리고 온다.

 

 여주장에 비가온다. 상인들은 파라솔과 천막, 비닐 등으로 비를 피한다. 그래도 5일장은 파장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장작을 팔던 거리. 이 거리 수십미터에 나무장사들이 줄을 지었었다


"지금은 노점상을 하시는 분들 중에도 상당한 부자들이 많아요. 저분들 중에는 중국에 공장을 갖고 계신 분도 있고요. 장이 많이 변했죠. 다양한 물건을 접할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빈대떡 같은 먹거리가 많았는데. 심지어는 도롱뇽 알도 팔았어요. 눈이 좋아지는 약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고 만다. 하지만 옛 정취를 찾겠다고 발전 없는 장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변해버린 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풍물과 함께 깊은 정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는 추적거리고 오는데,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5일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 파장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단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가면 견우직녀가 된 석불입상이 서 있다. 200m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일 년에 단 한 번 12월 해일 자시에 만난다고 한다. 두 석불은 일 년간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나면 제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석불이라기보다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장승이나, 묘 앞에 서 있는 석인과도 같은 모습이다. 다만 이 석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머리에 4각형의 높은 관과 보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보물 제4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비가 부슬거리는 날 길을 나섰다. 익산 왕궁리 터와 1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왕궁리 석탑도 볼 겸 겸사겸사 길을 나선 것이다.

 

빗길에 만난 고도리 석불입상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두 기의 석불입상.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찡하게 만든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석불입상이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멀리 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마을에서는 예전에 이곳에 커다란 수문이 있어, 수문의 허를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거리에 수문의 허를 막았다고 보기에는 맞지가 않다. 그런 커다란 수문이 있었다면 아직도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수문의 허를 보완하기 위해 석불입상을 세웠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만일 그렇다고 하며 이 석불입상은 불상이기보다는 석장승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아마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 두기의 불상이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두기의 석불입상은 견우직녀처럼 일년에 단 한 번 12월 해일 자시에 만난다고 전해진다.
  
사다리꼴의 화강암에 지극히 절제된 수법으로 표현을 하였다. 눈은 가늘게 떴으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어 웃는 상이다.

 

두 석불입상이 부부라는데

 

높이가 4,24m에 화강암 세로 사다리꼴로 조성이 된 이 석불입상은 마을 안쪽에 있는 서 있는 불상이 여성이고, 왕궁리 쪽으로 서 있는 것이 남성이라고 한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조각을 한 수법이 동일하다. 사다리꼴의 몸체에 팔이 따로 없으며, 마주한 두 손을 깍지 낀 모양만 주변을 파서 돋을새김한 것처럼 조각을 하였다. 웃음을 띤 얼굴은 두 눈이 가늘게 표현을 하였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서는 석불이라기보다는 마을의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석장승에 가깝게 표현이 되었다. 다만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석불의 조각기법이 표현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 석불입상과 마주하며 마을 안쪽에 서 있다.

 

두기의 마주하고 있는 석불입상.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흡사 두 석불입상의 마주하고도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듯하다. 올 12월 해일에는 동고도리에 가서 두 석불입상의 해후를 보아야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면서 돌아선다. 아마도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이별이라는 아픔을 수도없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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