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등불로 화성문화재 위상 높여

 

수원화성문화제 전야제가 시작하기 전 돌아본 수원천. 환하게 불을 붉힌 정조대왕의 능행차 일부분과 무예24기 모형의 등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수원천을 걷는 사람들은 밝게 조형된 등불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등을 촬영하기에 바쁘다. 몇 년 전부터 마련한 등불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등불축제는 수원천 천변 길에 조성한 것이 아니고 수원천을 따라 조성됐다. 몇 년째 등불축제는 지나는 행인들의 발길을 붙든다, 남수문에서 매향교쪽으로는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마련되었다. 말을 탄 호위대장과 그 뒤에 대왕의 어가행렬이 따른다. 정조대왕의 어가 앞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자리한다.

 

통닭거리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매향교 방향으로 걸다보면 무예24기 시범 등을 만날 수 있다. 격구, 쌍검, 월도, 마상재 등 다양한 동작을 하고 있는 등이 눈길을 끈다. 환하게 켜진 등불을 따라 걷다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등을 배경으로 사진촬영 등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 등불축제에 빠져

 

수원화성문화제가 열리면 수원천에 장식하는 등불이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매년 이렇게 열리는 등불축제가 딴 곳과는 다르게 수원의 상징인 정조대왕 능행차와 무예24기 종목이기 때문에 늘 사진을 찍어 진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합니다. 오늘도 사진을 찍어 보내려고 나왔어요

 

등불축제를 휴대전화에 담고 있던 송아무개(, 31)씨는 이렇게 촬영해 친구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면서 수원화성문화재 때는 볼거리가 많아 즐겁다고 한다. 등을 촬영하는 사람들 대개가 SNS를 통해 수원화성문화제를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요즈음은 SNS를 누구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파급효과가 크다.

 

휴대전화와 SNS의 사용으로 인해 수원시민 누구나 수원을 홍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촬영해 이웃들에게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정해진 홍보매체를 통하지 않아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수원을 홍보할 수 있는 SNS의 발달로 인해 시민 누구나 다 홍보요원이 된 셈이다.

 

 

등불축제 좀 더 다양하게 마련되었으며

 

수원천에 선보인 등불축제를 보면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든다. 더 많은 등불이 전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수원을 대표하는 지역축제이다. 수원을 외부에 알려 더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은 수원화성문화제의 진행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종목의 행사를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의 종목을 보여준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몇 개 종목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능행차는 서울서부터 화성시 융건릉까지 전 구간에 걸쳐 시연된다. 그만큼 수원화성문화제의 백미는 능행차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능행차와 더불어 정조대왕의 뜻과 정조의 친위무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발이는 야조, 그리고 수원시민과 단체들이 참여하는 퍼레이드와 등불축제 정도만 집중적으로 키워 진행하는 것도 연구해볼 만하다. 그 외에 부수적인 것을 다양하게 벌이는 것보다는 축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몇 개의 종목으로 함축시켜 수원화성문화제하면 수원을 찾아와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단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축제 30선안에 들어간 축제를 보면 많은 종목이 아닌 단 몇 가지 종목으로 백만 이상의 외지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축제는 늘여놓는 것이 아니라 외지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수원천에 마련한 등불축제를 보면서 화홍문서부터 영동교까지의 수원천에 등을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축제는 늘이는 것이 아니라 집약되어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소리가 정겨운 수원천을 자랑하는 사람들

 

수원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광교산에서 여러 갈래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유도하여 용연(龍淵)의 곁을 지나게 하였다. 화성에는 750보 거리의 남북을 관통하는 수원천(水原川)이 정비되어 있는데, 화성성역 당시에는 대천(大川)이라고 칭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매년 반복되는 범람이 문제였던 수원천을, 정조 18년인 17943월 수원천을 깊이 파는 준천(濬川)작업을 하였다.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광교대천(光敎大川)’이라고 했는데, 용연을 침범하지 않게 제방을 따라 화홍문으로 들어오는 물길을 대천(大川)’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북수문인 화홍문의 7간 수문으로 유입된 수원천을 너비는 20여 보(23.5m), 깊이는 반장에서 1(1.5m에서 3m) 정도로 정비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보다 상당히 넓고 깊은 하천이었던 것이다.

 

 

예전 제가 어렸을 때는 수원천에서 목욕도 하고 여름철 피서를 하기도 했죠. 그러나 수원천 복개 후 사람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어요. 한 마디로 자연을 인위적인 복개라는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이죠. 지금은 복원을 시켜 놓았지만 예전 복개 전에 비하면 아직 제대로 된 수원천을 되찾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201610월 지동교에서 열린 수원천 복원 관련 사진전을 보고 있던 김아무개(, 당시 77)옹은 예전 수원천이 그립다고 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복원을 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자연은 후손에게서 빌려온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고 한다. 수원천을 복원시키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손들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장맛비로 인해 맑은 물이 흐르는 수원천

 

수원천의 발원이 시작하는 광교산은 본래 광악산(光嶽山)이었는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평정하고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이 산은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광교(光敎)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산에서 시작해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수원천이다.

 

26일 오후 영동교에서부터 수원천 옆길을 따라 수원천을 살피면서 걸어보았다. 며칠 전 많은 비가 내려 수원천변 산책로 가까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이다. 다행히 물이 줄어 지난 6월 녹조현상이 보이던 수원천이 정상적인 맑은 하천의 상태로 돌아와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

 

수원천은 생명이란 생각을 늘 하고 살아가는 나에게는 수원천이 수원화성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하면서 물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복개를 한 수원천 주변으로 잡다한 판잣집들이 널려있기도 했지만, 깨끗하게 정비가 된 이후 산책로까지 조성하자 수원천은 다시 생명의 하천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름피서 난 수원천에서 합니다

 

영동교를 지나 영동시장과 못골종합시장을 연결하는 다리 밑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올 장마는 마른장마가 들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국지성 소나기가 내려 한때 물이 불어났던 수원천이 원 상태로 돌아가자 수원천을 찾아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지동교 아래편에는 아이들이 수원천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치고 있다. 그 모습만 보아도 수원천이 시민들에게 얼마나 좋은 하천인가를 알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무더위를 피해 광교산 계곡부터 사람들로 인해 빈틈이 없는 곳이 바로 수원천이다. 남수문 수벽에서 낙차 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하천을 가득 메우고 흐르는 물이 한 낮의 더위를 가시게 만든다.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려 피서를 가기 위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수원천의 물도 맑아지고 물이 이렇게 풍성하게 흐르고 있으니 지동교 다리 밑에 자리를 깔고 피서를 해야 할 듯하네요. 피서 간다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수원천에서 피서를 하면서 그 비용으로 주변에 널린 먹거리를 먹는 것이 정말 좋은 피서죠

 

인근 팔달문 시장 관계자는 경비를 들여가며 피서를 간다고 고생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원천에서 여름 피서를 즐기겠다고 한다. 예전 어릴 적 수원천에서 멱을 감으며 놀던 때를 생각하며 시원한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피서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수원시민의 휴식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수원천. 올 여름 피서는 나도 이곳을 선택해야 할 듯하다.

 

무예24, 권선동 한림도서관 야외에서 펼쳐지다

 

관무재(觀武才)란 조선시대 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 시행한 무과시험의 하나이다. 관무재를 실시할 때는 한량과 군관을 비롯하여 조관 출신 등, 모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관무재는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부터 시작해 모두 22회에 걸쳐 실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관무재의 시험은 초시와 복시가 있었는데, 복시의 경우 중앙에서는 왕이 직접 참석하여 춘당대에서 시험했다.

 

이와는 달리 지방에서는 의정부 관원 1인이 시험관이 되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 성적이 우수한 자가 한량일 경우 수령이나 변장에 임명했고, 군관일 경우에는 품계를 높여주거나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관무재의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는 수원시립 무예24기 시범단의 관무재공연이 21일 권선동 한림도서관 야외에서 펼쳐졌다.

 

621일은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이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후 4시라고 해도 초여름 날씨치고는 상당히 뜨거운 날이다. 한림도서관 야외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해 부스를 쳤지만, 그 안에 들어가도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날씨에도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무재라는 용어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무예24기 시범단이 수원에 있다는 것은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오늘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아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더운 날 맨 앞에 앉아 열심히 보고 있네요

 

 

문화콘텐츠 아이템으로 활용가치 있어

 

인근 아이파크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이아무개(, 38)씨는 평소 무술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좋은 공연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관무재 공연을 보고 있던 한 시민은 이 좋은 아이템을 갖고 문화상품으로 만들면 좋겠다면서 전문가들을 모아 문화콘텐츠 아이템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무재는 그동안 시립무예24기 시범단에 의해 몇 번 공연이 된바 있다. 하지만 관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만 갖고도 훌륭한 문화상품의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만큼 수원시의 문화콘텐츠의 실용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역사적 공연물을 갖고 13천여명의 관람객을 모아들이는 중국의 송성가무단의 공연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원의 문화적 인식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중국 항주의 송성가무쇼는 송나라 때의 전설과 역사를 표현한 공연으로, 이제는 세계 3대 공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 쇼의 영어 제목은 ‘The Romance of the Song Dynasty’이다. 약 천 년 전 송조의 고도 항쪼우를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 자연 그리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치열했던 전쟁 등을 4개의 단막극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宋城千古情>이란 이 가무쇼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관객을 압도한다. 450명의 출연진이 한번에 3,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형극장에서, 일 년 내 공연하는데도 연일 좌석이 만석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관광 상품이다. 이런 세계적인 공연상품을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인물 등을 주제로 제작된다. 물론 공연장은 필수이다.

 

 

관무재’,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활용해야

 

21일 오후, 뜨거운 날씨에도 한림도서관 야외에 모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더위보다 관무재를 관람하는 것이 더 의미있다는 시민 장아무개(, 44)씨는 훌륭한 공연물이리면서 이런 좋은 콘텐츠를 활용해 수원의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원을 상징하는 공연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관무재는 극적인 요소와 무예24,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상품이다. 수원을 주제로 하는 스토리텔링으로도 손색이 없다. 수원과 별상관이 없는 해괴망측한 공연물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원을 상징할 수 있는 문화상품이 개발되어야 한다. 하나의 공연물만 갖고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한국국보대관>을 길에서 만나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책이 있을까? 살다보면 책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책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면 그 책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하려고 노력은 할까? 나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대답한다. 그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할 것이다.

 

정말 소중한 책 한권을 구했다. 그것도 책방이 아니라 우연히 길에서 책을 만났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대단한 우연이다. 아마 문화재에 미쳐 30년 가까운 시간을 많은 닐과 경비를 들여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더니 신께서 이런 소중한 책을 나에게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참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말이 30여년이지, 그 시간동안 전국을 걸으며 찾아본 문화재가 얼마나 될까? 아마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는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시정을 요구하는 기사를 올렸다. 그 중 많은 문화재의 문제점들이 시정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한국국보대관>을 길에서 만나다

 

15일 남문시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누군가 헌책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맨 위에 낡고 더렵혀진 책 한권이 눈이 간다. <한국국보대관>이라는 책 표지 때문이다.

그 책 어디서 구했어요?”

,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짐을 옮기려고요

그 책 저한테 파실 수 있어요?”

제가 소장하려는 것인데요

제가 꼭 필요해서 그런데 저한테 파시죠

이 책, 꼭 필요하세요. 그럼 그냥 가져가세요

 

그냥 가져가란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이 책의 가치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다. 더구나 나처럼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닌 사람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책이다. 그런 책을 그냥 가져가란다. 본인도 그 책의 소중함을 알고 소장하겠다고 한 책이다. 그런 소중한 책을 그냥 가져가라는데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책을 받아들었다. 꽤 묵직한 책이다. 책을 받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 책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일까? 국보대관이라고 했으니 내가 찾아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책을 들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책 내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옛 화성을 만나다

 

<한국국보대관> 내용에는 국보만이 아니라 국보급 문화재와 명승, 천연기념물까지 수록이 되어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각 도의 국보급 문화재들이 지자체별로 소개가 되어있다. 수원편을 찾아보았다. 수원화성이 소개되어있다. 그런데 이 책의 발간연대와 발간한 곳 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수원화성 중 방화수류정 봉돈, 장안문과 여러 곳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원화성을 복원하기 전 모습이다.

 

정말 소중한 자료구나혼자 뇌까리며 책을 뒤적여본다. 책 뒤편에 특집 해외전시국보리고 부록이 붙어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단기 4290820일 미해군함정 AF57호로 해외에 자랑할 우리 문화재 국보 185점을 적재하여 부산항을 출발 922일 미국에 도착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단기 4290년은 서기 1957이다. 그런 내용으로 볼 때 이 책은 1960년쯤 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수원화성이 복원되기 이전에 제작된 책이니 벌써 60년 가까이 되었다. 햇수로 따진다면 꽤 오래된 책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국에 산재한 국보급 문화재를 설명과 함께 소재파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책에는 고적 제14(현재 사적 3)라고 수원화성을 소개하고 있으며 방화수류정, 연무대,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화홍문, 봉돈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봉돈은 허물어진 채로, 장안문은 문 위 누각이 사라진 채로 소개되어 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소중한 책 한권. 당분간은 이 책을 보면서 우리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할 듯하다. 낡고 더렵혀진 책이지만 나에겐 정말 소중한 책이다.

 

연분홍 영산홍, 푸른 수양버들과 어우러진 절경

 

봄이되면 화성 성벽 외곽으로 식재해 놓은 영산홍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 영산홍과 어우러진 화성을 보기위해 일부러 한 바퀴 돌아보고는 한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역시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화성 네 곳의 보물 중 한 곳이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간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화성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화성 가운데도 제일 뛰어난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방화수류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제일루라는 누각이 있다. 호남제일루는 남원 광한루요, 영남제일루라고 하면 밀양 영남루를 꼽는다. 관동제일루는 삼척의 죽서루이다.

 

조선조 숙종대왕은 관동팔경 중 한 곳인 울진의 망양정을 '관동제일루'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다운 누각을 지역마다 제일루(第一樓)라 칭하고 있다. 난 방화수류정을 화성제일루라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만큼 방화수류정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425일 오후에 찾아간 방화수류정, 영산홍과 어우러진 방화수류정을 보고도 제일루라 칭하지 않는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곳을 제일루라 칭할 것인가?

 

 

군사적 목적으로 꾸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조선 정조대왕의 강한 국권을 바탕으로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방화수류정이라는 명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닐기에 적합해 방화수류정이라 했던가? 주변이 온통 희고, 붉은 영산홍에 쌓이고 용연 주변으로는 연두색 잎을 자랑하는 능수버들가지가 늘어졌다.

 

17941019일 완공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을 하는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 보인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절경인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난 이곳을 화성제일루라 부른다.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방화수류정. 평일인데도 방화수류정 누각 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봄날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 누구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화수류정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경관 또한 일품이다.

 

이 계절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면서 방화수류정 앞에 도달하면 가슴이 뛴다. 올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의 눈을 현혹할까?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마련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한 방화수류정, 옆으로 흐르는 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도왔다.

 

방화수류정 옆으로 흐르는 수원천을 몇 사람인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수원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엇이 저리 바쁠꼬?”라는 생각을 한다. 저 사람들 눈에는 봄날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영산홍과 어우러져 한껏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방화수류정. 그 운치를 보고 화성제일루라 스스로 칭한 것에 어깨를 들썩한다. 그 이름이 지금 시기의 방화수류정에 딱 어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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