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주차 차량에 가려 스탬프는 보이지 않아

 

이곳에 화성 한 바퀴 스탬프가 있다고 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요

4일 오후, 화성 한 바퀴를 돌면서 스탬프 투어에 나선 관광객인 듯 손에 스탬프 투어 북을 펼쳐들고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지만 대답을 해주는 사람들이 없다. 할 수없이 남문고객센터를 찾아들어가 스탬프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곳에 가서 스탬프를 찍는다.

 

관광객을 위한 스탬프 투어라면 당연히 관광객이 찾기 쉬운 곳에 스탬프를 설치해야 하는데 이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 보이지도 않게 스탬프를 설치해 놓으면 어떻게 숨어있는 스탬프를 찾아 도장을 찍으라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스탬프 투어를 하는 것인지 스탬프 숨바꼭질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스탬프를 찾느라 애를 먹어서 그런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해야 할 당사자가 불쾌하다는 듯 볼멘소리를 낸다. 모처럼 수원화성을 찾아와 스탬프 투어에 나선 관광객이 오히려 불쾌한 마음을 먹었다고 하면 수원화성을 홍보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스탬프 투어가 오히려 수원화성의 관광에 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고객센터 앞에 있던 스탬프 남수문 방향으로 옮겨

 

벌써 옮겨간 지 꽤 되었어요. 고객센터 앞에 서 있어 사람들이 찾기 쉬운 자리에 있던 것을 어느 날 말도 없이 스탬프를 옮겨버린 거예요.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고객센터 관계자에게 말 한마디 없이 스탬프를 옮겨가는 바람에 저희들도 옮긴 자리를 몰라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이 스탬프가 어디 있느냐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질문을 하는데 답변을 못해 애를 먹기도 했고요

 

남문고객센터 관계자는 자신들도 언제 스탬프를 옮겨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주변을 한참이나 찾아보았다고 하면서 관광객이 찾기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스탬프를 보이지도 않는 곳에 옮겨놓은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그 스탬프가 서 있는 곳이 남수문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어 옮겼다고 하지만 현재 서 있는 자리는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자리라는 것이다.

 

관광객을 위한 스탬프 투어이고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면서 모두 10곳에서 도장을 찍어야하는데 스탬프가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렵다고 하면 오히려 수원화성을 홍보하자는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 자리보다는 남수문에서 관광객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서 있어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주차 차량에 가려 보이지 않는 스탬프

 

남수문 곁에 서 있다는 스탬프를 왜 찾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일대를 돌아보았다. 남문시장 일대는 구석구석 잘 알고 있지만 스탬프를 찾기가 쉽지 않다. 스탬프 도장을 찍는 구조물이 크지도 않지만 그 앞에 불법주차 차량들이 늘어서 있어 작은 스탬프 구조물은 아예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을 잘 아는 나로서도 찾기 힘든 것을 화성투어가 초행인 관광객들에게 찾으라고 하기엔 무리인 듯하다. 처음 서 있던 고객센터 앞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고 남수문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그런데도 굳이 보이지도 않고 찾기도 힘든 곳에 설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리를 옮긴지 꽤 시일이 지났지만 지금도 하루에 몇 명씩 스탬프가 서 있는 자리를 못 찾아 장소를 물어본다는 관광객들. 관계당국은 스탬프를 관광객들이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스탬프 앞을 가로막는 불법주차 차량들을 해결하거나 해야 한다. 관광객들이 힘들여 화성을 돌면서 불쾌한 감정을 갖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중천에 걸린 방화수류정은 가히 수 일경

 

수원화성에 있는 각루(角樓)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 등 넷이다.

서남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하고, 동북각루(東北角樓)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한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 위에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용연은 북성 밖에 있는데 반달처럼 생긴 못으로 둘레가 210, 깊이 6척이며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못 위의 성 모서리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못 서쪽에는 석각이두(石刻螭頭)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각이두란 돌로 만든 이무기라는 뜻이다.

 

4월의 끝 날인 30일은 음력으로 3월 보름이다. 방화수류정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만나기 위해 해가지고 난 뒤 천천히 걸어 방화수류정으로 향했다. 시간을 잘 맞춘 덕에 방화수류정 위로 둥근 보름달이 중천에 걸려있다. 이런 멋진 경치 때문에 사람들은 방화수류정을 화성 수 일경으로 꼽은 것이 아니었을까?

 

 

歷遍春城日未斜 (역편춘성일미사) 춘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한창이라

小亭雲物轉晴佳 (소정운물전청가)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다운데

鑾旂慣報參連妙 (난기관보삼연묘) 난기가 계속 삼련의 적중함을 보고하니

萬柳陰中簇似花 (만류음중족사화)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정조대왕의 방화수류정에 관한 시이다. 어찌 이곳에 올라 주변을 조망라면서 시 한 수 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난 방화수류정을 수원화성의 신의 한수라고 생각한다. 밤경치의 신의 한수가 방화수류정이라면 낮에 돌아보는 신의 한수는 바로 용도(用道)이다. 서남암문을 들어서 서남각루인 화양루까지의 길이 비로 용도이다.

 

 

 

봄에 걷는 용도는 아름다움이 다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다. 바로 전국을 돌며 찾아본 50여개소의 성곽에 대한 책이다. 몰론 그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바로 수원화성 때문이다. 수원화성에서 가장 특별한 곳이 바로 용도로 이곳을 걷다보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를 만난다. 용도의 밖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아마 이 용도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적이 팔달산 서남쪽 등성이를 공략하고자 이곳을 올랐다면 이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원화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화성의 성곽보다 높은 곳을 점령해야 한다. 평산성인 수원화성의 유일하게 취약한 곳이 바로 사남암문 밖이다. 이곳을 점령한다면 화성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에 용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길게 용처럼 자리를 틀고 조성되어 있는 용도. 결국 수원화성은 어느 곳으로도 공격할 만한 곳이 없다.

 

 

 

봄철에 용도를 걸으면 성벽 위로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이 성안을 기웃거린다. 근로자의 날을 맞아 화성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용도로 찾아들었다. “, 이렇게 여긴 성벽이 낮아요? 성벽을 넘어올 수 있겠는데요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수원화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지금도 용도 양편에 경사가 급하지만 예전에는 더 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힘들여 그 비탈을 올라 용도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용도 끝에 자리한 서남각루인 화양루 위에 올라서면 팔달산의 남쪽이 다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화양루 끝에는 양편 성벽이 치성과 같이 돌출되어 있다. 어디 한 곳도 허술한 면이 없다. 이곳이 어찌 신의 한수가 아니겠는가? 이 용도 하나가 있어 수원화성은 철벽수비를 할 수 있는 성이 되었다. “화성을 100번만 돌아보면 속속들이 화성이 보인다던 어느 어르신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보름날 밤과 다음날 낮에 돌아본 방화수류정과 서남암문 밖 용도, 이 어찌 신의 한수가 아니겠는가?

 

 

 

 

 

 

 

 

 

수원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화성의 4대문 가운데 북문은 장안문이다.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요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1794228,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1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편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수원 화성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고?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런 장안문은 참으로 견고한 성문이다.

 

장안문은 4대문 가운데 가장 아픔이 많은 문이다. 6,25 한국전쟁 때 장안문은 반파가 되었다. 현재 성문에는 무수한 파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폭격을 받았는데도 반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장안문이 견고하다는 뜻도 된다. 정조 당시의 화력으로는 아마 적들이 장안문 인근에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옛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돌을 갈아내어 성혈을 팠다. 성혈은 주로 커다란 바위에 파기도 했지만, 고인돌이나 선돌 등에 많이 나타난다. 아직 성혈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돌로 돌을 갈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성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혈을 몇 개씩 파여져 있기도 하다.

 

장안문의 안쪽에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10여 개가 넘는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그 장안문처럼 웅장하고 단단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서방이나 아들이 꼭 장원급제하기를 염원해서 성혈을 파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문을 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파면서 얼마나 속으로 많이 기원을 했을 것인가? 오늘 장안문은 옛 위용을 간직한 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어처구니 사라지고 취두만 남아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나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붕 위에 잡상도 이런 이유가?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 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창룡문과 화서문의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 일본인 학자들이 1902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을 답사하며 문화유적을 조사하였는데 당시에 찍은 사진에 보면 화서문의 지붕에 어처구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전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의 사진기록에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화서문의 현판이 기울어져 있고 지붕 위에 잡상(어처구니)도 보이지 않는다.

 

1940년 일본인 채색 목판화가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목판화의 화서문 역시 지붕 위에 어처구니를 그리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화서문 위의 어처구니는 1900년대 초 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화서문과 창룡문의 지붕 처마 끝에 각각 4구의 어처구니가 자리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팔달문 외도에 보면 1층 누각과 2층 누각 처마 끝에 각각 4기의 어처구니가 보인다. 현재 팔달문에는 어처구니가 서 있다. 하지만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 어처구니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하진 것일까? 더구나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정조대왕 때의 원형과 다르다. , 서문의 어처구니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