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후 돌아본 동남각루에서 정조를 만나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네 곳의 각루가 있다. 각루란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한다. 이는 각루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정자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정이란 땅의 지면에 붙여지은 건물을 말하고, 누는 아래로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중층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요즈음은 건강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창룡문부터 시작해 남수문까지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날이 따듯해지면 주말이나 시간을 날 때 산을 오르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하지만 겨울에는 산을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짧은 구간이지만 화성을 걷는 것으로 운동량을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화성을 걷는 것은 겨우내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신체로 인해 자칫 봄이 되면 취재로 인해 많은 결음을 걸어야하는 운동량을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떨어지기 쉬운 체력을 보강하지 않는다면 행사가 시작되는 봄철부터 무더운 여름이 지날 때까지 힘들게 걷고 많은 땀을 흘리다 보면 체력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 바로 아침운동이다.

 

 

눈 내린 다음날 만난 동남각루

 

31일 아침 일찍 창룡문으로 향하지 않고 남수문으로 향했다. 눈이 내린 후에 차가운 날씨로 얼어붙은 길이기에 가파른 남수문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에 반대로 남수문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걷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생각한대로 눈이 온 후 녹지 않은 길은 미끄럽다. 이런 날 동남각루의 경사가 심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수문에서 동편방향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과 팔달문을 지켜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동남각루는 남공심돈(지금은 유실되어 버린 화성의 구조물 중 하나)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경계를 서면서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으며 그 중 동남각루가 서북각루와 함께 규모가 작다. 하지만 이 작은 규모의 동남각루는 그 어느 각루보다 중요한 위치에 세워졌다. 동남각루는 화성에 설치한 각루 중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도 사용한 곳이다.

 

늘 화성을 산책할 때 이곳을 지나치거나 돌아보고는 하지만 오늘의 동남각루는 남다르다. 작은 동남각루는 목책층계를 올라 각루로 오를 수 있다. 밑으로는 작은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고 한 옆으로는 불을 땔 때 연기가 나오는 연도와 굴뚝을 마련했다. 이 작은 각루 밑에 마련한 작은방이 바로 온돌방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남각루 안에 깃든 정조대왕의 마음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남각루를 구천(龜川 =현 수원천)의 위 일자문성의 머리에 있다. 성이 산세 때문에 이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뚝 끊어졌으며 누는 성 위로 쑥 나와서 멀리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규모 또한 54간으로 높이와 너비가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 다만 4간에 모두 판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층계를 설치하였다. 서남 한 간은 총판아래에 역시 온돌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날이 풀렸다고 하지만 이른 시간의 화성걷기는 쌀쌀하다. 특히 동남각루는 아래로 수원천이 흐르고 있고 산마루에 각루가 서 있어 딴 곳마다 더 춥다. 이런 곳을 지키고 있을 장용외영의 병사들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이 동남각루 안에 그대로 보인다.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이 이 작은 각루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한 겨울 칼바람에서 화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잠시나마 따듯한 온돌에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방. 정조는 이 작은 각루에도 온돌방을 마련했다. 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이렇게 온돌방을 마련한 곳이 상당수이다. 그 안에 정조의 따듯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도, 단순히 국가의 정책만 개혁을 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작은 온돌방 하나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두 개혁을 위한 대왕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3호인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수원 화성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내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올해 초 팔달구민과의 대화에서 팔달문의 화성 성벽이 끊어진 곳을 빠른 기간 내에 연결을 시키겠다고 피력한 바 있다. 팔달문의 끊어진 부분이 연결되면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되기 때문에 수원화성이 제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팔달문의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수원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냈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196493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팔달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처음으로 팔달문을 보수한 것은 도광 26년인 1846년이었다. 이 해 69일부터 내린 비로 수원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북수문 아래 전돌이 떠내려갔고 문루도 무너졌으며, 남수문과 매향교까지 파괴가 되었다고 수원부 판관 겸 중군인 채학영이 보고를 한 것이다. 이때 폭우로 무너진 팔달문을 중수하고 옹성을 수보하였다.(수원부계록) 이 이후에도 팔달문은 28차례나 보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팔달문은 옹성의 문이 성문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그것은 이 팔달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거쳐 곧게 사통팔달하라는 뜻이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팔달문을 들어서야 한다. 팔달문의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220여년 전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문 앞에 성밖시장을 내탕금을 내주어 조성할 때했 정조는 이곳에 선비들을 끌어들여 선비장을 조성하면서 말총과 인삼전매권을 주어 전국 상권의 중심지로 삼았다. 팔달문 앞은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어 전국의 모든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일제 때는 모든 금융회사들이 남문 일대에 몰려들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다.

 

현재도 팔달문 앞에는 9개의 시장이 모여 수원남문시장이라는 명칭으로 통합운영하고 있다. 수원상권의 중심지인 이곳 팔달문 앞 수원남문시장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수많은 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수원화성을 관람한 후 이곳 시장통으로 몰려들고 있다. 정조가 강한 국권을 이룩하고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조성한 팔달문과 성밖시장. 그곳에 오늘도 양반상인들의 후손들이 정조의 애민정신을 지켜가고 있다.

 

벌써 새해가 며칠이 훌쩍 지났다. ‘살 같은 세월이란 말이 실감이 간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주변도 변하기 시작한다. 눈이 오고나면 화성은 변화를 시작한다. 사철 어느 계절에 화성을 돌아보던지 화성은 늘 새롭다. 철에 따라 느끼는 바가 틀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화성을 백번만 돌아보면 숨어있던 화성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꽤 많이 내린 눈이 녹기 전에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각루란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한다.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정자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로 구분을 한다. 정은 땅의 지면에 붙여지은 건물을 말하고, 루는 아래로 사람들이 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중층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가 있다. 이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지켜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동남각루는 남공심돈(지금은 유실되어 버린 화성의 구조물 중 하나이다)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으며 그 중 동남각루가 가장 규모가 작다. 이 작은 동남각루가 그 어느 각루보다 중요한 위치에 세워졌다. 동남각루는 화성에 설치한 각루 중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도 사용한 곳이다.

 

 

동남각루에 깃든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다. 화성을 축성할 때 정조대왕은 성을 일부러 설계번경까지 해가면서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화성을 쌓는 노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이나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준 것 등은 모두 정조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도 정조의 애민정신의 하나이다.

 

노역자들이 더위에 일을 한다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척서단이라는 환약을 지어 공사를 하는 인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은 그런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남각루라는 건조물 하나를 보아도 정조대왕이 얼마나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의 군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온돌방을 드린 동남각루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로 향했다. 동남각루의 중층 누각의 문을 열어 놓으면 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사방을 돌면서 동남각루를 촬영한 후 그 밑에 있는 벽돌로 쌓은 곳을 살펴본다. 동남각루 한 편에 굴뚝이 서 있다. 연도는 땅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벽돌로 삼면을 쌓은 곳이 바로 온돌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궁이도 보인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누각 위에서 쉴 수 있고, 날이 찬 겨울이 되면 온돌방에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따듯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화성의 건축물들은 대개가 이렇게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정조대왕은 꼼꼼하게 따져 계절에 따라 병사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화성을 다 돌지 않고 동남각루 하나만 보아도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다. 모처럼 돌아보려고 마음먹은 화성. 가장 먼저 눈에 띤 동남각루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과연 이 시대에 정조대왕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날이 춥고 눈이 내리는 날 동남가루는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 찾아와 사진 촬영하느라 난리

 

천안섬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흥

천안섬거리라는 민요가사에 나오는 사설의 내용이다. 이 능수는 휘늘어진 버들을 의미한다. 이렇게 늘어진 버들을 우리는 흔히 능수버들이라고 한다. 이 버들을 능수버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천안 인근에 홀아비 한 사람이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함께 살았다. 이 부녀는 비록 가난하긴 하였지만 정이 깊었다. 그런데 능소의 아버지가 변방의 수자리로 뽑혀가게 되었다. 능소의 부친은 변방으로 가다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 이상 어린 딸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주막에 딸을 맡겨 놓는다. 아버지는 딸 능소에게 '이 나무에 잎이 피어나면 다시 너를 만나러 이곳으로 올 것이다'라고 한 뒤 홀로 떠났다. 나중에 수자리에서 돌아 온 아버지를 만난 능소는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 전설이 있어서인가? 능수버들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춤을 추듯 출렁거린다. 이 계절이 되면 능수버들은 제멋에 겨워 춤을 춘다. 우리가 흔히 민요가사에서 이야기하듯 제멋에 겨워 휘늘어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이런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이 바로 수원천이다. 수원천은 정조대왕이 버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유천(柳川)’이라고도 불렀다,

 

정조대왕 버드나무를 심다.

 

예전 병조에서는 입춘(立春),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일과 땅의 기운이 왕성하다는 토왕일에 불을 만들어 각 궁에 진상하고 모든 관아에 나누어주었다. 병조에서는 봄에는 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 가을에는 갈참나무롸 느릅나무, 그리고 겨울에는 느티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취했다.

 

이렇게 각 계절마다 다른 나무를 이용해 불을 취했으며 입춘일인 봄에 버드나무를 이용해 불을 취한 까닭은 버드나무의 잎이 가장 먼저 돋기 때문에 그런 기운을 얻어 질병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조가 특히 버드나무를 좋아한 것은 왕버들이었는데 그 버드나무의 줄기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아 임금을 상징하는 ()’을 의미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버드나무를 유난히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새롭게 발견된 '신풍누도'라는 제목의 채색 그림을 보면 수원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주변에 온통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화성전도를 보아도 화성 성밖으로 온통 버드나무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강한 국권을 만들이 위함인가?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묘.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이후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대나 용주사 일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재위 15년째인 1791년이다. 그해 1571주를 심기 시작해 몇 년에 걸쳐 수차례 버드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방을 쌓은 곳에도 심게 했다. 버드나무가 물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다.

 

그렇게 버드나무를 좋아한 정조대왕이 축성한 화성답게 많은 버드나무와 관련된 명칭들이 전한다. 17일 오후, 방화수류정 인근에 지인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 수원천 가에 늘어선 버드나무가 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촬영도 하고 그 아래를 걸어가면 버드나무 잎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초록잎과 가지가 늘어진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늘어진 버드나무 하나만으로도 정조대왕을 떠오르게 만든다. 222년이 지난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버드나무는 그 당시에 심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전조대왕이 이루고자 했단 강한 국권과 백성을 사랑하는 위민정신이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늘어진 버드나무를 보면서 천안삼거리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와 먹거리 등 풍성

 

54회 수원화성문화제가 21일 전야제 행사로 타종식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22일 오후 수원화성 동장대인 연무대와 창룡문 일원을 돌아보았다. 수원화성 행궁 일원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복잡할 것만 같아 개막행사를 취재하기로 마음먹고 그 이전에 화성문화제의 다양한 모습을 취재하기 위헤서이다.

 

9월의 날씨치고는 핸 낮의 햇볕이 따갑다. 저녁 일몰 후를 생각해 긴 윗옷을 걸친 것이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날씨가 쾌청하고 좋은 날이기에 돌아보는 내내 손수건을 꺼내들고 땀을 닦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연무대 일원도 사람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닌다. 외국인들까지 출연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외국인도 적잖이 눈에 띤다.

 

연무대 국궁터 앞에서는 축성체험이 이루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찾아온 부모님들까지 거중기에 매달려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체험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창룡문 앞쪽에서는 24일 밤에 연희될 화성문화제의 하이라이트인 야조연습을 하느라 검을 이용하는 출연자들과 장창을 손에 쥔 출연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보고, 먹고,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축제

 

오늘 직장을 일찍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고 화성문화제 구경을 하기위해 수원을 찾아왔어요. 오전에는 행궁 광장에서 각종 공연 등을 관람하고 오후에는 화성어차를 타고 이곳에 와서 즐기고 있습니다. 화성 축성 현장을 직접 경험해 보니 과거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뛰어난 분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왕시에 거주한다는 정아무개(, 41)씨는 아들, 딸과 아내와 함께 한 가족 모두가 화성문화제를 즐기기 위해 수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축제는 많은 체험과 즐기고 먹고. 볼것이 많아야 된다면서 수원화성문화제는 그런 다양한 관광의 기능을 다 갖고 있는 것 같아 좋다는 것이다.

 

정아무개씨는 오후에는 연무대 일원에서 열리는 성 쌓기인 축성체험과 깃발체험을 즐긴 후에 해가 떨어지면 지동교 푸드트레일러를 방문하고 난 후 통닭거리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통닭을 먹겠다면서 일정까지 자세하게 소개를 한다. 화성문화제를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화성문화재의 꽃 야조연습도 볼 수 있어

 

연무대 앞 국궁터와 창룡문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24) 폐막공연으로 실연될 야조를 연습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연출자의 목소리는 연신 스피커를 통해 지시를 하고 있고 출연자들은 지시에 따라 병기를 들고 이리저리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기합소리와 함께 쌍검을 휘두르고 장창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는 야조 출연진들. 얼굴은 더위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지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연습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서 화성문화제 출연진들이 전국 최고의 문화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는지 가늠이 된다.

 

 

"수원 화성 일대가 모두 문화제 때문에 볼거리가 넘쳐나요. 먹을 것과 즐기고 볼 것들이 많아 화성문화제가 전국적으로 따져보아도 그 어디에도 뒤쳐지지 않는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와 함께 화성을 한 바퀴 돌고 있다는 이 아무개(, 38)씨는 수원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수원을 찾아 온 친구들도 야조를 연습하는 출연자들이 멋있다고 하면서 시간이 허락하면 야조까지 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수원화성문화제 첫날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점점 그 흥이 고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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