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 찾아온 봄을 맞이하다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묘.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이후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대나 용주사 일대를 비롯한 수원 화성 일원에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재위 15년째인 1791년이다. 그해 1571주를 심기 시작해 몇 년에 걸쳐 수차례 버드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방을 쌓은 곳에도 심게 했다. 버드나무가 물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곳

 

방화수류정이라는 명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닐기에 적합해 방화수류정이라 했던가? 41일 방화수류정을 찾았다. 매년 봄이 되면 연두색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을 보기 위해 잊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17941019일 완공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하는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 보인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절경인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봄날 방화수류정의 버드나무에 반하다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임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방화수류정과 함께 있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방화수류정 주변을 돌아보면서 봄을 마음껏 느껴본다. 용연 주변에 심은 버드나무 가지에 연두색 잎이 돋아나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린다. 이런 멋스러움 때문에 정조대왕이 이곳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 남여 한 쌍이 방화수류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다 취한다. 이 봄에 방화수류정에서 만난 수양버들만큼이나 저들도 들떠 있는가보다. 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연두색 수양버들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용연, 정조대왕이 이곳을 좋아한 까닭은 바로 이런 봄날의 멋이 아니었을까?

 

613일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요즈음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거나 아니면 페이스북 친구를 하자고 신청을 한다. 요즈음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가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무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얼마 전만 해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한 겨울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이 찬바람이 부는 날 정조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기 위함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정조는 화성 곳곳에 그런 마음을 남겨두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눈이 바람이 옷깃으로 파고들지만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서역 앞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화서역에 볼일이 잇어 찾아가는 길에 지하통로로 접어들었다.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지하통로 벽면에 화성이 그려져 있다. 화성의 돌로 쌓은 성곽이며 곳곳에 구조물들이 보인다. 봉돈, 팔달문, 포루 등을 만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니 말을 타고 장안문으로 들어가는 정조대왕을 그려놓았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인근에는 영화역이 있었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 한양의 남쪽에 소재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 <화성성역의궤> ‘연거도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횃불을 밝힌 모습이다

 

정조대왕은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전조대왕은 8일간의 행차 시 화성 가까이에 오면 황금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강한 왕권의 상징이다. 그런 정조대왕이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아마 장안문일 것이다. 벽화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그림 하나를 보면서 과거 화성으로 행차를 했던 정조대왕의 위엄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수원의 많은 벽화그림이 있지만 이렇게 화성과 정조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치않다. 짧은 이 지하통로 벽화가 더 살갑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된다. 그 남북으로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상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과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성문 양편에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강화부의 화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홍이포

 

홍이포는 남만대포(男蠻大砲)’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으며,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 ~ 5km 유효사정거리는 700m 인 전장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홍이포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1664년이다. 당시 강도어사 민유중이 병자호란 이후, 강화부의 미곡과 화기에 대한 보유 상황을 조사하는데, 그 목록에 남만대포라는 화기가 등장한다. 당시 강화부의 화기류는 현종개수실록현종56월 계축조에 의하면, 진천뢰 140, 대완구·대포·중포가 65, 소완구 30, 호준포 37, 각 보에는 대포 179, 진천뢰 63, 남만대포 12, 불랑기 244좌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남만대포 12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남만대포인 홍이포는 12좌로 다른 화기보다 수가 적기는 하였지만, 남만대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전래한 서양포에 대해 일반적으로 불랑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화성의 홍이포는 영조 때 우리가 만들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이는 붉은 오랑캐라는 말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뜻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중국 명에 전해진 서양대포를 말한다고 했고,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으로 전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영조79월 신사조에 기록된 훈련도감의 보고 기록에는

본국(훈련도감)에서 새로 마련한 동포(銅砲)50이고, 홍이포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입니다. 동포의 탄환거리는 2천여보이며, 홍이포의 탄환거리는 10여리나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예람하시도록 올리니 강동한 자들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양편에 적대를 만들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에 놓인 홍이포.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한 홍이포가 아닌 영조 때 우리기술로 만든 홍이포. 사정거리가 700m에 이르는 이 홍이포의 위력이야말로 화성을 지켜내는 화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을 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이 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지금은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구조물 중 이렇게 독단적으로 조성된 구모물이 상당히 보인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가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아름다운 공심돈에 매료당하다.

 

서북공심돈은 1796310일에 완공을 하였으며,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공심돈 위에서서 주변을 돌아보며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공심돈 하나를 갖고도 화성은 천하무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동북공심돈이 개방될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핀 적이 있었다. 성 밖은 물론 성 안의 연무대, 창룡문 등은 몰론 멀리 주변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오직 수원화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심돈.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막강한 화력을 얼마나 대단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6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을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됐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올린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횃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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