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일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요즈음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거나 아니면 페이스북 친구를 하자고 신청을 한다. 요즈음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나오는 이야기가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무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얼마 전만 해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한 겨울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이 찬바람이 부는 날 정조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기 위함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정조는 화성 곳곳에 그런 마음을 남겨두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눈이 바람이 옷깃으로 파고들지만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서역 앞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화서역에 볼일이 잇어 찾아가는 길에 지하통로로 접어들었다.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지하통로 벽면에 화성이 그려져 있다. 화성의 돌로 쌓은 성곽이며 곳곳에 구조물들이 보인다. 봉돈, 팔달문, 포루 등을 만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니 말을 타고 장안문으로 들어가는 정조대왕을 그려놓았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인근에는 영화역이 있었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 한양의 남쪽에 소재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 <화성성역의궤> ‘연거도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횃불을 밝힌 모습이다

 

정조대왕은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전조대왕은 8일간의 행차 시 화성 가까이에 오면 황금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강한 왕권의 상징이다. 그런 정조대왕이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아마 장안문일 것이다. 벽화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그림 하나를 보면서 과거 화성으로 행차를 했던 정조대왕의 위엄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수원의 많은 벽화그림이 있지만 이렇게 화성과 정조를 만날 수 있는 곳은 흔치않다. 짧은 이 지하통로 벽화가 더 살갑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