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동로면에서 충북 단양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도로변에,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무송대(舞松臺)’라고 부른다. 춤을 추는 소나무가 서 있다는 곳이다.

 

이 춤추는 소나무를 보면 어떻게 소나무가 저렇게 자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지들이 마치 사람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이리저리 휘어진 가지들이 춤을 추는 동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춤추는 소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말무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무송대 한편에는 말무덤(=馬塚)이라고 작은 돌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작은 봉분이 하나있다. 이 말무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우리나라로 귀환한 명 지관인 두사충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두사충은 조선조의 문신인 약포 정탁대감에게 큰 은혜를 입어, 그 보답으로 정탁대감의 신후지지를 보아두었다. 신후지지(身後之地)란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말한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줄기가 문경지방에 와서 황장산(1,077m)을 비롯한 무수한 명산을 잉태한다.

 

 

 

그리고 이 동로면의 적성마을은 묘터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옥관자 서 말, 금관자 서 말이 나온다는 연주패옥(連珠佩玉)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 들린 두사충은 명당 터를 잡아놓고 그 위치를 구종에게 알려놓았다고 한다. 얼마 후 정대감의 아들과 함께 온 구종이 묘 자리를 알려주자, 말이 뒷발질을 해 구종이 죽고 말았다.

 

아직도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져

 

정대감의 아들은 화가 난 말을 죽여 이곳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연주패옥의 명당은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더욱 아직도 이 일대에는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죽음 후에도 자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가보다.

 

 

무송대의 춤추는 소나무와 말무덤. 길가에 서 있는 이러한 나무 한 그루에도 우리들은 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길을 가다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릴 수도 있는 춤추는 소나무. 그 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멋이 깃들어 있다.

수원 행궁 - 화서문 뒷골목에서 만난 이야기들

 

뒷골목을 걷다가 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우중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뒷골목에는 의외로 이야기꺼리들이 숨어 있다. 요즈음 수원의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에 푹 빠진 것도, 그런 재미를 붙여서이다. 그리고 그 뒷골목에서 만나는 음식 한 가지 정도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 덤으로 붙어 온다면 그야말로 재수있는 날이란 생각이다.

 

어제 줄기차게 퍼붓던 비가 밤늦은 시간에 그쳤다. 오늘은 모처럼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이런 날이면 좀이 쑤셔 붙어있을 수가 없다. 수첩과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뒷골목을 찾아 나섰다. 화성 행궁 앞에서부터 화서문까지 가는 골목길은 고작 700m 정도이다. 그 안에는 어떤 모습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장님 하늘에서 우리학교를 지켜주세요‘

 

행궁 앞을 벗어나 화서문 쪽으로 길을 시작하면 신풍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앞으로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해바라기와 수세미, 호박 등이 달려있는 커다란 화단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잘 가꾼 텃밭이 있다. 신풍초등학교는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그런데 그 담장에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 신풍초교 동문이신 고 심재덕 시장님, 116년 역사 이 학교 하늘에서 꼭 지켜주세요’

 

이런 문구가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116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신풍초등학교가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옮겨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풍초등학교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학교다. 1896년 수원군 공림소학교로 개교하여, 일제 수난기와 6·25사변을 거치면서 도내에서는 최초로 초등교육의 뿌리를 내린 터다.

 

 

 

수원교육청 앞에는 심심찮게 신풍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학교자리는 원래 화성행궁이 서 있던 곳이다. 행궁 복원을 시작할 때부터 이전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학부모와 선생님들, 그리고 동문들까지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 행궁의 복원도 생각해보아야 할 국책사업이다.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야기꺼리는 찾아보면 되는 것이지

 

짠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외형상으로는 지저분한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수원시에서 매입을 하여 부수려던 건물 하나를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준 곳이다.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은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 건물 벽에는 작은 그림 도판들이 빼꼭 들어차 있다. 그것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좌측으로 난 차도를 따라 걸으면 화령전 솟을 문이 나온다.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이다.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화령전 앞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마도 신풍초등학교 아이들인 듯하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모여서 번호를 따라 외발로 뛰는 놀이가 재미있다. 그런 놀이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걷다가 보니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넝쿨이며, 대문 앞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들이 보인다. 그 또한 길을 걷는데 감초역할을 한다.

 

고추 화분이 놓인 집 대문간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주의 소독함‘, 얼마나 지나가면서 고추들을 따가기에 이런 푯말가지 붙여 놓았을까? 남의 고추를 말도 않고 따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길 끝에서 만난 초가집, 선술집이 따로 없네.

 

길 끝에 화성이 보인다. 꺾인 길을 돌아서니 그 끝에 초가집 한 채가 보인다. 주인장의 말로는 한 30여년 정도 된 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을 판다. 그야말로 화서문과 어우러진 선술집처럼 느껴진다. 낮 시간이라 술을 한 잔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붙어있는 가격표가 재미있다.

 

뒷골목, 난 왜 침침한 뒷골목이 좋은지 모르겠다. 혼날 말이지만 뒷골목은 낙후된 곳일수록 정겹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보다. 그 뒷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역시 난 뿌리부터가 서민인 듯하다. 하기야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거들먹거려보았자. 땅 속에 들어가면 한 줌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아침부터 참 지겹게도 쏟아 붓는다. 잠시 길을 걸었을 뿐인데,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한다. 비가 내리면 좁은 뒷골목을 다니면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일부러 맞고 다녔다. 아마 그런 어릴 때의 기억이 있어, 이상하게 뒷골목에 정이 더 가는 것만 같다.

 

사실 뒷골목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높지 않은 담이 만들어주는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훈수를 막아가며 장기를 두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할머니들이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곁에서 듣다가 보면, 어느새 손녀는 잠이 들어버린다.

 

 

 

그림들의 이야기가 있는 지동 뒷골목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화성을 바라보며 마을이 형성이 되어있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지나 게이트볼장을 끼고 걷다가보면, 골목 담장에 그림들이 보인다. ‘지동 벽화길’이란다. 이곳은 추억의 골목길 축제를 여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길 축제'란 그야말로 골목길에서 열리는 축제를 말한다.

 

2011년 ‘지동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해 8월부터 ‘수원화성과 지동 골목길 반가운 동행’이라는 주제로, 시범골목 약 1km의 구간에 골목의 특색을 살린 벽화 그리기와 조형물들을 설치하였다. 이 지동 뒷골목의 벽화그리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이 그림들이 다 완성이 되고나면, 수원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으려는지.

 

 

 

돌계단을 내려 서 천천히 벽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벽에는 수많은 군상들을 만날 수가 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조형을 하고 화장을 한 벽들이,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한 벽에는 거울을 여기저기 붙인 곳도 있다. 지나는 행인들이 자기 키에 맞추어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인가 보다.

 

“할머니 거기 문 없는데, 어쩌시려고”

 

여기저기 작은 의자와 아름답게 그린 그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누군가 담벼락에 커다랗게 초가 집 한 채를 그려 놓았다. 아마도 그런 시골마을의 초가집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천천히 골목을 지나본다. 어릴 때 살던 서울의 집도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벽을 참 다람쥐처럼 타고 오르기도 하고, 성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가끔 이 골목을 걷는다.

 

 

지난 해 골목축제 때 모습이다

 

어느 집인가는 벽에 커다랗게 화성을 그려져 있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골목을 걷는데 웬 할머니 한분이 계단을 올라 벽 앞에 서 계시다. 그런데 벽에 문이 보이질 않는다.

 

“할머니 거긴 문이 없는데 어쩌시려고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신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귀가 어두우신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으시다. 이런 나를 지나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신이상자로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피식 웃는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어째 이런 재미있는 뒷골목 길을, 그렇게 골목에 샛바람 지나듯 휑하니 가버리는 것일까?

 

 

 

오랜만에 지나가본 길에는 그림이 더 늘었다. 어느 집 담에는 예쁜 의자도 함께 마련을 해주었다. 이런 작은 뒷골목에 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더운 날씨 탓인가 기척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걸어 온 골목길을 뒤돌아본다. 벽 앞에 선 할머니는 아직도 꼼짝 않고 그곳에 서 계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번지에는 ‘대안공간 눈’이라는 곳이 있다. 눈을 들어가기 전에는 ‘골목집’이라는 간판을 붙인 밥집이 자리한다. 이 밥집은 막걸리 등 술을 팔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 집을 이용할 때는 주로 늦은 시간이다. 모임을 이 집에서 자주 갖기 때문이다.

 

여름 낮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찾아간 이 골목길은, 밖에서 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좁은 골목과 골목이 연결이 되는 이 길은 지난해부터 벽화를 그리고 있다. 그저 무료하고 답답한 벽에 여기저기 그려진 벽화들은, 좁은 골목길의 답답함을 가시게 해준다. 그래서 이 골목을 다니는 것이 때로는 큰 재미를 준다.

 

 

 

“이놈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

 

골목길을 들어서면 굳이 골목집을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벽에 골목집의 분위기가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안공간 눈을 지나 골목이 좌우로 갈라진다, 일부러 좁은 골목을 잠시 들려본다. 담장이와 벽화가 마주하는 좁은 골목길로 행인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어디 옛날 문화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모습이다.

 

우측의 큰길가로 나가본다. 전깃줄 위에 참새와 같이 아이들이 앉아있다. ‘이 녀석들 위험하다. 얼른 내려와라’ 하고 소리를 쳤더니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보니 이 녀석들 등 뒤에 날개를 달았다. 백주 대낮에 어린 천사가 내려와 지나는 행인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아마도 이 벽화를 그린 화가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 나오다가 보니, 길바닥에 ‘로맨스 길’이라고 자갈을 이용해 글을 써 놓았다. 이곳이 왜 로맨스길이 되었을까? 하긴 옛날 같으면 이 길을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남몰래 수상한 짓을 했을 것도 같다. 더구나 해질녘 땅거미가 내리 앉을 때면, 슬그머니 입맞춤이라도 해보고 싶었을 그런 골목길이다.

 

 

 

1950년대로 돌아가는 골목길

 

이 길은 아직도 1950년대를 연상케 하는 골목길이 남아있다. 아마 언젠가는 이곳도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이 길을 걸으면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낡고 습한 이런 골목이 무엇이 좋으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라는 것에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좁디좁은 이 길에는 사람들의 땀 냄새가 폴폴 풍겨난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시멘트 건물에서 쏟아내는 후텁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아니다. 골목 저편 어귀에서 꺾인 담벼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이 그리도 고마운 길이다. 큰길가로 잠시 돌아 나온다. 그 곳에 엊그제 내린 비로 인해 수원천의 물소리가 시원하다. 그 물소리에 잠시 마음을 흔들어 씻은 후, 다시 골목길을 향한다.

 

 

 

조금은 주변이 달라진 듯한 길을 지나서, 옛날 장거리였을 법한 곳에 닿는다. 낡은 간판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좋아라한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한 마음이다. ‘부여집 5-3164’라는 전화번호가 보인다. 그 옆에 또 하나 ‘허가번호 제2-20○○’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아직도 1950년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거리 향토유적이라도 지정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찻길을 건너 통닭거리로 들어간다. 요즈음은 이 골목 끝에도 통닭집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뒷골목이 재미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또 다른 볼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붉은 선 안이 골목길을 돌아본 곳이다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것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래도 끈끈한 정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곳. 뒷골목을 걷는 것은, 그 곳에 또 다른 삶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4대강 사업에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4대강 사업은 꼭 해야 할 국책사업이라고 홍보를 했고,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일부 인사들을 불러들여 4대강 사업이 엄청난 이득을 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물론 4대강 사업에 구간 공사를 맡은 대기업들이나, 일부 주변 땅 장사들은 이득을 보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홍수와 가뭄에 대비한다는 이 4대강 사업은, 그들 말대로 그렇게 홍수와 가뭄에 대비를 할 수 없는 무늬만 현란한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4대강 공사 전 굴암리 강길을 걸으면서(2010, 2, 9)

 

찜통더위에 타들어가는 농심

 

10일이 넘게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장마 때 내린 비로 물줄기가 형성이 되었던 계곡도 다시 말라 들어가고 있다. 낮에는 더위로 인해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농사꾼들은, 저녁 7시 경이 되면 모두 논과 밭으로 달려간다. 논과 밭에 ‘물대기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8월 5일(일) 오후 8시,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논과 밭에는 어르신들이 연신 말라가고 있는 개울에서 모터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고 있다. 논과 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이다. 이 마을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기에 지하수를 이용하는데, 일부 주민들은 식수가 마를까봐 그것도 걱정이라고 한다.

 

해돋이 길을 걸으면서 본 남한강은 정말 아름다웠다(2010, 3, 28)

 

장마가 끝나고 난 뒤 개울을 꽉 채우고 흐르던 물줄기는, 이제 겨우 한 구석을 따라 흐르고 있다. 조금이라도 물이 고여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호스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저녁 늦게 물을 대기 위한 ‘물대기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가뭄대비는 무슨, 새빨간 거짓말이야”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어둑해지는 시간에 개울가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길가에는 여기저기 차들이 서 있다. 모두 논과 밭에 물을 대기위해 나온 사람들이다. 타들어가는 논바닥을 바라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쉬고 있다. 봄철 내내 심한 가뭄으로 타들어간 농심은, 이제 다시 이 찜통더위에 타고 있다.

 

“물이 부족한가 봐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 하러 이 시간에 나와 이 짓을 하겠소. 지금이 논에 물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이렇게 논도 밭도 다 말라가고 있구먼.”

“비가 안와서 걱정이네요”

“비가 며칠 내로 오지 않으면 그나마 이 개천 물도 다 말라버릴 테고, 정작 그 다음이 문제지. 돈 들여 4대강인지 먼지 해놓고, 물 걱정 하지 말라고 하더니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지”

 

이포나루,터, 옛날 노산군(단종)도 이곳을 이용해 영월로 향했다

 

어르신은 자신들이 무엇을 알겠냐고 한다. 그저 4대강 개발을 하면 가뭄걱정 홍수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 4대강 중 보를 세 개씩이나 만든 남한강이 멀지 않은 곳에 흐르고 있고, 그 물을 이용해 물 걱정 안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가뭄걱정으로 이렇게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는 것.

 

넘쳐나는 강물은 그림의 떡

 

지난 5~6월 봄 가뭄 때도 남한강에는 물이 넘실대는데, 인근의 나무들은 말라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가뭄대비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22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조성한 4대강 사업. 그 중 남한강 3개보를 건설한 곳 여주. 요즈음 여주 사람들 중에는 4대강 사업이 허구라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눈앞에 가득 차 흐르는 4대강을 보면서, 속만 더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다.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개천에 있던 어르신은, 허리를 두드리며 자조 섞인 한 마디를 한다.

 

신륵사 앞 바위에 모여있는 중대백로(2010, 2, 2)

 

“전부 천벌을 받아야지. 그래야 다시는 이런 짓거리들을 하지 않을 것이여. 강을 깊게 파놓아 오히려 물이 그리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강물이 지천에 있는 여주읍 천송리에 지어놓은 여성회관 앞에 가봐, 올 봄 가뭄에 나무들이 다 말라 새빨갛게 타 죽었어. 그게 남한강이 가뭄에 대비한 것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이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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