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대야면 죽산리에는 탑동마을이 있다. 탑이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익산 황등에 일이 있어 들렸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탑동마을을 찾아갔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층석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백제탑을 많이 닮은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백제 때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탑은 대웅전의 앞에 서 있던 탑이라는 것이다. 이 탑에는 근처에 있는 건장산 약수와 함께 전설이 전하고 있다. 탑을 보러갔다가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는, 괜히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글을 쓸 때마다 현장답사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 가지 기사거리가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남녀의 시합이 병을 불러

 

이 탑동 삼층석탑을 쌓은 것은 이 마을에 살던 여자장사라는 것이다. 이 탑골에는 여자장사가 살고, 마을 뒤편 장자골 마을에는 남자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가끔 이런저런 시합을 하였는데, 두 사람이 탑을 쌓은 후 그것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어트리는 시합을 하게 되었단다. 여자장사는 지금의 탑동 삼층석탑을 세우고, 남자장사는 자신이 사는 장자골에 석탑을 쌓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하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며, 두 사람의 시합으로 인해 잔치가 벌어졌다. 탑을 다 쌓고 난 후 여자장사는 남자가 쌓은 장자골의 탑을 한 번에 밀어서 넘어트렸단다. 그런데 남자장수는 여자장사가 쌓은 탑골의 탑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당시 탑골에 사는 여자장수가 쌓았다는 탑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합을 하고 난 후 여자장수의 늙은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온 몸이 시커멓게 짓무르고 죽을 것 같은 피부병에 걸리자, 여자장사는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피부병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피부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죽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100일기도를 한 여자장사

 

탑골 여자장사는 어머니가 죽을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을에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자장사가 무너트린 장자골 탑의 혼이 어머니에게 씌워서 그렇게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여자장사는 탑골 자신이 쌓은 석탑 앞에 꿇어앉아,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100일 동안 정성을 드렸다.

 

 

여름철에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여자장사는 꼼짝 않고 탑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100일 째가 되던 날 천둥번개가 치더니 혼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건장산 골샘약수를 먹이면 피부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여자장사는 그길로 골샘약수로 달려가 물을 떠다가 어머니에게 먹이고, 그 물로 온몸을 씻어드렸다. 그랬더니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골샘약수를 마셔보다.

 

마침 주민 한 사람이 탑이 있는 곳으로 자나간다. 약수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날은 춥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약수를 빠트릴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런 전설을 간직한 약수라면, 한모금은 먹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탑 뒤로 난 길을 따라 약수를 찾아 나섰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산길로 잡아든다. 공기가 맑다. 심호흡을 하면서 대나무 숲을 지나고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아래로 약수터가 보인다. 내려가 보니 그 추운 날인데도 약수는 얼지가 않았다. 옆에 걸린 바가지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셔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이 물을 마시고나면 웬일인지 속이 깨끗해질 듯하다.

 

 

약수를 마시고 동네로 내려오니 마을에도 우물이 있다. 우물체험도 한다고 적혀있다. 골샘약수는 최근에도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보면 가끔 이런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전국 어디를 가나, 우리들을 가르치는 전설 한마디쯤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전설이, 그저 전설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 안에 숨은 깊은 속내는 사라진 채.


 

2박 3일, 짧은 시간 동안 기나 긴 여행을 했다. 금요일은 공포라고 했던가. 그러나 난 그러한 것은 애당초 염두에 두지를 않는다. 우리 전통에서는 금요일도 아무런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장사꾼들의 상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박 3일 동안 소득을 정리해본다. 중요민속문화재 4점, 사적 2점, 천연기념물 2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그리고 지방문화재자료 3점. 이 정도면 2박 3일의 답사치고는 꽤나 짭짤한 소득이란 생각이다.

 

상주를 거쳐 차 한 대 만나지 못하는 산길로 접어들어, 충북 영동으로. 영동을 출발해 무주, 진안을 거쳐 남원. 남원에서 전남 구례를 거쳐 보성 벌교. 벌교에서 보물인 벌교 홍교를 촬영한 후, 다시 목포로. 그리고 무안을 거쳐 정읍, 곰소, 그리고 다시 여주로 돌아오면서 2박 3일간 총 1340km가 넘는 대장정을 마쳤다. 그리고 그 답사의 끝은 꽃무릇으로 명성을 얻은 전남 함평 해보면의 용천사였다.

 

  
용천사 사천왕문 앞에 있는 단풍나무. 붉다 못해 빨강 물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용천사에서 본 것은 꽃무릇이 아닌 단풍이다. 마지막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단풍. 그것은 단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울음이었다. 그 아름다운 색. 어찌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색이 아닌, 어느 신선이 그림을 그리려고 물감을 들고 가다가 엎어놓은 색. 만색(晩色)이 한 폭의 그림 안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이것을 색이라고 표현을 하겠는가.

 

단청 그리고 단풍. 단청도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단청이 고개를 숙였다

  
늦은 가을산의 단풍. 그것은 차라리 눈물이었다
 


용천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정작 용천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입바른 소리다. 가을, 그것도 가을. 단풍철이 지난 다음 용천사를 가보라. 진정한 단풍은 그때 용천사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을에 용천사를 찾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용천사에는 진정한 가을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좋다. 오래도록 보다가 눈물 한 둘기가 흐르면 더욱 좋다. 그것이 용천사의 가을 단풍이다.

  
초록과 붉은 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뛰는 단풍. 보다가 보다가 눈물 한 줄기가 덜컥 볼을 타고 내린들 어떠하리. 용천사의 초록색 무릇과 붉은 단풍이 연애를 한다. 그래서 용천사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용천사의 단풍

  
산길, 바위와 낙엽, 그리고 무릇과 단풍. 그저 말 한마디 안해도 드 안에 온갖 이야기가 다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저 아무말 없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다 이루어지지 않을까? 숨 한번 쉬지 않아도, 같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긴 여정을 마치고 당도한 곳에서 진정한 가을을 만난다.

 

혼자 남은 단풍이 자태를 자랑한다. 그래서 흐드러진 것 보다, 다 아름다운 단풍이다,

 

누가 자연을 논하랴. 어느 누가 그 자연을 감히 세치 혀로 논하랴. 자연을 늘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늘 그 자리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왔다. 어느 순간,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아니라고 한들, 자연이 인정을 할까? 괜히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은, 이 자연속에 나를 파묻는 것이거늘. 2박 3일의 여정의 끝에 난 자연으로 돌아간다.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e수원뉴스 시민기자와 담당자 등 30여명이 떠난 ‘시민기자 워크숍’.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니, 꽤 많은 양의 사진을 찍었다. 700여장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 안에 꽤 그럴 듯한 풍경이거나, 아니면 시민기자들이 놓친 곳들도 있어, 내 나름대로 10경을 정해본다.

 

사실 이렇게 워크숍을 떠나, 2박 3일을 돌면 나는 나름대로 녹초가 된다. 쉴 새 없이 찾아다니고, 사진을 찍어대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딴 분들은 몰라도 이미 20년이 넘게 우리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헤맨 나이기 때문이다. 장서에는 3,000여장의 CD에,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을 퐐영한 자료들로 차 있다.

 

 

 

먼저 걷고 돌아본 이번 워크숍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단체가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만큼 더 열심을 내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혼자 미친 듯 돌아다닌 답사 길에 미안함이 조금 가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해설사의 설명 중에는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 모르고 있던 부분도 있다. 이참에 꼭 한마디 할 만은 해설사들이 너무 오래 사람들을 붙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많이 보아야 할 사람들이다. 시민기자들도 기자이다. 기본적인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는 분들을, 생 초보 다루듯 해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가?

 

사실 난 어디를 기거나 해설사들의 설명은 일체 거절하는 편이다. 문화재 기사를 20년 넘게 써 온 사람으로서, 그 해설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 느낌을 글로 쓰는 나에게는 사실 해설을 듣는다는 것 자체도 부담이 된다. 이번 워크숍에서도 먼저 뛰고, 하나라도 더 취재해야 하는 나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사비를 드려 통영을 가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정한 워크숍에서 만난 풍광 10경

 

이번 2박 3일간의 워크숍 기간 중 해설사의 안내로 돌아본 시민기자들이 놓친 부분도 있을 테고, 함께 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10경을 선정해보았다. 제일먼저 전주 한옥마을의 지붕이다. 해설사가 안내하는 길로 따라갔다면, 이목대를 오르는 길에 있는 포토죤을 만날 수가 없다. 지붕과 지붕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한옥마을의 지붕은, 사진을 찍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입구 건너편, 명정동 194번지에 자리한 ‘정당샘’이다. 이 샘은 1670년 제51대 통제사인 김경이 팠다고 전해진다. 충렬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이 샘은 처음에는 하나를 팠는데 물이 탁해, 또 하나를 곁에 팠더니 믈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샘 이름은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고 붙이고, 일정은 충무공 향사에 사용하고, 월정은 주민들이 사용했다. 이 두 물을 합하여 ‘명정’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곁으로 시체나 상여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여, 지금도 이 우물곁으로는 상여가 지나지 못한다. 햇볕을 받지 않으면 물이 흐려진다고 하는 명정은, 우물을 보호하는 지붕을 덮지 않고 있다. 한번은 그 위에 팔각정을 지었더니, 마음에 돌림병이 돌았기 때문이란다.

 

두 번째는 사적 제402호인 통제영지 내에 있는 국보 세병관 동편 문밖에 서 있는 비석군이다. 통제영지는 통영시 문화동 602번지 일원에 있는 삼도수군 통제영의 본영이다. 당시에는 100여 동의 전각들로 차 있었다고 하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는 현재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장원홍예문,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통제영지를 복원 및 보수를 하느라 부산하다. 세병관 동편 작은문을 나서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비석군들. 출입을 시키지 않아 일일이 확인을 할 수가 없지만,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 등이 아닐까 한다. 그 밑으로는 전각 안에 비가 하나 서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12호인 ‘두룡포 기사비’이다.

 

이 기사비는 통제사를 지낸 이경준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 사적비로, 조선조 인조 3년인 1625년에 제16대 통제사인 구인후가 세웠다. 이경준은 제5대와 9대 두 차례 통제사를 지냈으며,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무장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동피랑벽화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영항의 안편 강구안에 정박한 거북선과, 그 거북선이 있는 강구안의 저녁노을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돌아본 전주와 통영에서 만난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충무공 유적을 돌아보다

 

세째 날인 14일, 통영유람산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사적 제113호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한 이곳은 선조 25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에서 왜선을 섬멸한 후, 선조 26년부터 30년인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두억포에는 임진왜란 때 전함인 판옥선과 척후선 등 1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740여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들어서면 해안가로 길게 제승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 바닷길에 서서 물을 바라보면 물속 바위에 하얗게 달라붙은 조개껍질이 보인다. 이 또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었다. 제승당 곁에 서 있는 수루에 올라가면 한산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만으로, 이곳은 안쪽은 넓고 입구가 좁다. 이 한산만은 수심이 낮아 소형선박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과 낮은 수심, 여기저기 만과 포구들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한산대첩의 승리를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아홉 번째는 제승당 안에 있는 적송들이다. 적송은 우리의 소나무로 나무가 단단하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소나무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목재감이다. 이러한 적송이 유적지 안에 숲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의 아름다움 또한 멋지지 아니한가? 유적지 관람 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 뒤편에는 갈매기들이 따라붙었다.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기 위해 따라오는 갈매기 떼.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물길과 허공을 비상하여 과자를 따라 물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갈매기들. 그렇게 전주와 통영의 워크숍에서 만난 광경들은, 앞으로도 한참이나 기억될 것만 같다.

 

벌써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매일 창을 열어야 잠을 자는 열 받은 사내는

이 계절이 좋습니다. 조금은 더위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 게절이 되면 등짐 하나 메고 떠나고 싶어집니다

아무데라도.....

올해는 단풍구경이나 하러 가렵니다.

미리 보는 단풍입니다.

지난 해 모악산을 오르는 길입니다.

 

 

 

 


'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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