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 집만큼 아름답고 정리가 반듯한 집은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안성 남사당의 발상지이기도 한 청룡리는, 청룡호수를 끼고 들어간다.

 

방죽에 난 다리를 건너 고찰 청룡사를 항해 들어가면, '타라'라는 카페를 좌측에 두고 들어간다. 조금 더 가면 '풍물기행'이 보이고, 그 옆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이해룡 고가가 있다.

 


 

안채의 상량문을 통해 정조 2년인 1797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 이해룡 고가는,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고택이다. 앞으로는 초가로 된 대문채를 - 자로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낀 사랑채를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 형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어 ㄷ 자 형이다. 전체적으로는 한 쪽이 삐쳐 나온, 튼 ㅁ 자 형이다.

 

안담으로 구분한 대문채와 행랑채

 


대문과 방, 그리고 부엌으로 꾸며진 대문채. 행랑채와 - 자로 되어 있으며, 안담으로 구분을 한다.


최근에 개축이 된 행랑채.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으며, 모두 다섯 칸으로 꾸며졌다.

 

초가로 꾸민 대문채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 자로 구성되었다. 대문채는 한 칸의 방과 부엌 그리고 대문으로 꾸몄는데,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다. 행랑채는 최근에 새로 꾸몄다고 하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을 경계로 해서, 대문채와 구별이 되었다. 행랑채는 모두 5칸으로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다.

 

행랑채는 네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담장을 낀 세 칸의 방 앞에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새로 개축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해룡 고가는 대문채부터 남다르다.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 생각이 난 것은, 꼭 한 번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럴 정도로 이해룡 고가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고택들과는 차이가 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이해룡 고가는 집 전체를 놓고 볼 때 군더더기가 없이 말끔하다는 것이다.  

 

중문을 붙들고 있는 사랑채

 


청룡호수와 충북 진천으로 너어가는 산을 바라보고 있는 행랑채. 중문을 끝에 달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 그저 화려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았다. 앞쪽의 청룡호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자리 잡은 이해룡 고가의 사랑채는, 호수와 산을 모두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해룡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도,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여 놓았다는 점이다.     

 

이 집은 사랑채에 중문이 달려있다는 점이 남다르다.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이 사랑채의 끝에 자리를 한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으로 꾸며졌으며, 남쪽으로는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이 있다.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이 온돌방에 불을 떼는 아궁이가 대문 안에 있다. 툇마루는 사랑채 앞쪽에 전체적으로 넓게 깔았으며, 북쪽의 마루방은 안채의 건넌방과 연결이 되어 있다.       

 

깔끔한 안채의 구성

 


안채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이어져 있다. 툇마루를 높임마루로 하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이해룡 고가의 대청은 꾸밈이 없이 시원하게 두 칸으로 마련하였다.


안방과 부엌. 두 칸으로 낸 부엌은 넓은 까치구멍을 내어 시원하게 보인다.

 

지은 지가 220년이 지난 이해룡 고가. 물론 그동안 많은 보수를 하였겠지만, 이 집만큼 깔끔하게 느껴진 고가는 처음이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졌다. 사랑채와 연결이 된 건넌방은 앞에 높은 툇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두 칸의 대청은 시원하게 트였는데, 겨울철의 바람은 - 자로 놓여있는 행랑채가 막아줄 것 같다. 조금 높게 자리를 한 안채는 건넌방, 두 칸 대청, 그리고 안방에서 꺾어 두 칸의 부엌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문 쪽을 판자벽으로 막았으며, 앞뒤로 낸 까치구멍은 창살을 넓게 띠어놓아 시원해 보인다. 안방의 뒤에는 작은 툇마루를 놓았을 뿐, 여느 집에서 보이는 많은 툇마루는 보이지를 않는다. 이렇게 뒤로 복잡하게 낸 툇마루가 보이지를 않아, 집 전체가 말끔하게 보이는가 보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의 뒤로는 기와로 꾸민 키 작은 굴뚝이 서 있다. 이렇게 뒤뜰에 나란히 서 있는 굴뚝이, 자연스럽게 이 집을 꾸며내고 있다. 집의 구성이나 배치가 참으로 단아하다. 집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고 했다던가,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막돌로 쌓아올린 우물과 담, 최고의 멋

 


안채 부엌 뒤에 자리한 우물. 돌을 막 쌓기를 하였다. 너와 지붕이 인상적이다.


 막 쌓기를 한 우물 안에 두레박이 걸려있다

 

안채 부엌의 뒤로 돌아가면 너와로 지붕을 얹은 우물이 있다.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달려있는 것이 운치를 더한다. 그런데 이 우물을 쌓은 것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물은 돌을 정리를 하고 백회 등으로 바르는데, 이해룡 고가의 우물은 그냥 돌을 막 쌓기를 했다. 우물 안도 역시 마찬가지다. 흡사 멀리서보면 돌무지처럼 보인다.

 

하나의 우물이 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도 마찬가지다. 마치 축성(築城)을 한 듯, 돌로 담장을 쌓았다. 전체적으로 이해룡 고가는 정형화를 시키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석 재료를 이용한 집의 건축방식.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집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 내가 한옥 집을 짓는다고 하면, 이해룡 고가와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다.

 


안채의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키 작은 굴뚝. 굴뚝이 이해룡 고가를 더욱 편안하게 해준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성 청룡리의 이해룡 고가. 언제인가 아주 오래전에 남사당에 대한 책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이 곳 청룡리를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때 만나 뵌 어르신이 바로 이 집에서 사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남사당패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러고 보니 이 집과는 꽤 오래 된 인연이 있었던 것만 같다.

 

사랑방 대청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내다본다. 이 집의 사랑채가 왜 이리 앉았는지 알 것만 같다. 청룡호수의 물안개와 진천으로 넘어 가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리는 날, 다시 한 번 찾고 싶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때론 참 행복한 일이다. 너무 허기가 진 상태에서는 오히려 음식의 맛이 반감이 된다고들 한다. 그래서 대충 배가 고파지기 시작할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이 있다는 것. 그런데 배가 고프지 않은 데도 음식이 맛이 있다면, 그야말로 정말 맛이 있거나 혹은 특별한 음식일 것이다.

 

나란 인간이 워낙 맛집 블러거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인 맛집 전문 블로거들의 글을 늘 보기는 하지만, 그렇게 정성을 들여 리뷰를 작성하지 못한다. 그저 답사를 다니다가 배가 고파 식당에 들렸는데, 우연히 그 집 음식 맛이 좋으면 먹다가 사진 몇 장을 찍어 올리는 것이 다이기 때문이다.

 

 

‘짬뽕 한 그릇 먹자고 거기까지 가’

 

태풍이 올라온다고 난리들을 피우는 날인 8월 27일 갑자기 강원도에 볼일이 생겼다. 일을 하다말고 부랴부랴 챙겨서 강원도로 달려가 일을 보고 난 후, 아침을 든든히 먹었는데도 속이 출출하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었고 하니 밥을 먹어야 하는데, 동행을 한 분이 ‘짬뽕을 아주 특별하게 잘 하는 집’이 있다는 것이다.

 

전날 먹은 술로 인해 숙취도 가시질 않았겠다. 고성군 공현진에 있다는 중국집을 찾아갔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고성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죽왕면 소재지를 지나 좌측에 철새도래지인 송지호가 보인다. 그곳을 조금 지나치면 일출이 아름답다는 공현진리가 나오고, 마을 안 찻길이 휘어지는 곳 좌측에 ‘수성반점’이 있다.

 

 

 

 

이 수성반점의 짬뽕이 바로 추천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허름한 길가 중국집에서 무슨 특별한 요리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자 비좁고 날이 더우니, 길가에 있는 평상에서 먹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오징어 한 마리가 짬뽕 그릇에 ‘풍덩’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짬뽕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것 같지가 않다. 그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짬뽕이다. 그런데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짬뽕 한 그릇에 6,500원이라니. 이 시골구석에서 가격도 착하지 않은 평범한 짬뽕 한 그릇에 많은 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그래도 음식을 시켰으니 어찌하랴, 배도 출출한 김에 짬뽕을 한 번 뒤집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야. 바닥에 깔린 것이 해물이다. 어림잡아 오징어 한 마리를 통째로 집어넣은 듯하다. 국물도 얼큰한 것이 일품이다. 이곳을 소개한 분은 ‘이 집 짬뽕에는 오징어가 두 마리가 통째로 들어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정말 그랬으니 말이다. 먹어도 먹어도 오징어가 또 나온다, 아마 한 마리를 통째로 썰어 집어넣은 듯하다. 세상에 짬뽕 먹다가 턱이 다 아파보기는 또 난생 처음이다. 결국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을 들리는 분이 있으면 턱 한 번 아파보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에 짬뽕 한 그릇 먹다가 턱이 다 아파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결국 시골 허름한 집의 짬뽕 가격 6,500원이 비싼 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아주 착한 가격이기 때문이다.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8일간 수원은 시끌벅적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 박수를 치기도 하고, 환호를 지르기도 한다. ‘2012 수원화성 국제연극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진주’, 다국적 연극단의 ‘나비의 꿈’, 호주의 아크로바트 공연인 ‘낙하프로젝트’와 일본의 ‘서커스 퍼포먼스’, 중국의 ‘인어공주’와 러시아의 ‘러시아 카바레’ 등 해외 참가작과 우리나라의 극단들이 참여를 해서 화성행궁광장, 수원천 길거리 공연장, 장안공원 등 여러 곳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국내공연작 중 예술무대 ‘산’의 길거리 인형극인 선녀와 나무꾼의 뒷 이야기인 ‘선녀의 날개를 찾아서’가, 29일 수원천 거리공연으로 오후 7시부터 화성 남수문 앞 지동교에서 펼쳐졌다.

 

 

 

아름답지만 슬픈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

 

초등학교에서 배운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나무꾼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선녀는 그저 인간세계로 내려와 날개옷을 빼앗기고, 아이를 셋이나 낳은 후에 날개옷을 입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상황을 조종하는 것이 바로 나무꾼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슴의 배후조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조현산 구성 연출로 극으로 꾸며진 ‘선녀의 날개를 찾아서’에서는 5m의 대형 인형으로 관람객들을 만나게 되는 나무꾼과, 선녀의 슬픔을 확장된 커다란 얼굴을 가진 선녀, 자신의 의사대로 선녀와 나무꾼의 일생을 좌지우지하는 사슴 무리들이 출연을 한다.

 

 

20년 동안 인형극에 푹 빠져 있었다는 연출자 조현산은 연출의 변을 이렇게 말한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미쳐 모르고 지나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녀와 나무꾼은 선녀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사슴이 시키는 대로 따라한 나무꾼의 이야기가 주가 됩니다. 하지만 과연 날개옷을 빼앗기고 아이를 낳고 살았다고 해서 선녀가 행복했을까요? 아이를 셋이나 낳은 선녀가 날개옷을 찾아 입고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갔다는 것은, 선녀는 행복하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날개옷은 선녀의 자유의지입니다. 그 옷을 빼앗긴 순간 선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런 점들을 인형극으로 구성을 해, 수원천에서 사람들과 조우를 하는 것이죠.”

 

사슴들의 조종을 받는 나무꾼의 머리는 창살에 갇혀

 

5m 높이의 큰 머리를 가진 나무꾼은 인형으로 대신했다. 그 인형의 뒤에는 조종석이 있다. 사슴들이 그 곳으로 올라가 나무꾼을 조종한다. 나무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슴들이 번갈아 조종하는 대로 움직인다. 나무꾼의 머릿속에는 선녀의 날개가 있다. 그리고 나무꾼의 머리는 창살로 옭매어있다. 늘 갇혀있는 사고로 인해 자신이 아닌 사슴의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는 창살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슬픈 얼굴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큰 머리의 선녀가 등장한다. 선녀는 나무꾼에게 날개를 빼앗기고 슬픈 표정으로 나무꾼과 만난다. 그 뒤로는 사슴들이 쫒아 다니면서 선녀와 나무꾼에게 강요를 한다. 자유롭게 날기를 원하는 선녀는 객석 밖으로 나가,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를 갈망한다.

 

큰 도끼를 손에 쥔 나무꾼은 이미 자아(自我)가 없다. 뒤에서 조종하는 사슴들의 의지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상징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공연장을 떠났던 선녀가 다시 돌아왔다. 사슴들은 갖은 회유를 하다가 선녀에게 날개를 갖다 준다. 그러나 선녀는 이곳에서는 하늘로 올라가질 않는다. 날개옷 그 자체가 바로 자유로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500여명의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0분 동안 펼쳐진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선녀는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닦고, 나무꾼에게도 돌아갔다. 공연 내내 슬프던 선녀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보인다. 자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자유는 환경 등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선녀 역 김양희(여, 36세) 대담

 

- 연극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바로 연극무대에 올랐으니 한 13~4년 정도 된 듯하네요.

 

- 이 극에서 선녀 역을 맡아하셨는데, 선녀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를 하셨는지?

우리가 극중에서 만나게 되는 선녀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무꾼과 살아야했고, 아이를 낳기도 했으니까요. 날개를 다시 찾고는 바로 하늘로 올랐다는 것은, 나무꾼과의 생활이 행복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하죠. 아마도 이 극중에서 선녀는 쉴 새 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 날개를 찾고도 하늘로 올라가질 않았는데?

예, 아마도 극중에서 선녀가 느끼는 감정은 다양한 것 같아요. 슬픔과 기쁨, 그런가하면 어두움과 밝음, 그런 것들이 교차를 하니까요. 이 극에서 저희가 관객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목소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하늘에 올라가지 않아도 날개를 찾았다는 것은 갈망하던 자유를 찾았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 공연은 어느 정도나 하시나요?

저희 극단은 해외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한 달이면 한 일주일 정도만 쉬고 20일 이상을 공연을 합니다.

 

 

- 앞으로 꼭 맡아서 하고 싶은 배역이 있다면?

이상하게 저는 독한 역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독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극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예, 고맙습니다.

청설모들은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주워 먹는다. 산 속에 사는 청설모는 ‘청서’라고 부른다. 다람쥐과에 속하는 청설모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미끄러운 나무줄기도 잘 기어오르며, 가느다란 가지 위에서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다. 나무 위에서 살기에 알맞은 몸을 가지고 청설모는 날렵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개체들 사이에 색깔의 변이를 보여 적갈색이나 갈색, 혹은 검은색 개체들이 나타난다. 초식성인데 먹이는 계절에 따라 변한다. 가을에는 과일이나 열매를 먹지만 겨울에는 소나무의 씨 등도 먹는다. 더욱 먹이가 더욱 귀해지는 겨울철이 되면, 사람이 사는 민가에도 들어와 닥치는 대로 주워 먹기도 한다.

 

 

유산균 음료 훔쳐 먹는 청설모도 있다고

 

강원도 절집에 살고 있을 때 주변에는 몇 마리의 청설모가 가끔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녀석들은 가리는 것이 없다. 그저 집 앞에 먹을 것이 있다 싶으면 4~5마리가 떼를 지어와 먹을 것을 집어간다. 가끔은 이 녀석들의 집단행동이 두려울 때도 있을 정도였다니.

 

자전거 옆에 있던 유산균을 발견한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 설마 저것을 먹을까? 생각을 했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유산균 음료 병을 들고 마개로 씌운 종이를 잘도 찢어낸다. 그러더니 흡사 자기 것인 양 먹고 있더라는. 아마도 이 증거 사진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자전거 옆에 놓아 둔 유산균 음료를 발견하고 나무에서 내려오고 있는 이 녀석


 

 

뚜껑을 막은 종이를 입으로 뜯어 내더니 잘도 먹어 댄다. 세상에 사람과 가까이 살다가 보면 이런 것도 배우는가 보다


천연기념물 제290호 괴산 삼송리 왕소나무. 삼송리의 소나무는 마을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작은 소나무 숲 가운데 서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12.5m이고, 수간 둘레는 4.5m이다.

 

이 숲에서 가장 커서 왕소나무라고 불리며,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줄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용송(龍松)’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삼송리라 부른 것도, 이 소나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인근에 이와 비슷한 노송 3그루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삼송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왕송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지킴이로 숭앙을 받던 소나무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매년 1월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며 새해의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한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에 대한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송리의 소나무 역시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주민들의 보호를 받아왔다.

 

이런 천연기념물인 소나무가 28일 전국을 강타한 태풍 불라밴으로 인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오전 9시까지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10시 쯤에 보니 뿌리 채 뽑혀 쓰러져 있었다는 것.

 

유리창보다도 못한 국보와 천연기념물

 

28일 하루 종일 모든 방송사들은 실시간으로 태풍의 진로와 피해상황 등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방송사들이 앞을 다투어 유리창이 깨지고 전기가 나갔다고 열을 올려 방송을 하고 있는 시간, 국보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지붕 기왓장들이 날아가고, 천연기념물 삼송리의 왕소나무가 뿌리 채 뽑혀버렸다.

 

그러나 방송에선 그런 것에 대한 보도 한 번 들을 수 없었다. 다만 YTN이 각황전과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일부도 피해를 입었다고 방송을 할 뿐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데 그까짓 문화재가 대수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600년 이상을 그 자리에서 지켜 온 소나무이다. 그 의미가 남다르다.

 

 

왕소나무를 애도한다.

 

600년이란 역사를 생각해 보자. 100년도 못 넘기는 인간들에 비해, 말없이 이 땅과 민초들의 삶을 600년이나 보아온 나무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즐거움을 알고 있었을까? 마을에서 서낭목으로 삼아 마을의 안녕을 빌어 오던 나무이다. 그런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송두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진출처 / 세종데일리

 

태풍이 올 때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들이 수난을 당한다. 지나고 난 뒤에 미쳐 간수를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사전에 방비를 할 수는 없었을까? 풍속이 50m이면 나무가 뿌리채 뽑히고, 전신주가 넘어간다고 방송에서 수도없이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다면 더 높고 더 바람을 많이 받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이 왕소나무는 당연히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닌가?

 

바로 이런 점이 쓰러진 채 널브러진 왕소나무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나무도 오래 묵으면 정령이 있다고 했던가? 오늘 이 왕소나무를 애도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