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름답고 편안한 정자다. 어느 정자라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이 정자만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강릉시 운정동 경포호 서쪽에 자리잡은 해운정. 보물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흔치 않은 가치를 지닌 정자다. 해운정을 처음 찾았을 때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널려진 쓰레기와 수북한 담배꽁초, 그리고 부수어진 건물잔해.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만난 해운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9월 해운정을 세 번째로 찾았을 때, 해운정은 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운정은 언제나 아름답다. 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정자들 중에 열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난 머리에 해운정을 둔다. 그만큼 아름다운 정자이기 때문이다. 해운정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난 이 정자에는 늘 바람이 쉬어간다고 생각을 한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지은 지가 480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때의 고고함을 그대로 간직한 정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한 어촌 심언광이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해운정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해운정은 오른쪽 두 칸은 마루로 만들었다. 문은 모두 네 짝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하여 시원하게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왼쪽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중간을 장지문으로 막아 구분을 해 놓았다. 여름과 겨울을 모두 이곳에서 지내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해운정은 대문을 두었다. 대문에는 방을 마련해 기거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아마 늘 이곳을 지키고 싶었는가 보다. 그만큼 지은이는 이 해운정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발길이 머무는 곳, 해운정. 해운정 마루에는 율곡 이이 등의 글이 걸려 있고, 명의 사신 공용경이 쓴 <경호어촌>이란 글과, 부사 오희맹의 <해운소정> 등의 글이 있다. 그만큼 해운정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는 이야기다.

 

해운정의 뒷편에는 가지를 처트린 소나무가 서 있다. 늘 보아도 그 자리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해운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언제나 보아도 그 소나무 가지에는 바람 한 점이 걸려 있다. 모처럼 들른 해운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생겨났다. 그리고 철 늦은 연 몇 송이 수줍은 듯 얼굴을 감추고 있다.

 

  

  

 

바람이 쉬어가는 정자 해운정. 그 정겨운 모습에 근처를 지날 때면 꼭 들르고는 한다. 그곳에서는 다리를 편히 놓고 바람과 이야기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단을 높이 쌓고 처마를 높여 아름다움을 더했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숨 죽이고 다소곳 아름다움을 간직한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다.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앞으로 또 많은 시간이 지나도, 아마 바람은 해운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저 마루에 걸터앉아 한 여름을 쉬어도 좋고, 온돌방을 달구어 놓고 담소를 해도 좋다. 언제나 들러보아도 정겨운 곳. 해운정은 그래서 바람의 발길을 붙들고 있는가 보다. 

김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공석, 호는 십청헌(十淸軒), 지비옹이라 했다. 벼슬을 그만 둔 김세필은 이곳 말머리에 입향하여 공자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 시초가 되어 지천서원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서원은 비탈에 세웠는데, 아마 이 공자당은 십청헌이 정자로 삼아 후학들을 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앉은 자리부터가 다르다. 돌계단 위에는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는 솟을대문이 서 있는데 앞에는 경모문(景慕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는 1936년에 건립한 사우가 자리한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팔성리 고가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지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이 향교나 서원의 대문 앞에 자리하는데 비해, 이 지천서원은 홍살문을 지나 사우까지 꽤 떨어져 있다. 홍살문 좌측으로는 비들이 줄지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앞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심청헌 김세필이 세운 공자당

  

우측으로는 작은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뒤편에 공자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자당은 그 형태가 '공(工 )'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나, 문이 잠겨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다. 공자당이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영조 10년인 1740년이라고 하니, 심청헌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앞에서 보면 평범한 공자당

 

낮은 울타리 안에 자리한 공자당. 비탈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네 칸으로 꾸며진 공자당은 양편에 방을 놓고, 가운데 두 칸의 마루 대청이 있다. 대청의 뒷벽에는 중수기 등이 걸려있는데, 멀어서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공자당의 우측 벽 밑으로는 한데 아궁이가 나 있어 이곳에서 불을 때고 겨울에도 이용을 한 듯하다. 아궁이 위 벽이 시커멓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요즈음에도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천서원은 정조 24년인 1800년에 중건하였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기도 했다. 그 후 1893년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1898년 공자당을 중건했다.


8현을 모신 사우

 

지천서원의 사우에는 십청헌 김세필을 비롯해 모두 8분을 모시고 있다. 동문선에 시문이 실린 고려 말기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는, 고려 말기에 안동에 은거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자결을 하였다. 충민공 김저는 중종 7년인 1512에 태어나, 명종 2년인 1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저는 흉년이 들자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파견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문에 능한 눌재 박상. 『눌재집』을 남긴 박상은 이행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 외에도 남곡 김의, 추곡 김정현, 학주 김흥욱, 성남 김종현 등을 제향하고 있다. 좁은 터에 자리를 한 때문인지 공자당과 담으로 구분을 한 사우. 일반 서원과는 달리 단 두 채뿐인 전각이 자리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늙은 소나무에서 잎들이 떨어진다. 몇 곳을 돌아다니느라 발도 손도 꽁꽁 얼었지만, 이렇게 운치있는 서원 하나를 만나면 그런 추위도 잊고 만다. 사람들은 그렇게 날 추울 때 다니는 것을 보고, '날이나 풀리면 다니라'고 하지만, 틈만 나면 다녀와야 직성이 풀린다. 아마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었나보다. 작은 서원 하나를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못함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다.

'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디를 가든지 나가야만 한다. 답사를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오늘(9월 4일)은 준비를 하는 일이 있어, 멀리는 못가고 가까운 화성 외곽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후 2시 경에 집을 나서 화성을 반 바퀴 돌았다. 그런데 낭패가 있나,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오더니 배터리가 떨어졌단다.

 

이럴 때 난 늘 감사를 한다. 요즈음에는 아이폰으로 촬영을 해도 쓸 만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절반만 돌기고 작정을 하고 나갔으니, 당황을 할 필요도 없다. 화성 남쪽의 용도부터 화서문(서문) 까지 걸었다. 이미 바짓가랑이는 다 젖어버렸다. 신발 안에도 물이 들어와 질퍽거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십년 넘어 만나는 반가운 친구의 부탁

 

“예, 하○○입니다”

“야, 임마 나다”

“누구신데요?”

“야, 나 신○○이야, 그저께 한국에 나왔다”

“정말이냐 그럼 진작 연락하지 그랬냐.”

“아버님 묘소에도 찾아뵙고 그러느라고. 너 전화번호 바뀌는 바람에 애 먹었다. 너 지금 어디냐?”

“나, 지금 화성 돌고 있는데”

“야. 너한테 ○○이 하고 가는 길이다”

 

이런 친구 녀석들이라고는. 십년이 훌쩍 지난 다음에 한국에 나왔다고 찾아온단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가관이다.

 

“부탁 하나하자”

“먼데?”

“야, 한국에 들어와서 매끼 식당에서 먹었더니 죽겠다. 네가 밥 한 그릇 해줘라”

“미친 놈, 내가 어떻게 해줘. 가정식 식당 데리고 갈게”

“필요 없다. 그냥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밥이나 해줘라”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머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밥을 해줘. 그러면서도 시간을 보니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여유가 없다. 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냉장고부터 열어본다. 마땅히 음식을 마련 할 것이 없다. 두부 한모, 명태포, 어묵, 감자 몇 개, 참치 한 통. 그것이 다이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십 수 년 만에 한국에 나온 녀석인데 그냥 김치라도 우리 것을 먹이고 싶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녀석이라 형제 같은 놈이다.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잠도 같이 자고는 했던 녀석이다.

 

친구녀석을 위해 준비한 상차림

 

참 이것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냥 있는 찬만 갖고 먹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미안한 감도 있다. 우선 있는 것을 갖고 준비를 시작했다.

 

 

 

1. 명태포 계란국

① 우산 명태포를 잘게 잘라 물에 불렸다. ② 그리고 청양 고추를 하나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가급적이면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너무 짠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③ 끓고 있는 동안 밥을 앉혔다. ④ 물이 끓을 때 미리 준비한 계란을 넣고 저어준다. 그렇게 동태포 계란국이 완성이 되었다.

 

 

2. 어묵감자볶음

① 감자와 어묵을 채썰기를 한다. ②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 볶아준다. ③ 너무 타지 않게 볶다가 통깨를 조금 넣어준다. 간은 소금으로만 맞춘다. 소금은 1,000도에서 구운 소금을 사용하다.

 

 

3. 두부와 소시지 부침

① 두부와 소시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계란에 담갔다가 프라이팬에 부친다. ② 간은 미리 계란을 풀을 때 맞추어 둔다. ③ 너무 타지 않게 적당히 익힌다.

 

 

4. 참치 김치찌개

① 언제나 빠지지 않는 나의 주 메뉴이다, 굳이 많은 반찬이 필요하지 않다. ② 김치와 참치통조림을 함께 넣고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③ 고춧가루를 조금 풀어 매콤하게 만든다. ④ 팔팔 끓을 때 떡을 조금 넣어준다.

 

있는 자료를 갖고 준비한 음식이다. 그런데 참 블로그가 무엇인지. 요리하랴 사진 찍으랴 하다가 보니 땀이 줄줄 흐른다. 그리고 집에 있던 찬인 김치와 깻잎, 명란젓과 조개젓, 무장아치, 김을 차려 놓았다.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한 시간이 좀 더 걸렸나 보다.

 

 

단 두 녀석이 왔다 갔을 뿐인데

 

준비를 마치고 나니 두 녀석이 들이닥친다. 하도 허겁지겁 준비를 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두 녀석은 연신 ‘고맙다’와 ‘맛있다’를 연발한다.

 

“야, 너 옛날 음식솜씨 안 변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먹기나 해라“

“그런데 이제 사람 필요하지 않냐, 언제까지 혼자 밥 해 먹을래?”

“됐네, 이 사람아”

 

농을 할 정신은 있다. 전화가 울린다. 연신 “예, 예”를 연발하더니 수저를 놓자마자 올라간단다. 사업차 왔는데 시간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야, 네가 내일 서울로 올라와라”

“시간이 어찌 되려나 모르겠네.”

“너 안 오면 내일 또 밥 먹으로 온다.”

 

 

그렇게 두 녀석은 가버렸다. 전쟁이 따로 없다. 단 두 녀석이 왔다갔을 뿐인데, 그릇이 산더미다. 내일은 어디 멀리 답사를 가던지 해야겠다. 이왕이면 저 녀석들을 끌고 갔으면 좋으련만.

요즈음이야 고령사회가 되었으니, 60년이란 세월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분야에서 60년을 외길로 걸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손은 그렇게 곧추세우지 말고 비스듬히 해서 아름답게 끌어 올려”

 

음악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김진옥 선생은 벌써 춤을 시작한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께 이끌려 처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강산이 5번이나 뒤바뀐 세월이 되었다.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흥건히 흐르고 있는 날이지만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제자도 모두 열심이다.

 

“교방춤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흥과 한을 동시에 갖고 있는 춤이다. 먼저 마음으로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교방춤을 출 수가 있어”

 

 

부채를 쥔 손 하나하나를 지적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타이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열심을 하는 길만이 제대로 된 춤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진 교방춤

 

교방무는 고려 문종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관기제도에 따라 교방청에서 전해진 춤을 말한다. 교방청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절을 맞이할 때, 관에서 특별히 기예를 익힌 ‘예기(藝妓)’들로 하여금 연희에 참석을 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관의 한 기구였다.

 

교방은 고려 때부터 제도적으로 곤에 속해 예기들을 가르쳐 왔으며, 조선조 광무 4년인 1900년에 궁내부에 교방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산왕조의 몰락과 함께 관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1905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교방에 속해있던 예기들은 ‘기녀조합’을 결성하게 되었고, 악가무(樂歌舞)로 생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단단한 기본으로 다져진 춤꾼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진옥 선생(여, 65세)은 남다른 열정을 갖고 춤을 추는 춤꾼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춤은 이제는 선생에게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다. 하루에도 몇 곳을 돌며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쳐야 한다며 늘 바쁜 걸음을 걷는다.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춤을 춘 세월도 오래지만, 그만큼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제자를 키워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국내외를 돌면서 한 공연 횟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동안 참 숨 가쁘게 달려왔네요. 지금은 저희 교방춤 보존회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에 까지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외국 공연도 활발하게 하였죠. 이제는 한 숨 돌리고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요.”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릴 것

 

경기도와는 이미 1990년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990년에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경기도지회에 무용부가 발족이 되면서 지회장인 김동숙으로 부터의 부탁을 받아 회원들을 가르친 것이 경기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써 경기도에서의 2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1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무용부는 1994년 문화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을 가질 만큼 열심들을 냈다.

 

2001년에는 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를 맡기 시작하면서, 경기도의 춤꾼들에게 본격적으로 교방춤을 가르쳤다. 무용을 전공한 제자들만 하여도 수십 명에 이르고 일반인들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수백 명이 넘는다고 한다.

 

“경기도는 화성재인청(수원)이 있던 곳으로 제인청의 춤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선생님들 말씀을 들으면 교방 또한 경기도의 여러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화성행차시나 혜경궁 홀씨의 연례에도 교방에 속한 예기들이 연희를 한 것을 알 수가 있죠. 하기에 경기도는 교방춤에 대한 재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기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안성 국립한경대학을 비롯하여 명지대학교 예술종합원, 경기국악당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기도에도 교방춤보존회 경기지회(지회장 심규순)을 비롯해 화성, 수원, 용인, 안성, 평택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그동안 춤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교방춤을 가르친 고 정민선생을 비롯하여 전 진도씻김굿의 보유자인 고 박병천 선생, 그리고 벽사 한영숙 선생의 전통춤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늘 마음이 바빠진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있으니 제자들과 함께 무엇인가 경기도를 위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명인명무전 등에 초청이 되어 춤을 추면서도 늘 경기도에서 큰 무대를 한 번 만들고 싶었거든요. 내년쯤에는 경기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20년을 넘긴 기념으로 교방춤의 제전을 한 번 열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선생님들께 그동안 배워 온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선생은 몇 년 전에 mbc TV 일일연속극 ‘왕꽃선녀님’에서 탤런트 사미자와 이다해에게 한국무용을 지도하여, 극중 문화센터 한국무용강사로 직접 출연하여 한국무용을 지도하는 장면이 여러 회 방영 된 바도 있다. 대담을 하면서도 연신 제자들의 연습을 하는 곳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김진옥 선생. 아마도 그런 열정이 있는 한 경기도에 멀지 않아 교방춤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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