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이란 조선조 사헌부에 속해있던 정6품의 관리를 말한다. 감찰은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정원은 24명으로 지방관의 비위를 규찰하기 위한 파견도 나갔으며, 각 관서에서 회계감사 등을 위해 사헌부의 검찰을 요청하는 청대에도 파견되었다. 감찰은 원래 고려시대 어사대의 감찰어사직을 계승한 직책이다.

 

집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그저 평범한 듯 하지만, 어느 한 곳은 딴 집과는 다른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집들이 있다. 감찰댁이 바로 그런 집 중 하나이다.

 



 

아산시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가면 이러한 '감찰댁'이란 택호가 붙은 집이 있다. 외암민속마을이 동씨족의 마을이기 때문에 택호를 붙일 때 평소의 직책이나, 그 집의 동족 내에서의 위치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찰댁을 찾아갔을 때는 한창 보수공사를 하느라, 한편이 부산하다. 눈이 온 뒤에 질척거리는 땅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본 감찰댁, 정리를 다 마치고 나면 나름 아름다운 고택일 것이란 생각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

 


관리들을 규찰하는 업무를 보았던 감찰댁은 의외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다.


일각문 옆에는 돌담 앞에 작은 연못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감찰이란 직책은 비록 높지 않으나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직분으로 만일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찰을 선정할 때는 명망이 있는 자들로 선정을 했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위를 보장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감찰이 살던 집이었던 감찰댁은 한 마디로 크지는 않으나,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문도 솟을대문이 아닌 일각문이다. 일각문 우측에는 연못을 파고, 돌담을 둘렀다. 일각문이 닫혀있어 공사를 하는 곳으로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측으로는  작은 못이 있고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된 정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에도 연못과 정자가 서 있다. 소탈하지만 멋을 낼 줄아는 집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이 참으로 정겹다고 느껴지는 집이다. 외암민속마을의 대개의 집들이 이렇게 돌담으로 꾸며져서, 돌담길의 운치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한편에 누정을 올린 안채

 


감찰댁에는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안채 앞에 작은 정원 등과 주변의 숲이 잘 어울린다.


안채 한편에 자리잡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당.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있다.

 

현재 외암리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감찰댁은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진 것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너른 앞의 정원 등으로 보아 행랑채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ㄱ 자 집으로 지어졌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작은 동산으로 조성한 정원의 뒤편에 자리한다.

 

안채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방을 서쪽으로는 마루방을 들였다. 아래쪽으로는 안방이 있고 이어서 부엌과 작은방을 꾸몄다. 집은 크지 않지만 단아한 품위를 지키고 있어, 이 집 주인의 심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안채의 한편 끝에 마련된 누마루방. 아래로는 아궁이를 내고 담벽을 까치구멍으로 둘렀다. 위로는 누마루방을 내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이 감찰댁의 안채의 특징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볼 때 오른쪽 끝에 낸 마루방이다. 아래로는 아궁이를 두어 벽을 까치구멍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낸 방을 꾸몄다. 기단을 장대석이 아닌 네모난 돌을 이용해 쌓은 것도 이 집이 주는 느낌이 검소하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는 감찰댁. 그저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정겨운 집이다.

 

굴뚝과 우물의 여유로움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굴뚝. 네모난 곳에는 그림을 그린 도판이 있던 자리로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이 정겹다. 감찰댁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았다. 관리를 규찰하는 업무를 보는이답게 검소하게 지어진 집이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높은 굴뚝이 하나 서 있다. 이 굴뚝의 가슴 높이정도에는 사방에 네모난 공간이 보인다. 무엇을 떼어낸 듯하다. 아마 이곳에 도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도판에 무슨 그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방에 있는 떼어낸 자국으로 보아 멋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비어진 부분을 할 빨리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뒤편으로 돌아보니 안방의 뒤편에 우물이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은 덮개가 다 부수어졌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정원과 정자 연못 등이 아우러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깨끗한 집이다. 집 주인은 감찰이란 직책에 알맞게 살아온 듯하다. 집은 비록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주변에 대밭과 정원 등과 어우러지는 외암민속마을 감찰댁. 이런 여유로움에 파묻혀 지내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

태풍 '볼라벤'은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에도 상처를 남겼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속초 등에서 실제로 목격한 바로는, 기왓장 등이 수시로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럴 당시 바람은 초속 10~15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태풍 블라벤의 바람은 기왓장 정도는 당연히 날아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오늘 오전 국보 67호인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기와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또 보물 396호인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일부도 파손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아무래도 사찰 등은 지붕을 기와로 올리기 때문에, 그만큼 태풍이 강한 바람을 동반하면 전각의 지붕들이 가장 심한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전라남도가 문화재청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진 문화재의 훼손은, 국보 각황전과 보물 흥국사 대웅전 정도겠지만, 태풍이 끝난 뒤 전국의 사찰 등에서는 기왓장이 훼손 등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볼라벤은 내륙으로 진입을 했다고 하지만, 문제는 14호 태풍인 덴빈이 바로 올라온다고 한다. 문화재 보존 등에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태풍으로 인해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태풍 피해들은 없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폭풍전야’라는 말들은 잘 아시죠. 직설적으로 보자면 폭풍이 일기 전에는 오히려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제 태풍으로 인해 모든 전달매체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태풍 볼라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시간.

 

경기도 여주의 도자세상의 지붕 위에는 흰 개 한 마리가 올라가 있습니다. 그것도 새끼를 등에 태운 채 말입니다. 참 자연을 묘한 것입니다. 뭉게구름을 보는 순간, 저 구름에 꼭 강아지 한 마리를 등에 업은 어미 개처럼 보였습니다.

 

 오후 6시경에 여주 도자세상의 기외 지붕 위에 어미 개 한 마리가 올라가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개가 지붕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는


 

 등에는 새끼도 한 마리 태우고 있습니다


 

문경 동로면에서 충북 단양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도로변에,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무송대(舞松臺)’라고 부른다. 춤을 추는 소나무가 서 있다는 곳이다.

 

이 춤추는 소나무를 보면 어떻게 소나무가 저렇게 자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지들이 마치 사람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이리저리 휘어진 가지들이 춤을 추는 동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춤추는 소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말무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무송대 한편에는 말무덤(=馬塚)이라고 작은 돌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작은 봉분이 하나있다. 이 말무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우리나라로 귀환한 명 지관인 두사충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두사충은 조선조의 문신인 약포 정탁대감에게 큰 은혜를 입어, 그 보답으로 정탁대감의 신후지지를 보아두었다. 신후지지(身後之地)란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말한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줄기가 문경지방에 와서 황장산(1,077m)을 비롯한 무수한 명산을 잉태한다.

 

 

 

그리고 이 동로면의 적성마을은 묘터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옥관자 서 말, 금관자 서 말이 나온다는 연주패옥(連珠佩玉)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 들린 두사충은 명당 터를 잡아놓고 그 위치를 구종에게 알려놓았다고 한다. 얼마 후 정대감의 아들과 함께 온 구종이 묘 자리를 알려주자, 말이 뒷발질을 해 구종이 죽고 말았다.

 

아직도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져

 

정대감의 아들은 화가 난 말을 죽여 이곳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연주패옥의 명당은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더욱 아직도 이 일대에는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죽음 후에도 자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가보다.

 

 

무송대의 춤추는 소나무와 말무덤. 길가에 서 있는 이러한 나무 한 그루에도 우리들은 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길을 가다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릴 수도 있는 춤추는 소나무. 그 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멋이 깃들어 있다.

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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