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5호인 부소산성은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지금은 사적화하여 잘 정비가 되어있고, 산성 내에는 망월루를 비롯한 정자와, 사비루 등을 복원해 놓았다. 이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군창지를 만날 수가 있다. 군창지란 군사들의 군량미를 쓰일 쌀을 저장해 둔 장고를 말한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를 발견을 했는데, 이 군창터는 백제시대 때 지은 것과 조선시대에 지어진 창고 터까지 발견이 되어 중요한 군사기점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곳에서 발견한 곡물은 조산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곳이 중요한 군사적 요새이거나 피신시설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은 복합 산성형태

 

군창터 건너편에는 또 하나의 표지판이 있는데, 이곳이 부소산성 자리였음을 알려준다. 부소산성은 둘레 2,200m에 면적 약 74만㎡로,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다. 백제 때에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이나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산성은, 백제 성왕 16년인 538년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부소산성은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모르면 알 때까지 배워야

 

얼핏 지나치기에 적당한 높이로 쌓여져 있는 부소산성. 눈여겨보지 않거나,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쉬울 듯하다. 어디를 가거나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긴 것도, 바로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 오랜 시간을 숨죽이며, 사람들의 발길을 가다리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기 때문에 답사는 즐거운 것이 아닐까?

 

가끔은 아주 무식하게 그 소중한 문화재를 놓치고 마는 때가 있다. 나중에 그곳을 지났으면서도 찾아가지 못했음을 늘 한탄하고는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을 어찌 할 것인가?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한 번 지나친 곳을 다시 가기가 어려워진다. 하나라도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공부를 한 것 같다. 모르고 지나쳤기 때문에, 더 꼼꼼하게 검색을 하고 일일이 기억을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그 다음에 그와 비슷한 유형의 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더 반갑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것을 하나 알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란 전문가가 아니면,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많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그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생각이겠지만. 길에 서서 마음만 바쁜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 알아두자.

식당 안이 온통 옥(玉)으로 장식이 되어 있다. 방 여기저기는 옥의 원석이 놓여있는가 하면, 방바닥이며 식탁도 옥이다. 심지어는 마시는 물도 옥수(玉水)이며, 그릇도 옥이다. 담배를 터는 재떨이까지도 목이다. 집안에 들어가면 무엇인가 기분이 좋아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래서 한번 이 곳을 들린 사람들은 다시 찾는가 보다.

 

식당 안을 모두 옥으로 꾸며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우측에 보이는 식당이 있다.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749-1에 소재한 고성 옥류관은 충청도식 음식을 맛 볼 수 있다는 간판이 걸려있다. 옥류관이라는 말에 평양을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기본찬과 생태찌개(아래)

 

이 옥류관은 그야말로 집안 전체가 옥으로 덥혀있어 붙여진 상호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문 앞에 커다란 돌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기묘하게 남자의 성기를 닮은 돌이 눈길을 끈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옥 천지다. 바닥이며 식탁, 그리고 여기저기 널린 옥돌의 원석이 즐비하다.

 

강한 녹의 기운이 느껴져

 

“연세가 드신 분들이나 약한 분들은 우리 집을 들어서면 어지럽다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면 몸이 가벼워지는 듯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옥 제품으로 꾸미게 되었는가를 물으니, 옥류관 주인인 깁병영씨는 원래 <고성 금강(金剛) 뫼 옥>이란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밥과 누룽지(위)와 이집은 물에도 옥이 들어가 있다

 

“고성 통일전망대 앞에 향로봉이 있는데, 그곳에 큰 까치봉은 옥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질 좋은 옥이 나던 곳이죠. 백두대간을 훼손한다고 옥 채광을 막아 그만두고 옥류관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남은 옥을 이용해 음식점을 차렸다는 것이다.

 

음식자랑을 하다가 옥 이야기로 빠져버렸지만, 이집은 모든 그릇이 옥 제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음식을 나르는 종사원들이 너무 무겁다고 하여서 도자기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참 옥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밑반찬을 갖다 놓는다.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간다.

 

 

그리고 놋그릇에 담아 낸 밥은 윤기가 흐르고, 누룽지를 한 사발 갖다가 놓는다. 충청도식 밑반찬에 한정식이 주 요리라고 하는데, 일부러 청정지역에서 잡힌 생태찌개를 시켰다. 상 위 한 냄비 가득 차게 끓고 있는 생태찌개에는 각종 해산물이 가득하다.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옥류관은 옥이며, 음식이며 정말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맛 볼 수 있어 좋다.

 

요즈음처럼 날이 쌀쌀할 때 금강산의 설경을 보거나, 여름철 화진포 해수욕장을 향해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옥류관. 그저 마음 좋은 주인과, 옥으로 장식된 실내, 그리고 옥수에 건강을 생각해 차려내는 정갈한 음식. 진부령을 넘어 간성읍으로 가는 길목에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들어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방안이 뜨듯하면 그저 밥을 잘 먹고 한숨 자고 싶기도 한 집이다. 거기에 마음 좋은 주인의 인심이 맛을 더 한다.

 

주음식 : 충청도식 한정식. 생태찌개

주소지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진부령 넘어 간성으로 가는 길목

연락처 : (033)681-9933 / 010-6376-5878

개울가에 자리를 잡은 정자 하나.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지붕을 보니 돌을 편을 떠 만든 너와지붕이다. 정자를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너와지붕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나무가 아닌 점판암 판돌을 이용한 너와지붕 정자는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 돌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 작은 정자 안에 기둥이 더 촘촘히 서 있어,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정자의 멋을 더한다.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영모정은 그렇게 한가한 모습이었다.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모정은 전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6년인 1869년에 세워졌다. 그 뒤 몇 차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누정의 남쪽내부 중앙에는 永慕亭과는 달리 '永碧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 정자의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량문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었으며, 『진안군지』에 영모정기가 게재되어 있다.

 

 

귀부를 주추로 산은 영모정

 

영모정 아래로 내려가다가 보니 정자의 아랫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원형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물가에 있기 때문에도 그리했겠지만,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이 아니겠는가? 개울가로 향한 정자 정면에 있는 4개의 평주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건립된 까닭에 다른 것 보다 1m정도 더 내려와 있다.

 

개울을 건너 영모정을 바라다본다. 개울 물속에 또 하나의 영모정이 드리워져 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영모정은 주변 경관과 어울러져 더욱 아름답다. 이런 절경 속에서 정자에 올라 그 아름다움에 취해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 그래서 신의현의 효행을 본받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녹음이 짙게 드리워지면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아마 지금보다 더 멋진 영모정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차가운 바람에 개울물에 빠지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아주 가끔은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영모정을 찾았을 때도 참으로 민망한 꼴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보는 이들도 없는데도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한 겨울이었다고 한다면, 다시는 답사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것이다.

 

영모정을 촬영하다가 보니, 괜한 욕심이 난다. 바로 내를 건너가서 물과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가을이라면 개울물에 아름답게 단풍이 함께 느리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삭막한 가지에 잎도 없는 모습을 찍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건널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물이 조금 흐르고 있는 방둑처럼 생긴 위로 조심스럽게 건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런 곳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긴장이 되었나보다. 그만 발이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것도 물속으로. 그 중에도 카메라가 젖었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참 답사는 가끔 사람을 이렇게 이상하게 만드는가 보다.

 

영모정을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만 같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며, 귀부처럼 생긴 주춧돌이며, 또 돌로 뜬 너와지붕까지.

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바위와 각종 꽃나무들이 함께하는 정자 광제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0호인 광제정은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에 자리하고 있다. 광제정은 조선 초기에 양돈(1461∼1512)이 후천리 광제마을에 처음 지었으며, 지금 건물은 양돈선생의 후손 양성모가 187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광제는 양돈선생의 호다. 양돈선생은 서울에서 생원, 진사를 지내다가 무오사화를 피해 아산방(현재, 봉현리)에서 은거하였는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성종 9년인 1478년에 소과에 합격한 양돈선생은 남효온 등이 천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벼슬도 마다한 광제 양돈선생

 

양돈선생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2년인 1788년에 아계사(阿溪祠)를 지어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은 양돈선생의 덕목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정자 안에 걸린 게판에는 김인후, 기정진 등이 남긴 글이 걸려 있다.

 

광제정을 찾은 것은 요즈음 세태에 젖어든 마음을 씻기 위해서다. 이제 대선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새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신의 허물까지 억지로 덮어가면서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보일까 궁금하다.

 

 

양돈선생은 그렇게 주변사람들이 그 문장과 덕행이 아까워 벼슬길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사양을 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더욱 이곳이 ‘세심리’라니.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어, 그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과 권세에 초연하고 싶어서였나?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덕목

 

사람들은 누구나 다 출세를 지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적당히 배를 불릴 수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주변 것들을 먹어치운다. 참 그 배는 많이도 들어가는가 보다. 그러나 오늘 광제정의 주인 양돈선생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자리를 준다고 하는데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요즘 사람들은 이런 선생을 바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이 변했으니 그것과는 관계가 없노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돈선생은 그러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일찍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한창 열을 올리며 대선후보 주변에서 얼굴굳히기에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양동선생의 마음만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라북도 지역 정자의 특징 그대로 지녀

 

광제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크지 않은 정자는 바위 곁에 올려놓았다. 정자의 가운데 방을 마련하고, 사방을 마루로 놓았다. 천정은 중앙부분이 아래로 돌출되었는데, 양편에서 달려드는 용머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 희한한 것은 그 용의 몸 등에 붙어있는 거북이다. 왜 거북이를 이곳에 두었을까?

 

 

세상사 싫어지면 그 거북이 등에 올라타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벗 삼아 더 오래 살고 싶어서였을까? 광제정 곁을 흐르는 냇물은 맑기만 한데, 냇가에 커다란 노거수 위에 한 마리 이름 모를 새가 퍼덕이며 날아간다. 아마 곧 닥칠 눈보라를 피해 어디 깊은 산속으로라도 들어가려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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